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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294화 (294/1,000)
  • 295화 해피엔딩(Happy Ending) (3)

    천천히 페이드 아웃되는 기억.

    기억 동영상은 언제나 그렇듯 갑자기 중단되었다.

    “…허억!”

    윤솔은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정신이 몽롱하다.

    오랜 꿈에서 막 깨어났을 때 으레 느껴지곤 하는 혼란이 머릿속을 빠져나가지 않고 진득하게 고여 있었다.

    원래 꿈에서 막 깬 직후는 꿈이 현실인지 현실이 꿈인지 알쏭달쏭하다가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확실히 현실은 현실로, 꿈은 꿈으로 되돌아가기 마련이다.

    윤솔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어 보카사의 시선을 마주했다.

    오싹-

    마치 몸 전체를 뱀에게 내준 듯한 느낌.

    비늘의 차가운 감촉이 눈을 통해 전신의 내부로 퍼지는 듯하다.

    마치 마을에서 처음으로 그를 만났을 때 느꼈던 미증유의 불길함과도 똑같았다.

    네티는 기억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그를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메이즈를 빠져나왔을 때가 기회였는데.”

    윤솔은 입술을 깨물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밤.

    미궁을 막 빠져나왔을 때 보카사는 이미 한번 죽었다.

    “그때 부활 주문서를 쓰지만 않았어도…….”

    맨 처음 미궁에 도착했을 때 만났던 ‘막둥이’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리고 그 막둥이가 어떻게 죽어 갔는지도.

    녀석이 울면 모두가 모여드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윤솔은 네티의 감정을 대신 느끼는 듯 손으로 가슴을 세게 움켜쥐었다.

    …하지만, 지금 그 모든 것들을 떠올리며 후회한다고 한들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주어진 선택지에서 최선을 다해야겠지.”

    나는 윤솔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방금 한 말은 윤솔이 아니라 기억 잃은 소녀 네티를 향해 한 말이기도 했다.

    나 역시 죄책감과 후회 비스무리한 찝찝한 감정으로 자리에 섰다.

    지금 이 상황은 생각보다 더 유쾌하지가 않다.

    나는 눈앞에 있는 보카사의 상태창을 떠올렸다.

    <식인황제 보카사> -등급: S / 특성: 대격변

    -서식지: 천공섬 ‘식인황제의 제전(齋殿)’

    -크기: 3m.

    -극단적인 율법주의자.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황제 니고데모가 신하 보카사에게 했던 꾸짖음 中 (23:24)-

    보카사는 니고데모의 심장을 뽑아 섭식한 뒤 랭크업했다.

    놈의 위험 등급은 본래 A+이었으나 지금은 S급으로 올라간 상태.

    [흐흐흐흐흐…]

    그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증폭한 힘을 천천히 다스려 나간다.

    전보다 더 하얗고 정순해진 불꽃이 그의 전신 근육을 피아노 현처럼 섬세하게 조율하고 있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보카사에게 물었다.

    “…하나만 묻자.”

    [으음, 내 벗의 궁금증에 기꺼이 답하겠네. 뭔가?]

    “미궁 속에서 우리랑 떨어졌을 때, 같이 있던 천사들은 어떻게 됐지?”

    레오나르도, 라파엘로, 도나텔로, 미켈란젤로의 행방에 대한 질문이다.

    나는 다소 부질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혹시 살아있을지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을 담아 물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것은 어리석은 기대였다.

    [아, 그들 말인가. 여기에 나와 함께 있지. …인사하겠나?]

    보카사는 싱긋 웃는 표정으로 허리춤에 감아둔 넝쿨들을 들어올렸다.

    그곳에는 크다고 하기도 뭣하고 작다고 하기도 뭣한 사이즈의 꿀열매 네 개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이 새끼가?”

    이마에 절로 핏줄이 섰다.

    헛된 기대라고 해도 배반당했을 때에는 분노가 치미는 법이다.

    나는 깎단을 들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드레이크 역시 양손에 쇠뇌를 든 채 내 뒤를 엄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퍼펑!

    이내 하얀 화염의 벽이 나를 가로막았다.

    드레이크가 쏘아 보낸 화살 역시도 전부 불타 사라졌다.

    뜨거운 열돔이 보카사의 주위를 차폐하고 있었다.

    하얗게 이글거리는 아지랑이와 불줄기. 그것은 마치 태양의 주위를 맴도는 코로나처럼 보카사의 전신을 휘감고 있다.

    그야말로 최강의 방어체계(fire wall)인 셈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콰쾅!

    우리가 왔던 북쪽 문의 반대편, 그러니까 보카사가 왔던 루트인 남쪽 문에서 굉음이 터져 나온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의 배드엔딩들이 제전에 난입하기 시작했다.

    놈들은 저마다 죽어 가는 천사들을 물거나 쥐고 있었는데 아마도 황제를 수호하는 근위병들이 분명했다.

    드레이크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 혼자서도 남쪽 길로 꿋꿋하게 간다 싶었더니만…배드엔딩 군단을 이끌고 온 거였군.”

    왕성의 남쪽을 지키던 천사 근위병들은 전부 배드엔딩에게 당해 버린 듯하다.

    우리가 온 북쪽은 온갖 험난한 함정과 수문장 역할을 하던 배드엔딩들 덕분에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보카사는 북쪽 문이 조용한 것을 보며 감탄했다.

    [북쪽에 배치해 둔 나의 충직한 부하들 넷을 죽인 건가? 대단하군. 특별히 가려 뽑은 녀석들이었는데 말이야.]

    그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한 번 더 놈에게 덤벼들려는 순간.

    보카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 나의 행동을 우뚝 멎게 만들었다.

    [그래도 그것은 좀 너무하는 처사가 아니었나. 자네들은 친구 사이인 것으로 알았는데.]

    ……?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보카사는 비죽 웃었다.

    [다시 한 번 ‘납달리’를 하기로 했다면서?]

    그 말을 들은 나는 제자리에 잠시 우뚝 멈춰 섰다.

    다시 한 번 뒤통수가 띵하다.

    “……그랬던 건가.”

    그제야 내가 지금껏 무얼 죽여 왔던 것인지 실감이 든다.

    NPC의 사정에 울거나 웃거나 화내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번만큼은 어째 참기가 힘들다.

    한낱 몬스터 따위에게 이렇게 놀아나다니.

    “너는 반드시 잡아야겠다.”

    어차피 메인 퀘스트의 스토리 상 녀석은 죽여야 한다.

    나는 다시 한 번 온 힘을 다해 덤벼들었다.

    딱 한 방.

    딱 한 방만 먹일 수 있다면 시간은 나의 편을 들어줄 것이다.

    하지만 천공섬 메인 스토리의 ‘최종 보스’이자 ‘대격변 문고리 3인방’의 수장 격인 식인황제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콰콰쾅! 쿠르르륵!

    놈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저 뱀 같은 불길.

    저것의 존재 때문에 나는 놈에게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놈의 방어는 절대방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완벽했다.

    순백의 화염은 그 자체로 공격과 방어가 완벽한 존재.

    거기에 보카사가 수족처럼 부리는 배드엔딩들이 가세했다.

    전부 다 미궁 속에서 한 번씩 봤던 녀석들이었다.

    “젠장! 엄청나게들 몰려오잖아!”

    드레이크는 화살을 퍼붓다 말고 뒤로 물러났다.

    쪽수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을 지경.

    그나마.

    파앗!

    윤솔이 하프를 들어 연주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큰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아기천사의 쿠잉(cooing)> 양손무기 / A

    멸족(滅族)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결함을 잃지 않았던 한 아기 천사의 유품.

    -공격력 +12

    -귀속 (특수)

    -융합 (특수)

    -특성 ‘힐’ 사용 가능 (특수)

    -특성 ‘신성불가침’ 사용 가능 (특수)

    레벨 1 뉴비의 몸으로는 특성을 남발할 수 없기에 그동안 천공섬에서 휴식을 취하며 체력과 마나를 비축해 둔 보람이 있었다.

    ‘신성불가침’ 특성이 발현되자 달려들던 배드엔딩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100%의 확률로 들어가는 1차 상태이상 ‘마비’

    50%의 확률로 들어가는 2차 상태이상 ‘공포’

    25%의 확률로 들어가는 3차 상태이상 ‘환각’

    12%의 확률로 들어가는 4차 상태이상 ‘실명’

    6%의 확률로 들어가는 5차 상태이상 ‘과부하’

    3%확률로 들어가는 6차 상태이상 ‘영구저하’

    .

    .

    대부분의 배드엔딩들은 1차와 2차 상태이상에 걸린 채 발버둥쳤지만, 드물게도 여섯 개가 넘는 상태이상에 걸려 버린 녀석들도 존재했다.

    비록 1%의 확률로 들어가는 7차 상태이상은 아무도 걸리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는 보카사는 여전히 여유만만이었다.

    [하하하하. 마치 광대들 같구나.]

    그는 눈이 멀어 바닥을 더듬거리는 배드엔딩들을 보며 껄껄 웃어젖혔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며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니고데모 황제가 쓰러진 이상 모든 것들이 다 끝났다네. 지금쯤 미궁에 있는 나의 사냥개들이 피난민 마을을 공격하고 있을 것이야]

    “……!”

    [더 이상 그것들을 살려 둘 이유도 없으니… 이참에 전부 선악과로 만들어 버려야겠군. 어린아이의 것이 아니라고 해도 체력이나 마나를 회복하는 데에는 요긴하게 쓸 수 있으니까.]

    끔찍한 계획이다.

    보카사는 정말로 이 섬에 존재하는 모든 천사의 씨를 말리려고 하고 있었다.

    대체 저 선악과라는 과일의 씨앗을 어디서 구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돌아도 단단히 돌았다.

    “…이 자식.”

    나는 깎단을 들고 앞으로 뛰어나갔지만 하얀 화염의 벽을 뚫을 수는 없었다.

    드레이크의 화살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S급 몬스터의 위용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것!

    꼼수 없이 어떻게 비벼 볼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이다.

    콰쾅!

    폭음이 일었고 나와 드레이크가 한꺼번에 뒤로 나뒹굴었다.

    우리의 뒤로는 눈먼 배드엔딩들이 바닥을 더듬어 거리를 좁혀 오고 있다.

    “어진아!”

    윤솔이 재빨리 달려와 나를 부축했다.

    거 옆에 드레이크도 같이 넘어져 있는데 좀 챙겨 주지….

    뭐 아무튼.

    우리가 꽤 곤란한 상황에 처했음은 명백했다.

    앞에는 식인황제 보카사가 빚어내는 뜨거운 화염이 날뛰고 뒤에는 눈 먼 배드엔딩들이 자신들의 끔찍한 최후를 되짚어 오고 있다.

    진퇴양난(進退兩難). 앞으로 갈 수도, 뒤로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자, 너희들의 심장도 내놓거라.]

    보카사는 흰 불을 걷어 내고 우리를 향해 손을 뻗어 왔다.

    가장 먼저 목표가 된 이는 역시 윤솔, 아니 네티였다.

    보카사는 뜨거운 열망이 담긴 눈빛으로 윤솔의 전신을 훑었다.

    [그간 너를 얼마나 찾아 해멨는지 모른다.]

    “…….”

    [네가 나를 주문서로 되살려 줬을 때 느꼈지. 아무리 괴로워도 이것은 운명이라는 것을.]

    그는 자신이 옳은 행동을 하고 있다고 믿으며 심지어 자신의 행위를 고결하고 숭고한, 희생적인 어떠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보카사는 기이하게 보일 정도로 따듯한 미소를 지은 채 윤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 내 손을 잡으려무나. 너로 인해 천사족은 다시 한 번 악마들에게 피의 복수를 할 수 있게 될…]

    하지만, 그는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콰-득!

    백색의 불꽃을 뚫고 날아든 커다란 주먹이 보카사의 머리통을 그대로 후려쳐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콰콰콰콰쾅!

    보카사는 그 자리에서 십 수 미터를 달아가 천장에 매달린 두 개의 샹들리에와 벽면의 커다란 괘종시계를 부수고 나가 떨어졌다.

    [그르륵…….]

    보카사를 강타한 것은 뜨겁게 달궈져 붉게 변한 황금 주먹.

    <배드엔딩 나이트메어 폼(Bad Ending Nightmare form) / 일명 ‘라스트킹덤’>

    -등급: A+

    -특성: ?

    -습성: 배회성

    -서식지: 천공섬 ‘식인황제의 제전(齋殿)’

    -발견일:  O월 X일 23시 51분.

    -…일반적인 형태의 배드엔딩과는 뭔가 다른 것 같다.

    천사족 최후의 황제 ‘니고데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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