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295화 (295/1,000)
  • 296화 해피엔딩(Happy Ending) (4)

    ‘배드엔딩 나이트메어 폼(Bad Ending Nightmare form)’

    일반적인 배드엔딩보다도 더욱 크고 강력한, 그리고 더욱 더 포악한 생명체.

    ‘라스트킹덤’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괴물은 보카사를 향해 사나운 독니를 드러냈다.

    천사족 최후의 황제 니고데모는 아무래도 죽어서까지 보카사를 원망하는 모양이다.

    새롭게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 보카사, 이 굳은 신념의 식인황제는 이마와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니고데모. 쇼윈도 속 애완동물의 왕이여. 죽어서까지 나를 방해하려는가.]

    [그르르르륵-]

    [잊었나? 악마들의 손에 부서졌던 우리의 신화와 문명을. 외면하려는가? 악마들의 발아래 깔려 죽었던 우리들의 부모와 조상들을. 망국(亡國)을 넘어 멸종(滅種)을 두려워해야만 했던 그날의 밤을!]

    [그르르르륵-]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 갔던 진짜 적은 내가 아니라네. 오직 나만이 자네, 그리고 우리들의 복수를 할 수 있는 것이야! 오직 천사를 초월한 힘을 가진 나만이 악마들을…!]

    하지만 보카사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킥킥킥- 카아악!]

    니고데모 황제, 아니 라스트킹덤이 온몸을 던져 부딪쳐 왔기 때문이다.

    콰쾅!

    황금색 건틀릿이 보카사의 화염벽을 뚫고 들어와 그의 몸통을 후려갈겼다.

    붉은 피가 튀며, 보카사는 뒤로 나가 떨어졌다.

    […빌어먹을 놈이로고! 죽어서도 통제가 안 되는 놈들이군.]

    보카사는 부러진 어금니를 핏물과 함께 뱉어냈다.

    배드엔딩은 기본적으로 씨앗을 심었던 보카사의 말을 주인의 명령처럼 따르지만… 개중에는 그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들이 존재했다.

    죽어서도 악몽 속에서 끝없이 끝없이 싸우고 저항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배드엔딩의 ‘악몽 형태’, 즉 나이트메어 폼이다.

    [뭔가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죽기 직전까지도 강력했는가 본데…살아생전 그토록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이 간절했던 게냐? 눈물겹구나.]

    보카사는 라스트킹덤을 향해 빈정거리듯 말했다.

    으레 한 존재가 죽음을 맞이할 때 순수한 마음으로 다른 존재를 걱정하면서 최후를 마무리하기란 상당히 어렵다.

    아니,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종족 중에서 이타심이 가장 강하다는 천사족 중에서도 그 정도 되는 고결한 인품과 희생정신을 가진 이는 없었다.

    여기, 눈앞에 있는 니고데모 황제를 제외하면 말이다.

    [가-아아아악!]

    라스트킹덤은 미친 듯이 포효하며 앞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하얀 불의 장벽을 마구 긁어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콰쾅!

    불길을 뚫고 파고든 라스트킹덤의 꼬리가 보카사를 때렸다.

    하지만.

    쩍-

    보카사는 흰 검을 빼들어 라스트킹덤의 꼬리를 잘라 버렸다.

    [안심하고 잠들라, 가엾고 우매한 니고데모여. 천사족의 앞날은 이만 내게 맡기란 말이다!]

    그는 검을 쥔 손의 반대편 손을 들었다.

    하얀 마도서가 찬란한 섬광을 뿜는다.

    번쩍-

    또다시 열돔이 펼쳐졌다.

    하얀 불의 반구가 생겨 모든 것을 휩쓸어 버렸다.

    주변의 돌도 끈적하게 녹여 버릴 정도의 초고온!

    설사 배드엔딩 나이트메어 폼이라고 해도 이 정도나 되는 열에 저항하는 것은 무리다.

    우지끈- 콰콰콰쾅!

    강력한 열풍이 라스트킹덤의 육중한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이내 뒤편의 기둥과 계단이 무너지며 회랑 전체가 초토화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카사는 힘의 방출을 멈추지 않았다.

    우지지지직…

    열돔의 벽에 짓눌린 라스트킹덤은 회랑의 벽에 점점 깊이 박혀들고 있었다.

    빠직- 빠지직!

    라스트킹덤이 쓰고 있던 흰 마스크에 점점 금이 간다.

    가면에 뚫린 두 개의 눈 구멍으로는 애간장이 녹아든 검은 눈물이 줄줄 흐르고 끓어오르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보카사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염려 마라. 천사족은 빚을 갚을 것이다. 가증스러운 악마 놈들에게 쌓이고 쌓인 설욕을 할 것이란 말이다.]

    [그르륵… 끄르르륵……]

    [우선 남아 있는 모든 어린 아이들의 심장을 뽑아 삼켜 육체를 강화하고 그 후 어른 천사들의 심장은 선악과로 만들어 회복제로 삼을 것이다. 그리고 악마들의 은신처로 쳐들어가 일곱 악마성좌를 모두 목 베어 죽인 뒤 나약한 악마들의 일부만 남겨 이곳 천공섬에서 사육할 것이야. 자네 같은 동물원 쇼윈도의 애완동물처럼. 어떤가? 재미있겠지? 후후후후… 황제, 네가 만든 미궁은 본디의 목적대로 악마들을 가두어 기르는 데 쓰이게 될 것이다!]

    보카사는 다소 흥분한 기색으로 중얼거린다.

    그때.

    “…저기. 산통 깨서 미안한데.”

    내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손을 들어 올린 채 참견했다.

    “그게 가능할 것 같니?”

    내 질문을 들은 보카사의 눈썹이 삐딱하게 상승했다.

    [가능하지. 모든 천사들의 심장을 내게 몰아 준다면 말이야.]

    나는 그 말을 듣고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너 그 선악과 씨앗, 그거 누구한테 받은 건데?”

    […그건. 그냥 주운 것이다. 미궁 어딘가에서….]

    “그래, 그런 흉악한 씨앗이 미궁 어딘가에 뜬금없이 떨어져 있었다 이거지? 게다가 하필 천사들 중에서 가장 과격하고 호전적인 사상을 갖고 있던 네 눈에 운 좋게 딱 띄었고?”

    [그, 그렇다!]

    “뭐 백 번 양보해서 그렇다 치자. 그러면 사용법은 어떻게 알았는데?”

    [으음, 귓가에 목소리가…그건 신탁이다! 나는 신탁을 받은 것이야! 고로 이 씨앗도 신에게 받은…!]

    보카사는 뚜렷한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웅얼거린다.

    그러더니 제풀에 화가 난 듯 손아귀에 잡혀 있던 라스트킹덤의 목을 뚝 꺾어 바닥에 패대기쳤다.

    콰쾅!

    목뼈가 부러진 라스트킹덤의 몸은 회랑 바닥에 내동댕이쳐졌고 이내 깊게 틀어박혔다.

    검은 체액이 바닥의 균열에 웅덩이처럼 고여 든다.

    이윽고.

    보카사는 짐짓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젠 자네들 차례일세. 더는 질문을 가장한 비아냥에 대답함으로서 내 심력을 낭비하지 않겠네.]

    우리가 있는 쪽이었다.

    드레이크가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진, 이제 어떻게 하나?”

    윤솔 역시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붙잡은 채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젠장.”

    나는 입술을 반쯤 깨물었다.

    시간 계산이 빗나갔다.

    내가 겪어 본 적 없는 페이즈라서 그런가 변수가 너무 많았다.

    랭커들의 인터뷰나 고인물 유저들의 추리, 각종 게임 포털 사이트에서 찾아낸 정보들로만은 알 수 없는 공백들이 도처에 가득했다.

    빈정거리는 말로 대답을 유도해 십 수 초가량을 벌었지만, 그래도 많이 모자란 상태였다.

    ‘시간을 조금만…조금만 더 벌 수 있었다면…….’

    만약 내가 길드 차원에서 대규모 레이드를 온 것이었다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파티의 규모는 꼴랑 셋, 그 중 하나는 레벨 1짜리 뉴비에 불과하지 않은가.

    나는 날 리 없는 식은땀을 훔치며 각을 재고 있었다.

    ‘넉넉잡고 3분. 3분만 버틸 수 있다면…….’

    내가 준비한 비장의 무기가 가동하려면 아직 약간의 시간이 남았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저 S급 몬스터가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하면 우리는 3분이 아니라 30초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이 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드레이크와 윤솔은 절대적인 믿음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들의 신뢰를 배신할 수는 없다.

    나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딱히 뚜렷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는다.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지금까지 해 왔던 것들을 모두 포기하고 귀환 스크롤을 찢는 것?

    ‘젠장! 거의 다 성공할 뻔했는데!’

    3분.

    고작 3분을 버티지 못해 당하는 리타이어. 그것도 최고의 성과를 바로 눈앞에 둔 채로!

    실로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납땜이라도 된 듯한 입술을 달싹였다.

    “할 수 없다. 이번에는 여기까지만 하고 다음을 기약….”

    입술이 끝까지 떨어지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떼야 했다.

    몇 초가 아쉬운 상황.

    까딱 잘못했다간 순식간에 전멸당할 터이다.

    …아니나 다를까.

    [잘 가게 친구들. 배드엔딩을 맞이한 동족들에게 안부 부탁하네.]

    보카사는 두 팔을 벌려 성스러운 불꽃을 빚어 냈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한 번에 절명시킬 대단위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마법은 너무나도 강력하고 또 광범위한 것이어서 우리로서는 절대로 피할 수 없었다.

    “망할!”

    내가 인벤토리에서 귀환 주문서 세 장을 꺼내드는 것과 거의 동시에.

    번쩍!

    보카사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의 화염폭풍이 우리 모두를 깔끔하게 집어삼켰다.

    귀환 스크롤을 찢을 작은 틈조차도 없는 맹공(猛攻)이었다.

    우리는 보카사의 손에 의해 한 줌 재로 변해 버렸고 지금까지 해 왔던 모든 과정들은 전부 다 물마루의 물거품이 되었다.

    아무런 수확도 이득도 없는 헛고생의 종지부였다.

    …보카사의 마법이 작렬하기 전.

    그의 손목을 때린 무언가의 기습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크윽!?]

    보카사는 고통에 겨운 비명을 내질렀다.

    우득!

    의문에 충격에 당한 손목이 부러지며 하얀 화염폭풍은 전혀 엉뚱한 방향을 향해 날아들었다.

    콰콰콰콰쾅…!

    우리는 바닥에 낮게 엎드려 보카사의 공격을 피했다.

    나는 재빨리 윤솔을 안아들고 뒤로 물러났다.

    드레이크 역시도 기겁한 얼굴로 내 옆에 바짝 붙는다.

    우르르릉…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와 돌가루 너머로.

    [그르르르르르-]

    낮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상처 입은 맹수가 폐 깊숙한 곳에서 토해 내는 신음.

    그것은 어딘가 귀에 익은 것이었다.

    이윽고.

    지치고 피곤한, 하지만 분노에 가득 차 있는 어떤 괴물의 그림자가 희뿌연 대기 위에 드리워졌다.

    흰 가면, 검은 몸.

    일반적인 배드엔딩보다도 더욱 더 크고 강력한 육체.

    <배드엔딩 나이트메어 폼(Bad Ending Nightmare form) / 일명 ‘스마일’>

    -등급: A+

    -특성: ?

    -습성: 배회성

    -서식지: 미궁 심장부, D구역 4시 방향.

    -발견일: 0월 0일 04시 44분.

    -…일반적인 형태의 배드엔딩과는 뭔가 다른 것 같다.

    스마일!

    이 집념 강한 최강 최악의 배드엔딩이 무려 여기까지 우리를 따라온 것이다!

    콰직!

    놈은 경악한 표정의 보카사에게 주먹을 후려갈겨 저 뒤로 날려 보낸 뒤 우리를 돌아보았다.

    하얀 가면 위에 뚜렷하게 음각된 미소(smile).

    여느 때와 다름없이, 놈의 시선은 우리들 중 가장 뒤에 있는 윤솔을 향하고 있었다.

    그 미소를 마주한 윤솔, 아니 천사 소녀 네티는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입술을 달싹였다.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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