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302화 (302/1,000)
  • 303화 무엇이 달라졌는가 (2)

    “GM ‘처리 2반’의 반장 남세나입니다. 지금부터 대격변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허스키한 목소리 탓에 연령 추정이 쉽지 않은 여자.

    남세나는 무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녀가 마이크 앞에 서자 몇몇 기자들이 날 선 질문을 던졌다.

    “반장이라면 정확한 직위와 직책이 어떻게 되십니까?”

    “반장님이 이 자리를 대표할 만한 전문성이 있다는 것을 저희가 어떻게 알 수 있죠?”

    “처리2반이라면 사내에서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이 사태에 뭔가 책임을 느끼고 계시나요?”

    기자회견 전에 흔히 보이는 모습, 초장에 기를 죽여 놓아 인터뷰를 마음대로 휘두르기 위한 선제공격이다.

    하지만, 남세나는 기자들 따위는 여름날 날파리만큼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확실히 묘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자기만의 공고한 세계를 바탕으로 그 누구도 그 안에 함부로 들여놓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한마디로 4차원 마이웨이 스타일이라는 것.

    남세나는 기자들의 모든 질문을 씹어 버렸다.

    왜냐하면 이곳의 절대적인 갑(甲)은 회사이고 이 자리는 ‘통보’를 하는 자리이지 ‘해명’을 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기자들의 모든 질문을 묵살한 채 자기 할 말을 계속했다.

    “72시간 뒤면 알게 되시겠지만, 대격변은 게임 내 생태계를 대폭 바꿔 놓을 것입니다.”

    남세나는 홀로그램을 가리켰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월드맵.

    그것은 이전에 알려진 것과 사뭇 다른 외양을 갖추고 있었다.

    커다란 십자가 모양의 판게아.

    크게는 동쪽의 사막 지대, 서쪽의 밀림 지대, 남쪽의 열대 지대, 북쪽의 빙하 지대로 나뉘어 있던 다소 심플한 지형.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십자가의 중앙에 뻥 뚫린 ‘상흔(傷痕)’

    그것을 기점으로 모든 대격변이 일어났다.

    대륙과 대륙은 서로 이어지지 않게 쪼개졌으며 해수면이 올라감과 동시에 해저 밑으로 침강한 수많은 땅과 섬들.

    반면 어떤 곳에는 해수면이 하강함과 동시에 위로 솟구친 신대륙, 그리고 수많은 섬들이 보인다.

    맵을 유심히 보던 관계자 한 명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저 모습을 보면.…마치 중앙대륙에 운석 비슷한 것이 떨어져서 지형을 크게 뒤틀어 놓은 듯한 느낌이군요. 마치 공룡시대를 멸망시킨 운석처럼…….”

    남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눈치 채셨던 분도 계시겠지만, 사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세계관 속에는 커다란 천공섬이 있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섬이죠.”

    그녀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자 몇몇 이들이 저도 모르게 시선을 위로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군중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천공섬이라고? 하늘에 섬이 어떻게 떠 있어?”

    “월드맵이 옛날 천동설 세계관을 따르고 있는 마당에 그딴 게 중요해?”

    “나는 짐작하고 있었지. 날씨가 좋은 날이면 중부대륙의 황야에 커다란 그림자가 생기곤 했거든. 구름의 그림자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거대한 그림자가….”

    “맞아. 언제나 엔피씨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게끔 되어 있는 내 나침반이 하늘을 향해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을 때부터 나도 하늘에 뭐가 있다는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어.”

    천공섬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도 있었고 어렴풋하게나마 아는 이들도 있었다.

    남세나는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최근 정체불명의 한 유저가 메인스트림의 퀘스트에 접근, 이 천공섬의 모든 퀘스트들을 클리어하고 종국에는 지상으로 추락시키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군중들은 뜨악한 표정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누구는 그 존재조차도 몰랐던 미지의 맵 천공섬, 그것을 올클리어 한 것도 모자라 지상에 꼴아박게끔 만들었다니.

    ‘……대체 어떤 미친놈이야?’

    모든 사람들의 생각은 같았다.

    앞서 나가는 것도 정도껏 앞서 나가야지, 이 정도로 앞서 나가고 있으면 존경과 감탄보다는 황당함이라는 감정이 먼저 든다.

    “대체 누구지? 세계 급 랭커들 중에 딱히 그런 짓을 벌일 사람은 없는데.”

    “그 거대한 대격변을 일으켰다면 혼자 힘으로 한 것은 아닐 거 아냐?”

    “분명 무리가 있었을 거야. 그것도 엄청난 대규모의.”

    “근데 그러면 말이 새 나왔을 텐데? 루머나 찌라시 하나 없었잖아.”

    “…이거 뭐, 어디서 작전세력이 개입한 것 아니야?”

    이 순간만큼은 하락한 주가나 스톱 상태의 공장들도 중요하지 않다.

    대체 그 의문의 또라이가 누구냐는 궁금증 때문에 군중들은 술렁이고 있었다.

    남세나 역시 군중들의 표정을 보고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렸다.

    “보안 상 그 유저의 개인정보는 저희가 알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는 사건의 잘잘못이나 원인을 가리기보다는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기야 맞는 말이다.

    진상규명이든 뭐든 일단 변화에 적응을 마치고 살아남은 이후에야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

    남세나는 조각조각으로 갈라진 월드맵을 가리켰다.

    “상공 2만 미터에서 떨어진 천공섬의 영향으로 중앙 대륙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습니다. 물론 이로 인해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죠. 이 때문에 메인스트림 AI는 무수한 수의 플레이어들을 죽음에서 구하기 위해 약 100시간가량 접속을 제한시킨 것입니다.”

    남세나는 월드맵의 군데군데를 크게 확대시켰다.

    주요 변화는 세 가지였다.

    쪼개진 땅, 물 밑으로 가라앉은 땅, 물 위로 솟구쳐 오른 땅.

    하지만 이 지각변동이 불러일으키는 여파는 어마무시한 것이었다.

    “지형이 변했고 막대한 충격파가 온 세상을 집어삼켰습니다. 당연히 기후가 변하겠죠?”

    운석이 떨어지면 지진으로 인해 땅의 모양이 변한다.

    이로 인해 발생한 엄청난 흙먼지는 태양광을 가려 빙하기를 몰고 온다.

    지진은 땅 밑에 잠자던 화산들의 맥(脈)을 건드려 대분화를 촉발시키기도 한다.

    남세나는 월드맵의 한 지역을 확대해 가리켰다.

    원래는 맑은 호수와 푸르른 삼림이 있었던 평화로운 습지.

    하지만 지금 그곳은 온통 흙먼지와 용암으로 인해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떤 지형은 갑작스럽게 활동을 시작한 화산들의 영향으로 불지옥이 될 것입니다. 땅 밑에서 불거져 나온 새로운 광맥이나 지하자원들이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르죠. 대장장이 메타 플레이어들에게는 좋은 일일 수 있겠군요.”

    남세나는 그 반대편의 한 지역을 다시 확대했다.

    원래는 야자수와 녹색 바다가 매력적이었던 열대풍의 휴양지.

    그러나 그곳은 지금 온통 하얀 서릿발에 뒤덮여 있었다.

    “어떤 구역은 태양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격리된 채 빙하기를 맞이할 것입니다. 이 척박한 기후 속에서 원래 살던 토착 몬스터들이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하겠죠?”

    남세나는 군중들을 향해 말했다.

    “이렇듯 기후가 바뀐 것은 비단 자연재해의 영향 탓만은 아닙니다.”

    그러자 군중들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몇몇 이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방금 전에는 운석 때문에 기후가 바뀌었다고 했지 않습니까?”

    “네. 그렇죠. 하지만 기후가 바뀐 원인에는 다른 새로운 요인들이 숨어 있습니다. 저희 처리반에서 수집해 온 정보들을 보시죠.”

    남세나는 질문에 대답하는 동시에 월드맵의 동쪽 일부를 확대했다.

    건조한 사막지대였던 곳은 이제 아예 불지옥으로 바뀌어 있다.

    대지에 난 균열 사이로 마그마가 끓어오르고 유황 가스가 펑펑 터져 나온다.

    …하지만 그 가운데 기묘한 땅이 하나 끼어 있었다.

    뜨거운 불지옥 가운데 홀로 얼어붙어 있는 성채.

    그곳만은 예전의 사막 맵에도, 지금의 용암 맵에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남세나는 눈을 반짝였다.

    “척박한 환경에 적응한 일부 몬스터들은 손에 넣게 된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주변 지역의 기후를 조종하기도 합니다. 가령 동대륙은 원래 사막지대였고 지금은 용암지대로 바뀌었지만, 대격변 이후 새롭게 등장하여 세력을 불린 이 ‘리치왕’이라는 몬스터는 인근의 기후를 자신의 뜻대로 조종하여…….”

    그렇다.

    지형과 기후가 바뀌었으니 몬스터들도 바뀔 차례다.

    약한 몬스터들은 대격변을 이겨 내지 못하고 멸종했다.

    살아남은 몬스터들은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여 더욱 더 강하고 억척스럽게 진화했다.

    그리고 이 살아남은 토착 몬스터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 정도로 흉폭한 신규 몬스터들이 대거 출몰하기 시작했다.

    남세나는 몇몇 새로운 몬스터들의 외형을 홀로그램으로 띄운 뒤 간략하게 설명했다.

    “몬스터들의 난이도가 전체적으로 상향평준화될 것입니다. 구(舊) 몬스터와 신(新) 몬스터의 비율은 아마 5:5를 이룰 것 같군요. 익숙한 몬스터들 중 절반가량이 사라진 것이니 플레이어 여러분들께서는 어떤 몬스터가 살아남았고 또 어떤 몬스터가 사라졌는지를 확인하는 재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이로 인해 발생하는 수많은 퀘스트들 역시도 즐거운 콘텐츠일 수 있겠죠.”

    남세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때쯤 해서, 한 기자가 제법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질문 있습니다.”

    “뭡니까?”

    “호칭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호칭이란 플레이어가 얻을 수 있는 특전이다.

    A급 이상의 몬스터를 처치했을 시 그 몬스터의 특성 중 하나를 패시브 특성으로 삼을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바로 호칭 시스템.

    기자는 아무래도 밸런스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몬스터들이 상향평준화 된다면 A급 이상의 몬스터도 많아질 것이고 그로 인해 특전이 범람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남세나는 비교적 간단하게 그 점을 짚고 넘어갔다.

    “이제부터 A급 몬스터를 처치할 시에는 호칭 특전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또한 패치 이전에 사냥했던 A급 몬스터가 주던 특전들 역시도 모두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네. 이제부터는 A+급 이상의 몬스터를 사냥해야만 호칭이 주는 특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유저들의 경쟁력 또한 어느 정도까지는 상향평준화 될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고수와 하수들 간의 간극을 벌려 놓는 것이 아닐까요?”

    기자가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자 남세나는 마이크를 잡았다.

    가면을 쓰고 있어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밸런스에 관련된 사항은 제 관할이 아니라서,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귀찮다는 표정이다.

    ‘내 알 바 아니다’ 라는 대답이었지만 기자는 일단 손을 내렸다.

    이 자리에서 따져 묻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아니나 다를까, 남세나는 바로 뒤이어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놀라 뒤집어질 만한 발언을 했다.

    “또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스템 하나가 도입됩니다. 이는 이용자님들의 플레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될 변화 중 하나입니다.”

    남세나는 일몰이 흩뿌리는 붉은 빛에 물든 군중들의 면면을 천천히 흩어보았다.

    그리고 짧게 한 마디 던졌다.

    “…바로 종족(種族)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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