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293화 (293/1,000)

294화 해피엔딩(Happy Ending) (2)

특별한 밤.

외롭게 솟은 최후의 무대.

날개를 단 천사들이 가면을 쓴 채 통곡한다.

신의 모습을 흉내 낸 광대들.

영원히 허우적거리는 환영.

붙잡지 못하는 사람들.

무대의 줄거리는 죄악과 공포, 슬픔과 광기.

하지만 보아라!

흉내쟁이 무리 가운데 기어 다니는 무언가가 난입한다!

온몸을 비틀어 대는 피처럼 붉은 것, 밤보다 검은 것.

해충의 송곳니!

광대는 먹이가 되고 천사들은 울부짖는다.

불이 꺼진다.

떨고 있는 것들 위로 관을 덮는 장막이 폭풍우처럼 내려온다.

창백하고 파리한 천사들은 베일을 벗고 절규한다.

-에드거 앨런 포『Ligeia』 中-

*       *       *

[그르륵… 그르르륵…]

니고데모는 나무뿌리 밑에서 무너져 가는 육신을 일으켰다.

한때 일족을 이끌며 수많은 위업을 달성했던 최후의 황제.

재능 있고 카리스마 있었으며 모든 이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천사.

하지만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증오와 우울, 허무를 뇌까리는 것뿐이다.

-배드엔딩(Bad Ending)-

그는 배드엔딩을 맞아 버린 것이다.

천공섬에 서식하는 정체불명의 몬스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섬 전역에 전염병처럼 창궐하기 시작한 그것들은 어디 멀리, 알 수 없는 곳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이 세상 그 어디보다 가까운, 자신의 심장 속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그르륵… 그에에에엑!]

황제 니고데모.

배드엔딩이 된 그는 검은 몸뚱아리에 하얀 가면, 황금색 건틀릿을 낀 채 바닥을 네 발로 기어 다닌다.

검붉은 몸은 묵처럼 단단하고 또 물렁물렁했으며 가면 아래로 보이는 입에는 입술이 없어 삭아버린 잇몸과 기형적으로 뒤틀린 치열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앙다문 이빨 사이에서는 걸쭉한 검은 위액이 질질 흘러내렸으며 네 발로 절뚝절뚝 걷는 모양은 마치 병든 개를 연상케 했다.

“……!”

드레이크는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 강하고 위엄 있던 존재의 말로가 저런 모습이라니!

동시에, 불현듯 다른 생각이 모두의 뇌를 스친다.

그렇다면 지금껏 상대해 왔던 미궁 속의 격리자들은…?

“…….”

드레이크는 할 말을 잃은 채 두 팔을 늘어트렸다.

그동안 미궁 속에서 숱하게 마주쳐 왔던 배드엔딩들의 정체를 알고 나니 무시무시한 공포와 죄책감 비스무리한 것이 피부에 소름처럼 끼쳐온다.

지금껏 무엇과 싸워 온 것인가? 무엇을 죽여 온 것인가?

한편.

“……!”

윤솔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떨었다.

눈을 감자 새로운 동영상이 재생되었다.

잃어버린 네티의 기억, 그 마지막 퍼즐 조각이 생생하게 재현된다.

길 잃은 어린 양이 꾸었던 꿈.

잃어버린 기억이 돌아왔다.

*       *       *

어둠 속, 네티는 자신을 붙잡는 엄마의 손에서 떨어져 나와 지하감옥으로 향했다.

배드엔딩들이 옮기는 전염병이 함박눈처럼 창궐하고 있으니 속히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야 한다는 황제의 명령 때문이었다.

‘걱정 마, 네티. 언니가 있잖아.’

그런 네티의 손을 꽉 잡아 주는 이는 쌍둥이 언니인 베티였다.

네티보다도 키가 작은 그녀였지만 얼굴에 깨소금처럼 뿌려진 주근깨와 씩 웃는 미소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정겨운 것이어서 네티를 안심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너는 너무 기억력이 좋아서 탈이야. 저번에 과일숲에 낚시하러 갔다가 본 괴물을 아직도 떠올리고 있는 거지? 가끔은 나처럼 잘 까먹는 것도 좋다구!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베티는 품에 세 살 난 막둥이를 안고는 네티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황제의 지하감옥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갔다.

지하감옥 안은 의외로 쾌적했다.

온도와 습도도 적당했고 촛불들이 많아서 밝았다.

말린 무화과와 비늘을 벗겨내지 않은 생선 포, 부드러운 흰 빵들이 가득했고 차가운 포도주와 따듯한 사과 주스도 도처에 널려 있었다.

감옥에 보금자리를 꾸린 아이들은 전부 다 아는 얼굴들이었기에 밤마다 함께 모여 역사와 수학을 배웠고 베개싸움을 하며 놀았다.

배드엔딩들의 주의를 끌 수 있기 때문에 노래와 악기 연주 등이 오전 1시간 만으로 제한된 것만 빼면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 모든 평화와 질서들은 한 사람에 의해 깨지기 시작했다.

보카사 바리새인.

왕성 최고의 마법사이자 황제의 충복.

그는 밤마다 지하감옥에 내려와 아이들이 잘 있나를 살펴보았다.

아이들의 머릿수를 세는 그의 눈빛에서는 어떠한 집착 비슷한 감정이 일렁였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오로지 감이 예민한 네티를 제외하면 말이다.

‘언니. 저 할아버지 무서워.’

네티의 칭얼거림을 들은 베티는 그저 씩 미소 지으며 불안에 떠는 동생을 한번 꼭 끌어안아 주었을 뿐이다.

물론 엄지손가락만 빨 줄 아는, 자칫 울음소리라도 내면 모든 이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막둥이도 함께.

그렇게 몇 날 밤이 지나갔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황제가 우리들을 잡아먹을지도 몰라.’

‘우리를 살찌우는 것은 좋은 고기를 얻기 위함이라더라.’

‘여자는 죽이고 남자는 겁탈한대.’

‘우리들의 피로 목욕을 하는 거 아냐?’

누가 낸 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궁정마법사인 보카사가 당직을 서고 난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아이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베티는 불안에 떠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환하게 미소 지어 주었다.

‘걱정 마. 언니가 지켜 줄게.’

언니의 미소는 여느 때처럼 부모님의 품과 같이 따듯한 것이어서 네티는 칭얼대던 것을 멈추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자고 일어나니 한 무리의 아이들이 사라졌다.

어떠한 징조도 없이 그저 사라져버린 것이다.

아이들은 크게 술렁였다.

황제의 식사거리나 입욕제가 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날부터 아이들은 탈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이들만의 힘으로 될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의 다정한 친구이자 친절한 조력자 보카사가 이 모든 계획을 도와주었다.

그는 괴물들이 격리되어 있는 미궁이 오히려 안전하다고 했다.

부모님이 그곳에서 애타게 기다린다고도 했다.

아이들은 보카사의 말을 들었다.

비 오는 밤.

경비가 조금이라도 약해지는 날이면 아이들은 보카사의 손을 잡고 무리지어 감옥을 탈옥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도착한 곳은 미궁.

악마를 가두어 죽이기 위해, 괴물들을 영원히 격리시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장치.

아이들은 보카사의 손을 잡고 미궁 속으로 들어갔다.

네티와 그녀의 언니인 베티, 그리고 세 자매 중 막내인 막둥이도 그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보카사가 엄중히 경고했던 대로 미궁은 춥고 조용하고 또 음산했다.

벽을 하나 돌 때마다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우글거렸다.

아무리 숨을 죽이고 울음을 참아도 어쩔 수 없었다.

한 블록을 넘을 때마다 아이들 몇몇이 괴물들에게 산 채로 잡혀갔다.

보카사는 어쩔 수 없으니 포기하라고 했다.

미궁 너머에 부모들이 있으니 보고 싶으면 참으라는 신신당부와 함께.

부모들을 인질로 잡힌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보카사의 말을 따랐다.

열 명이 미궁에 들어가면 마을에 도착할 때는 둘, 혹은 셋 정도가 남아 있었다.

나머지는 모두 괴물들에게 잡혀갔다.

마을에 도착한 아이들은 부모의 품에 안겨 울부짖었다.

때로는 마을에서 먼저 선발대가 마중을 나와 아이들을 맞이하기도 했다.

하지만 운 나쁘게도. 네티와 베티, 막둥이 세 자매는 부모를 만나지 못했다.

그녀들은 막다른 길에서 거대한 괴물과 마주했기 때문이다.

‘…게르르르륵!’

네 발로 기어 다니는, 머리에는 커다란 투구를 쓰고 있는.

보는 것만으로도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정도로 기괴하게 생긴 괴물이었다.

‘이 괴물은 기어 다니는 무사라고 부른단다. 위험하니 각별히 주의하거라.’

소녀들과 함께 있던 보카사가 엄중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괴물은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왔다.

그리고 긴 팔을 뻗어 아이들을 노렸다.

‘네티! 뛰어!’

언니인 베티는 막둥이를 안고 네티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괴물에게서 도망치는 아이들, 하지만 따라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미궁 외곽의 한 폐허로 뛰어든 베티는 동생인 네티를 무성한 넝쿨 밑에 숨겼다.

‘여기서 절대로 나오지 마.’

베티는 네티를 숨긴 뒤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 순간, 괴물이 베티를 발견하고 말았다.

‘……!’

넝쿨 밑에 숨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네티는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놀랍게도, 괴물의 옆에는 태연하게 걸어오는 보카사가 있었던 것이다.

보카사가 가면을 벗고 본색을 드러내는 순간 괴물은 마치 애완견처럼 그의 말에 복종했다.

모든 것은 연극이었다.

미궁을 배회하던 괴물들은 보카사가 눈빛을 바꾸자마자 언제 사납게 굴었냐는 듯 얌전해진 채로 그를 향해 모여들었다.

마치 황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알랑거리는 광대들처럼.

‘하나는 어디로 갔지?’

보카사는 언니인 베티와 막둥이의 몸에 검은 씨앗을 심으며 중얼거렸다.

꿀열매. 선악과. 금단의 과실.

그것은 숙주의 순수함을 모두 빼앗고 그것의 반대되는 성질만을 남겨 놓는, 출처불명의 이상한 식물이다.

…보카사는 이 끔찍한 씨앗을 대체 어디서 얻은 것일까?

‘뿌직! 우드드득!’

이내, 끔찍한 소리와 함께 베티와 막둥이의 몸이 넝쿨에 뒤덮였다.

음흉한 넝쿨들이 두 아이의 몸을 거름삼은 채 무럭무럭 자라나 미궁의 기둥과 벽을 뒤덮었다.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베티의 심장이 생으로 뽑혀 나왔다.

심장의 형상을 한 큼지막한 열매들이 넝쿨 아래 주렁주렁 열렸다.

‘아삭- 아삭- 아삭-’

보카사는 반색을 하며 그 열매들을 따먹었다.

악마들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는 천사들이 모두 사라져야 한다는 둥, 마지막으로 남은 자신이 정체성을 잃어버린 악마들을 모두 쳐 죽일 것이라는 둥…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아이들의 심장을 먹어 치울수록 보카사의 순수함은 더욱 더 하얗고 깨끗하게 빛난다.

그의 전신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찬란한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

‘…! …! …!’

네티는 바로 뒤의 넝쿨 더미 밑에 숨어 숨을 죽인 채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 도중.

나무뿌리에 뒤덮인 베티의 눈과 넝쿨 밑에 숨은 네티의 시선이 한 곳에 마주했다.

‘…….’

베티는 심장이 뽑히는 고통 속에서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저 겁이 많은 동생을 향해, 언제나 그랬듯 주근깨투성이의 얼굴로 한번 씩 웃어 보였을 뿐이다.

미소.

너무 환해서 슬프게까지 느껴지는 미소(Smile)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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