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307화 (307/1,000)
  • 308화 닳고 닳은 뉴비 구단 (4)

    -띠링!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당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이 얼마 만에 듣는 알림음인가!

    서버 점검이 끝나자마자 나는 바로 게임에 접속했다.

    간만에 지상의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내 캐릭터는 동대륙 어비스 터미널로 이동해 있었다.

    온몸은 까맣게 탔고 머리는 뽀글뽀글 볶아져 있는 상태.

    아마도 천공섬이 몰락할 때 열풍에 휘말린 결과인 듯싶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크라켄의 껍질 방패와 여덟 다리 대왕의 점액이 아니었으면 정말로 죽을 뻔했지.”

    크라켄의 껍질은 가혹한 심해의 환경에서 단련된 무구답게 모든 열 데미지를 막아냈다.

    여덟 다리 대왕의 점액은 열풍에 녹아 마치 거대한 풍선껌 같은 모양이 되었고 그대로 우리를 둥실둥실 띄워 지상까지 내려다주었다.

    아무튼 이렇게나마 목숨을 부지했으니 다행이다.

    나는 서둘러 주변 지형을 살폈다.

    원래 그저 드넓은 황무지에 불과했던 지형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땅은 극심한 가뭄을 맞은 논두렁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고 그 밑으로는 뜨거운 용암이 흐른다.

    누런 유황가스가 대기를 온통 뿌옇게 만들고 있었고 하늘에서는 회색 재와 쇄설류가 나풀나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분명 낮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시커멓게 물들었다.

    자세히 보니 먹구름이 낀 것이 아니라 매연과 재가 태양빛을 완전히 가리고 있는 것이다.

    우르릉…

    저 멀리서 하늘이 옅게 떨린다.

    천둥이 쳤지만 재와 흙먼지로 이루어진 두터운 장막 때문에 불빛만 희미하게 비쳐 보일 뿐이었다.

    조금씩이나마 있던 오아시스와 수풀들은 싸그리 말라 버렸고 평평하던 대지는 지진과 화산 폭발로 울룩불룩 뒤틀렸다.

    곳곳에 흐르는 용암, 나폴나폴 떨어지는 잿가루 함박눈.

    숨이 턱턱 막히는 광경이다.

    “세기말적이군.”

    나는 혀를 찼다.

    바로 그때.

    위잉-

    위잉-

    접속 이펙트와 함께 두 개의 인영이 일렁인다.

    드레이크와 윤솔이 딱 약속시간에 맞추어 접속한 것이다.

    “하하하. 꼴이 말이 아니네.”

    나는 윤솔과 드레이크를 보며 웃었다.

    그들 역시도 얼굴에 검댕을 잔뜩 묻히고 있는 채였다.

    드레이크는 새롭게 바뀐 세계를 둘러보며 연신 감탄했다.

    “어진. 이게 뭔가?”

    그가 제일 먼저 호기심을 보인 것은 시야 구석에 떠 있는 ‘종족 킬’ 혹은 ‘세대 킬’로 불리는 수치였다.

    종족 킬

    (Generation Kill)

    인    간          0

    리자드맨   0

    오    크          0

    그것은 반투명한 상태창처럼 항상 우측 상단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마 실시간으로 집계되어 전 세계에 중계되는 스크린인 듯하다.

    “간단해. 인간이 오크나 리자드맨을 죽이면 저기에 인간 진영으로 표시되어 있는 곳의 Kill 수가 올라가. 그리고 인간들이 인구수만큼 그 숫자를 나눠서 보너스 스탯 포인트로 받을 수 있지. 리자드맨이 인간이나 오크를 죽였을 때도 마찬가지고, 오크가 인간이나 리자드맨을 죽였을 때도 마찬가지야. …말하자면 각 종족 간의 싸움을 장려하기 위한 버프 보상이랄까.”

    내가 이 수치 개념에 대해 설명해 주자 드레이크는 탄성을 질렀다.

    그는 한참 고민한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인간 종족을 선택하길 잘했군.”

    그러자 윤솔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에? 왜요? 오히려 대격변 이후의 세상에서는 확실한 뒷배가 있는 리자드맨이나 오크가 생존에 유리하지 않을까요? 기본 피지컬도 그쪽이 훨씬 좋을 것 같고요.”

    확실히, 리자드맨들의 뒤에는 용이 버티고 있고 오크들의 뒤에는 악마가 버티고 있다.

    오직 인간만이 기댈 구석이 없는 절망적인 세상.

    하지만 드레이크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 녀석을 적으로 돌리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 말을 들은 윤솔은 드레이크가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쪽에는 킬뎃 그래프를 보며 환희에 몸을 떠는 내가 있다.

    “……도처에 경험치 거리가 가득해. 아아, 너무 좋아. 행복해.”

    이제 사람을 죽여도 PK 패널티 따위는 없다. 더 이상 그들은 사람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윤솔과 드레이크는 상기된 표정의 나를 보고 몸을 오싹 떨었다.

    뭐 아무튼.

    용 군단과 악마 군단의 스카웃 제의를 모두 거절한 나는 대격변 이후에도 인간으로 남았고 드레이크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윤솔이야 뭐 처음부터 내가 신신당부한 대로만 플레이했으니 인간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편.

    드레이크는 시야 한켠에 게임 사이트 창을 띄웠다.

    “호오, 중앙대륙의 초보자 마을도 많이 바뀌었군.”

    “어디요, 어디. 와! 진짜네!”

    윤솔과 드레이크가 스크린샷 게시판을 들여다보며 감탄한다.

    중앙대륙에 있던 초보자 마을은 거대한 지진에 의해 세 조각으로 쪼개졌다.

    각각 인간의 마을, 리자드맨의 마을, 오크의 마을로 변한 것이다.

    각 마을은 한눈에 보기에도 문화 차이가 극명히 드러나는 모양새였다.

    인간은 중세 유럽의 건축양식, 리자드맨은 중세 동양 유목민들의 건축양식, 오크는 상당히 원시적인 건축 양식을 보인다.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레이드를 뛸 거야. 구단 운영비를 벌기 위해서지.”

    나는 유세희와 마태강을 페어로 만들어 게임 적응을 시킨 뒤 따로 윤솔과 드레이크를 데리고 돈을 벌러 나온 것이다.

    자고로 돈은 어른들이 버는 게 맞으니까.

    윤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레이드에 필요한 것들을 사야겠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비스 터미널 초입, 예전에 우리가 공략했었던 리자드맨의 마을이 보인다.

    뜻밖에도, 그곳에는 NPC로 보이는 이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망토와 후드를 뒤집어쓴 채 보따리를 들고 돌아다니는 NPC들.

    예전에 나와 함께 이 마을을 정복했던 경험이 있는 드레이크가 반가운 표정을 지은 채 목책으로 걸어갔다.

    “오? 리자드맨들이 전멸당한 뒤에 사람들이 돌아온 건가?”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쉬익!?]

    가벼운 쇳소리와 함께, 후드를 쓴 NPC들이 고개를 돌렸다.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리자드맨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원래는 몬스터였을 그들이 NPC 흉내를 내고 있다는 것 정도?

    “리자드맨이라는 종족이 추가되면서 원래 있던 리자드맨 몬스터들이 NPC처럼 변한 것뿐이야. 물론 우리에게는 여전히 그냥 몬스터이지만.”

    내가 설명을 마치자마자 드레이크는 쇠뇌를 들었다.

    퍼퍽!

    화살들이 날아 리자드맨들을 고꾸라트렸다.

    언제 봐도 깔끔한 헤드샷이다.

    “그렇군. NPC가 아니라면 카르마 수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물론 돈을 줄 필요도 없겠지?”

    드레이크는 잡화상으로 보이는 리자드맨 NPC의 봇짐을 빼앗았다.

    안에는 포션과 육포, 치즈 덩어리, 자잘한 잡 주문서, 대장장이 키트와 같은 간이 수리기구와 수은 몇 병이 들어 있었다.

    나는 소모품들을 전부 챙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마을 못 들려. 어차피 대격변 이후로 마을 수도 크게 줄어서 이제 중간 마을 찾기는 힘들어질 거야.”

    그러자 윤솔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럼 중간중간 오크와 리자드맨들을 습격해서 소모품을 빼앗아야겠네?”

    “…은근히 적응 빠른데?”

    애들 연봉 챙겨 주려면 기합 단단히 넣고 출발해야 한다.

    우리가 막 결연한 표정으로 레이드를 시작하려는 순간.

    “at! duruwoon human nomdle!?"

    어디선가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목책 저 너머에서 세 개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이 보인다.

    일반적인 NPC의 행동반경을 크게 벗어나서 행동하고 있었으므로 플레이어라고 간주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지금껏 우리가 봐 왔던 일반적인 플레이어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녹색, 또는 황색의 피부.

    터질 듯한 근육과 위로 툭 불거져 나온 어금니.

    일반적인 인간보다 키가 십 수 센티미터는 더 큰 근육질 괴물들.

    오크(Orc)!

    우리는 오크로 전직한 플레이어들을 마주한 것이다!

    그들은 허리에 도끼와 쇠망치를 들고 콧김을 쒹쒹 뿜어냈다.

    "bumonim anbu hellow?"

    "ni ne umma!"

    “negu abuji mohasino?"

    오크 유저들은 뭐라뭐라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지만 당최 어느 나라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자동 통역 서비스는 전혀 제공되지 않고 있었다.

    “어진, 뭐라는 거냐?”

    드레이크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물론 나라고 해서 저들의 언어를 알아들을 방법은 없다.

    인간의 언어는 고대 바이킹들이 사용하던 ‘룬어’

    리자드맨의 언어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사용하던 ‘고대 그리스어’

    오크들의 언어는  중국령 투르키스탄 북부에서 사용하던 ‘토하라어’(토하리스탄 지방의 토하라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음)

    이것이 상대 종족에게 들리는 소리들이다.

    지금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사어(死語)가 되어 사라져 버린 언어들.

    이제는 국적이 문제가 아니라 종족이 문제이다.

    현실의 국적 차이는 의사소통에 아무런 지장이 없지만 게임 속에서 종족이 다르면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흠. 우리 부모님 안부를 물어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크들의 언어를 어느 정도 알아들었다.

    지난 15년 중 10여 년 간을 대격변 이후의 세상에서 살아온 나다.

    아무리 리자드맨과 오크의 언어를 모를지라도… 그동안 수도 없이 들어온 몇몇 욕들은 기억하고 있다.

    한때 커뮤니티 등에서 필수 고대어라고 해서 이종족의 언어를 익히는 것이 유행했었던 적도 있었으니…

    ‘흠, 아무리 오크로 진화했더라도…그 전에는 인간이었을 텐데 나를 모른다고?’

    순간, 나는 지금 상황을 깨달았다.

    대격변의 폭풍에 휘말리며 우리들은 모두 몰골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온몸이 검댕 투성이에 머리마저 뽀글머리가 되어서 그런가?

    오크 유저들은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군.”

    나는 하는 수 없이 허리춤에 매달린 깎단을 빼들었다.

    “부모님 안부를 물어보신다면.”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

    이제는 나와 꽤 죽이 잘 맞게 된 드레이크다.

    뒤에서 힐을 준비하는 윤솔, 두 개의 쇠뇌를 들어 올린 드레이크.

    그리고 깎단을 덜렁거리는 나.

    이제,

    격변한 세상으로 나갈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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