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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296화 (296/1,000)
  • 297화 해피엔딩(Happy Ending) (5)

    돌아왔다가 중간에 끊겼던 기억.

    갑자기 중단되었던 최후의 동영상이 다시 재생되었다.

    그것은 마치 수백 조각으로 쪼개졌던 유리가 다시 합쳐지는 듯한, 그런 예민하고 날카로운 파편들의 집대성과도 같았다.

    비가 쏟아지는 밤.

    막둥이와 네티는 베티의 손을 잡고 지하감옥을 빠져나왔다.

    기실 낙원이었던 곳을 스스로 빠져나온 셈이었으나 그 당시에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보카사가 안내하는 미궁 속으로 깊이 들어온 세 자매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같이 온 아이들이 모두 배드엔딩에게 잡혀 갔지만 보카사는 그다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미궁 속에 들끓는 배드엔딩들이 모두 보카사의 수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언니인 베티는 동생 네티를 넝쿨 밑으로 밀어 넣었다.

    벽을 무성하게 뒤덮고 있는 꿀열매 넝쿨 군락 밑에 숨자 네티의 작은 몸 하나 정도는 어떻게든 가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베티는 아니었다.

    그녀는 보카사의 손에 잡혔고 산 채로 심장을 뽑히게 되었다.

    네티는 바들바들 떨며 그 광경을 숨죽여 지켜보았고 그 도중 베티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베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어 보였다.

    늘 그랬듯, 주근깨투성이의 장난스러운 미소였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그 뒤의 이야기다.

    [하나가 부족하다.]

    보카사는 핏발이 선 눈을 들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베티와 막둥이의 심장은 뽑아냈지만 아직 하나, 네티가 남았던 것이다.

    [어린아이의 심장은 절대로 놓칠 수 없지. 나의 힘을 한 단계 위로 끌어올려 줄 소중한 귀물이니까.]

    그는 주변에 우글우글 모여 있는 배드엔딩들을 향해 지령을 내렸다.

    [새벽이 되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든 찾아내라. 벽에 난 균열이나 넝쿨 무더기의 밑을 잘 찾아봐. 어린아이의 걸음이니 그리 멀리 가진 못했을 것이다.]

    말을 마친 보카사는 허리춤에서 흰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빙글 뒤로 돌더니 후면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정확하게 네티가 숨어 있는 넝쿨 밑이었다.

    […….]

    네티는 숨을 꽉 짓눌렀다.

    온 힘을 다해 숨을 참아 보았지만 지금 눈앞으로 다가오는 하얀 신발을 막아 세울 수는 없다.

    네티가 숨어 있는 곳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보카사.

    이제 그의 신발코 끝과 바닥에 엎드려 있는 네티의 코끝 사이에는 불과 한 뼘 정도의 거리밖에는 벌어지지 않았다.

    툭툭-

    보카사는 칼을 들어 벽의 넝쿨 무더기를 몇 번 쳤다.

    파사삭- 소리와 함께 잎사귀 몇 개가 떨어져 내렸다.

    [그래. 이렇게 넝쿨이 무더기로 뭉쳐 있는 곳 위주로 찾으란 말이다.]

    보카사는 고개를 흘끗 돌려 배드엔딩들을 바라보았다.

    배드엔딩들은 감히 주인의 근처로 접근해 오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쩔쩔맸다.

    […….]

    네티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보카사는 설마 네티가 여기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듯싶었다.

    그는 네티가 있는 곳에서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리를 오래 비우면 황제의 의심을 사게 될 거야. 새벽이다! 새벽이 되기 전에 그 아이를 내게 잡아 와! 어린아이는 곧 나의, 아니 우리의 ‘미래’란 말이다!]

    네티는 그 악몽처럼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듣기 싫어 귀를 꼭 막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감을수록 아까의 기억들이 더욱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네티는 원래 똑똑하지만 겁이 많은 아이. 한번 눈으로 본 것은 절대로 잊지 않고 오랫동안 기억하는 소녀이다.

    눈을 감자 아까의 무서운 기억들이 스멀스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는 밤의 미궁.

    뒤따라오는 괴물들.

    심장이 뽑혀나간 채 죽은 언니와 동생.

    그 모든 것들을 생생하게 떠올린 네티는 저도 모르게 울음인지 호흡인지 알 수 없는 날숨을 짧게 내뱉고 말았다.

    미궁 벽을 스치는 바람소리에 묻혀 사라질 법도 한 작은 흐느낌이건만.

    [……!]

    어린아이가 내는 소리에 예민한 보카사의 귀는 야속하게도 그 소리를 들어 버렸다.

    [가엾은 것. 미궁 속이 얼마나 위험한데 혼자 있으려 하느냐.]

    보카사는 흰 칼을 낮게 들었다.

    사방을 환하게 비추는 하얀 빛이 벽에 걸린 넝쿨과 잎사귀들을 툭툭 친다.

    툭… 툭… 툭… 툭…

    저벅- 저벅- 저벅- 저벅-

    보카사는 벽의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 끝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동안 네티는 보카사의 발과 돌바닥이 부딪쳐 내는 소리 말고도 미궁과 어둠, 소나기, 천둥, 괴물들이 만들어 낸 기억과 싸워야만 했다.

    […흑흑흑흑.]

    무너지는 듯한 흐느낌이 결국 네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넝쿨 한쪽 구석이 가늘게 떨린다.

    하지만 분명히 그 소리를 들었고 그 광경도 봤음에도, 보카사는 결코 걸음을 서둘지 않았다.

    그저 눈빛이 조금 더 슬퍼졌을 뿐이다.

    [길 잃은 어린 양아, 너 아직도 헤메고 있느냐.]

    보카사는 진심으로 동정 어린 빛을 내비쳤다.

    그리고는 저 앞에 숨어 있는 네티를 향해 따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곧 네 부모와 형제자매들을 만날 수 있을 터이니. 그리고 너와 나, 우리들의 모든 숙명이자 소망인 ‘복수’를 위해…!]

    이윽고.

    보카사는 네티가 숨어있는 장소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허리를 굽히고 목을 길게 빼 넝쿨 밑을 들여다보려 했다.

    [까꿍.]

    그는 노인이 손자를 어르듯 자애로운 미소, 그리고 달래는 듯한 표정으로 넝쿨 밑을 들여다보았다.

    악몽과 싸우며 바들바들 떨던 네티가 막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충격과 함께 고개를 드는 순간…!

    ‘보지 마!’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콰직!

    요란한 폭음과 함께, 넝쿨 밑을 들여다보려던 보카사의 몸이 저 앞으로 팩 날아갔다.

    콰콰콰쾅!

    낡은 돌담 하나를 무너트리고 처박힌 보카사는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토사 더미에 파묻혀야 했다.

    ‘넌 너무 기억력이 좋아서 탈이야.’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처음 들려왔을 때보다는 작았지만 전하고자 하는 바는 또렷했다.

    ‘나처럼 얼른 까먹어 버리라구. 나쁜 기억은...’

    이윽고,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이내 네티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 있었다.

    스스스스스스…

    그것은 지금껏 네티를 괴롭히던 악몽들보다도 더욱 더 크고 강력한 무언가였다.

    […언니?]

    네티가 고개를 들자, 앞에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가 고개를 돌렸다.

    둘의 시선이 한데 마주쳤다.

    네티가 본 것은 미소.

    그녀가 울거나 무서워할 때면 언제나 볼 수 있었던 짓궂은 미소였다.

    한편.

    콰쾅!

    화염폭풍을 일으켜 돌무더기를 날려버린 보카사는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아 내며 일어났다.

    […끄윽, 뭐야 이 배드엔딩은? 잠시 오류가 난 건가?]

    그는 배드엔딩이 자신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치떴다.

    [하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이리 오너라 베티. 살아 있었을 때의 기억은 얼른 잊는 편이 너에게도 이롭단다. 너는 이제부터 나의 식구니까.]

    보카사가 손짓하자 베티, 아니 ‘스마일’은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스마일의 외형을 본 보카사는 감탄했다.

    [오오! 대단하군! 나의 역작 중 하나였던 ‘기어다니는 무사’보다도 더욱 훌륭하도다! 이 덩치! 이 파워! 이 스피드! 악마들을 공포로 몰아넣기에 딱이로구나!]

    스마일의 육체 이곳저곳을 살펴본 보카사는 흥분에 겨워 소리쳤다.

    하지만.

    잠시 고분고분해졌나 싶던 스마일은 보카사의 앞으로 얌전히 다가오자마자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콰직!

    스마일은 주먹을 날려 보카사를 한 번 더 돌바닥에 처박아 버렸다.

    […크헉!?]

    보카사는 입에서 피와 내장 조각을 게워냈다.

    그는 바닥을 기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말도 안 돼! 이딴 꼬맹이가 나의 통제를 벗어났다고!?]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었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베티가 변한 배드엔딩은 일반적인 배드엔딩과는 뭔가가 달랐다.

    [그-오오오오!]

    스마일은 보카사를 두들겨 팬 것도 모자라 그 주변에 멀뚱멀뚱 서 있던 다른 배드엔딩들을 상대로도 그 흉폭함을 여지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쉬이이익!]

    [게엑! 게르륵!]

    ‘기어다니는 무사’나 ‘춤추는 무희’, ‘강철 뱀’ 등의 강력한 배드엔딩들이 연달아 달려들었지만 ‘스마일’을 상대로는 역부족이었다.

    스마일은 수없이 달라붙는 다른 배드엔딩들의 머리통을 후려치고 꼬리로 휘감아 내던졌다.

    [크아아아아악!]

    ‘기어다니는 무사’가 스마일의 복부에 박치기를 날려 뒤로 밀어냈다.

    그 덕분에 보카사는 겨우겨우 난동을 피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스마일은 추가 공격을 퍼붓지 않았다.

    홱-

    다만 고개를 돌려 네티가 숨어있는 벽 아래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고오오오오오-

    스마일의 두 주먹에 시커먼 아우라가 모여든다.

    이내, 스마일은 지면을 향해 두 주먹을 내리찍었다.

    콰쾅! 우지지지직…

    대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까먹음’ 특성이 발현되었다.

    이 검은 기운에 닿은 상대는 자신이 본래 무엇이었는지를 잊게 된다.

    스마일의 기운에 잠식당한 미궁의 일부는 천공섬의 대지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능력인 ‘비행’ 특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자신이 하늘에 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섬은 어떻게 되는가?

    우지지지지직!

    이내 커다란 균열이 생겨나 지면 한 구역을 뒤덮었다.

    [뭐. 뭐야!? 뭔 짓을 하는 게냐!]

    보카사가 황당함을 담아 소리쳤지만 스마일은 꿋꿋하게 자기가 하던 짓을 계속했다.

    콰직-

    이윽고.

    비행능력을 잊어버린 천공섬의 일부가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그것은 저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파편의 벽에는 네티가 있었다.

    파편은 무거운지라 먼저 빠르게 떨어졌고 네티는 천사답게 상당한 부력을 받아 천천히, 하늘하늘 떨어진다.

    천사족의 어린아이는 깃털처럼 가벼우니 아마 지상까지 무사히 내려갈 것이다.

    […….]

    네티는 망망공해에 내던져진 채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스마일.

    여전히 장난스러운 그 미소가 네티를 배웅하고 있었다.

    하얀 가면에 뿌려진 돌가루와 핏방울이 마치 주근깨처럼 익살맞다.

    그리고 그 미소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한 힘을 마주한 순간.

    츠츠츠츠츠…

    공포라는 이름의 조각칼로 깊게 새겨져 있던 네티의 모든 악몽들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리 인상 깊던 꿈이라도 잠에서 깨어나면 전부 까먹어 버리는 것처럼.

    천천히 페이드 아웃 되는 세상.

    스르르 감기는 눈꺼풀.

    그렇게 네티는 지상을 향한.

    아니, 지저 2만 미터의 심연 ‘어비스 터미널’을 향한 긴 까먹음의 여정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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