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305화 (305/1,000)
  • 306화 닳고 닳은 뉴비 구단 (2)

    “면회시간 다 되셨습니다.”

    간호사들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면회시간 종료를 알렸다.

    엄재영은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수술 잘 됐다니 곧 퇴원할 수 있을 거야. 조금만 참아.”

    아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엄재영은 입을 꾹 다문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위이이잉-

    중환자실을 나오자 근엄하던 엄재영의 표정은 또다시 스르르 무너졌다.

    “…다행이야…일찍 발견해서 정말 다행이야…….”

    그는 또다시 나를 끌어안고는 훌쩍이기 시작했다.

    “…….”

    나는 엄재영의 눈물로 축축해진 어깨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예전에 용산에 있는 엄재영의 집에 방문했을 때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미래 지식 한 토막이 있었다.

    ‘엄재영 감독은 대격변 이후 아내를 잃는다!’

    게임이 출시되고 약 5년이 지났을 무렵, ‘국K-1’ 팀을 이끌며 명장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엄재영이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이 이유는 바로 아내 때문이었다.

    오희선. 그녀는 머지않아 세상을 떠나게 된다.

    사인은 갑상선암이었다.

    그냥 만성 피로와 목감기인 줄 알았지만 사태는 훨씬 더 심각했었던 것이다.

    암세포는 5년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그녀의 몸 전체에 전이되었고 발견했을 즈음에는 이미 더는 손쓸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엄재영은 엄청난 슬픔에 사로잡혀 몇 년을 폐인처럼 지내게 된다.

    …어디까지나 원래 미래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오희선에게 건강검진을 받아 보라고 끈덕지게 권유했고 그녀는 나의 정성(?)에 못 이겨 암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역시나, 그녀의 몸 안에서 막 다음 단계로 전이되기 직전인 암세포가 검출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초기라서 수술 성공률은 높았다.

    엄재영은 아내의 암 진단에 기겁을 하고 달려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간호에 일로매진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오늘이다.

    아내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잘 끝난 것을 확인한 엄재영은 자리에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동안 지나치게 긴장해 있었던 탓이리라.

    “다리 풀리셨네요. 괜찮은 거 맞아요?”

    내가 엄재영을 부축해 일으키려 하자.

    쿵!

    엄재영은 갑자기 반쯤 폈던 무릎을 다시 굽혔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가 아니었다.

    그는 아예 내 쪽을 향해 돌아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고맙다 어진아. 다 네 덕분이야.”

    “뭘요. 그냥 형수님 안색이 나쁘셔서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거죠.”

    “네가 내 아내를 구했어. 나를 구해 준 것보다도 더 고맙다.”

    “어휴. 됐어요. 남자가 함부로 무릎 꿇을 거면 돈으로 주세요.”

    나는 엄재영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의 눈치를 보며 슬쩍 물었다.

    “그럼 서운했던 건 이걸로 퉁?”

    “그래. 퉁. 짜식아. 참 나.”

    엄재영은 붉어진 눈시울을 슥슥 문지르고는 피식 웃었다.

    꽤나 극적인 화해였다.

    *   *   *

    나와 엄재영은 병원 휴게실에 있는 작은 오락기계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엄재영의 캐릭터에게 연신 콤보를 날리며 물었다.

    “보니까 어차피 애들 종족 다 달라져서 국K-1팀도 해체해야 할 것 같던데. 이참에 제 구단으로 완전히 옮기시죠? 연봉도 두 배나 많고 노후도 보장해 드리는데.”

    “네 구단 이름이 뭐랬지?”

    “‘닳고 닳은 뉴비’요.”

    “…참 너 같이 잘 지었다.”

    “그쵸?”

    나는 엄재영의 캐릭터에게 하단 발차기와 정면 정권, 그리고 승룡권 콤보를 먹이며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대격변 뉴스 보니까 뭐 완전 다른 게임 되는 것 같던데. 국K-1 조합은 이제 망했어요. 애들도 다른 새 구단에서 스카웃 해 갈 거고, 계약서도 다 휴지조각이죠 뭐. 때마침 스폰기업도 몇 개 빠진 걸로 아는데…이 바닥에서 아예 발을 빼는 기업들도 있고 외국 기업에 M&A당한 기업도 있고….”

    “알았다! 알았다고! 가면 될 것 아니냐.”

    엄재영은 툴툴거리며 오락기에 500원짜리 동전 하나를 더 넣었다.

    이윽고, 엄재영은 내 캐릭터에게 파동권을 날려 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 감독으로 오면 너는 코치하는 거냐?”

    “아뇨. 코치는 없애고 감독만 둘인 체재로 갈 겁니다.”

    “감독이 둘?”

    “네. 저는 안쪽 일을 맡아 하는 안주인, 형님은 바깥일을 맡아 하는 바깥주인. 안감독과 밖감독, 부부 같고 좋죠?”

    내가 묻자 엄재영은 조이스틱을 마구 움직여 콤보를 넣기 시작했다.

    “투자금은 좀 받았냐?”

    “유튜뷰에서 조금.…되게 짠돌이더라구요.”

    “그럴 수밖에. E스포츠는 역사도 짧고 장르가 워낙 다양해서 팬층이 다 쪼개져 있으니까. 사실상 기업이 돈을 투자하기에는 얻는 이득이 너무 적지.”

    “시장 자체는 계속 커지고 있는데 말이죠.”

    “시장은 커지고 있지만…솔직히 구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수익은 한계가 명확해. 적자를 감수하고서라도 홍보 효과를 노리는 것인데 그 돈이면 차라리 무명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를 쓰는 게 홍보효과가 훨씬 크니까.”

    “맞아요. 돈도 엄청 깨지죠.”

    “그렇지. 프로게이머 하나가 잡아먹는 돈도 엄청 커. 연봉에 복지비용에… 그리고 구단 자체의 시설비나 협회비 같은 부대비용도 무시 못 하지. 그렇다고 해서 축구화를 팔 수 있나 농구공을 팔 수 있나? 그나마 캡슐 시트나 기타 부수적인 커스텀 파츠를 브랜드화해서 판다만…누가 거기에 돈을 쓰겠어. 뭐 암튼…부가 수익도 거의 없다시피 하고. 구단이 잘 나간다고 해서 뭐 스폰 기업 측에 떨어지는 게 있어야지.”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게임 구단에 스폰을 하는 게 이득이긴 하다.

    홍보효과가 복불복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잘되면 엄청난 대박, 안 되면 쪽박.

    이런 대격변의 시기에는 그 불확실성에 한번쯤 걸어 볼 만하지 않은가!

    타다다닥!

    엄재영은 조이스틱을 눈부시게 움직였고 결국 내 캐릭터의 전신에 화려한 콤보를 작렬시켰다.

    눈앞에 뜨는 K.O 두 글자.

    엄재영은 이을 거냐는 듯 턱짓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쥐가 난 다리를 펴 오락기계 옆 벤치에 앉았다.

    이윽고 엄재영이 나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구단 운영비는?”

    “생각 중이에요.”

    “힘들 것 같으면 내가 얼마간 연봉 안 받아도….”

    “됐어요. 드릴 때 받으세요.”

    엄재영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런 그에게 씩 웃어 보였다.

    “다 돈 나올 구멍이 있으니 하는 말이에요.”

    물론 내가 그동안 번 돈이면 구단을 운용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나는 조금 더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스폰을 유치하려면 그냥 내가 돈 많다는 티만 내서는 안 되고 구단이 자체적으로도 충분히 튼튼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단 차원에서 직접 돈을 구하는 것이 그림에 좋겠지.

    ‘프로 구단이 얼마나 돈이 되는 아이템인지 보여 주지.’

    나는 눈을 감은 채 미소 지었다.

    대격변. 이로 인해 얻게 될 막대한 이득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한편.

    엄재영은 감정이 좀 가라앉자 예전에 미처 다 못 투덜거렸던 것을 지금 계속하기 시작했다.

    “야, 근데 어떻게 그동안 나를 그렇게 감쪽같이도 속였냐? 고인물…너 이 자식, 말이라도 해 주던가! 나는 정말로 네 얼굴에 화상 있어서 가면이랑 음성변조기 차고 다니는 줄 알았잖아.”

    “으흠! 사정이 있었어요.”

    “하여간 이 자식 이거 인성 하고는…그럼 고인물이랑 마동왕이랑 붙었던 건 뭔 쇼였어? 자기 자신과의 싸움?”

    더 내버려 두면 다음 면회시간까지 계속 투덜거릴 것 같았기에 나는 서둘러 엄재영과 악수를 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구단의 앞날에 대해 회의를 해 봅시다.”

    내 말을 들은 엄재영은 눈에 이채를 띄었다.

    지금 가장 급한 문제는 구단에 속할 선수들을 구하는 것이다.

    내가 고인물로 있든 마동왕으로 있든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선수는 나 한 명뿐.

    그러니 적어도 4명이 더 있어야 하나의 구단으로서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다.

    엄재영은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곧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가 열려. 아마 종족 시스템이 추가된 것 때문에 다른 구단들도 난리가 났을 거다. 아마 프로팀들이 전면 재개편되는 만큼 한국 대표 선발전도 다시 치러질 확률이 크지.”

    저번에 있었던 오뚝이배는 무효라 이거다.

    또다시 한국 최강의 팀을 가리는 프로리그가 열린다.

    이 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4명의 선수를 영입해야 했다.

    신생 구단이고 자금에 여유가 많지 않은지라 선수 영입이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을까?

    엄재영의 표정은 조금 어둡다.

    하지만.

    “염려 마세요. 멤버들 4명은 이미 구해 놨으니까.”

    나는 엄재영의 어깨를 툭 치며 일어났다.

    가면을 쓰고 음성변조장치를 착용한 나는 엄재영을 데리고 병원 뒤의 주차장으로 향했다.

    오늘을 위해, 나는 나를 제외한 프로팀 동료 네 명을 미리 한 자리에 모아뒀다.

    “정말? 진짜야? 벌써 네 명이나 되는 프로를 섭외했다고? 와, 너 영업력 미쳤구나! 네가 바깥주인 해야겠는데?”

    엄재영은 나의 수완에 연신 감탄하며 계단을 내려왔다.

    하지만.

    이윽고 그가 나를 따라 약속장소에 도착했을 때.

    “…이게 뭐야?”

    엄재영은 자신의 눈앞에 모인 면면들을 보고는 황당함을 금하지 못했다.

    …절로 한숨이 새어나온다.

    명장 엄재영조차 탄식하게 만들 정도의 오합지졸들이 그를 반기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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