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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292화 (292/1,000)
  • 293화 해피엔딩(Happy Ending) (1)

    […해냈구나, 이방인들이여.]

    보카사 바리새인.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우리의 앞을 지나 쓰러져 있는 니고데모의 머리칼을 잡고 들어 올렸다.

    보카사의 주변은 성스러운 백빛의 화염이 지키고 있다.

    그는 그 빛을 쬐고는 몸의 상처를 어느 정도 회복해 냈다.

    윤솔은 그것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보카사. 이게 대체 무슨….”

    그러자, 보카사는 우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다소 자신감 없는 어조로 말했다.

    [우선 천사족의 미래를 위해 늘 불철주야 고민하고 희생해 온 나의 진심을 의심하지 말아 주기를 바라네, 이방인 친구들.]

    보카사는 말을 잠시 멈춘 뒤 한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콰르륵!

    잡티 하나 없는 흰 불꽃이 그의 손에서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누가 봐도 성스럽고 신성한 기운이 느껴지는 겁화였다.

    드레이크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순수한 천사만이 하얀 불꽃을 피워 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자, 보카사는 검지를 반쯤 펴서 드레이크를 가리켰다.

    [맞다네 친구. 나의 선의를 의심하지 마시게. 나는 그 누구보다도 일족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어.]

    그는 피곤하고 지친 안색, 침중한 목소리로 니고데모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밝히겠네. 사실 자네들에게 거짓을 고한 것이 있기는 있다네. 그것은 황제 니고데모가 미쳐 버렸다는 것에 대한 말이야. 자네들도 방금 보았다시피, 우리들의 황제는 미치지 않았다네. 아니, 그 어느 때보다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지. 때문에 자네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반역을 일으키기는 힘들었을 것이야.]

    보카사의 태도는 시종일관 당당하고 정중했다.

    하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주저하는 빛이 조금씩 엿보이고 있었으며 목소리에는 그것이 묻어나 가늘게 떨렸다.

    한편, 기가 막힌 드레이크와 윤솔은 입은 반쯤 벌렸다.

    “그렇다면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아이들은 어떻게 했죠?”

    보카사가 정말로 순수한 천사가 맞다면 왜 멀쩡한 황제를 죽이고 반역을 일으켰는지, 국가 차원에서 보호하고 있던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가 의문점으로 남는다.

    드레이크와 윤솔의 날 선 질문을 받은 보카사는 침착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와 다독이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 자네들의 질문에 내 기꺼이 다 대답하겠네.]

    “…….”

    [‘행복’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보카사의 질문을 받은 드레이크와 윤솔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뭐라고 대답할 것도 없이, 보카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행복은 바로 ‘불행이 없는 상태’를 뜻하네. 불행이 없이 쭉 이어지는 평온하고 기쁜 상태. 그것이 바로 행복인 것이야.]

    “…….”

    [그렇다면 ‘불행’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행복이 없는 상태’를 뜻하지. 행복이 없이 쭉 이어지는 고통스럽고 슬픈 상태. 그것이 바로 불행인 것일세.]

    보카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는 진중한 표정으로 매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즉 행복이 없이는 불행도 존재하지 않고 불행이 없이는 행복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리지.]

    이쯤 해서, 나는 보카사의 말을 들은 소감을 밝혔다.

    “[SKIP]버튼 없나 잘 찾아봐.”

    하지만 ‘불행’하게도 보카사의 긴 말을 자를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이왕 최종 스테이지인 이곳까지 온 이상 ‘진짜 메인 빌런’의 발언 정도는 귀 기울여 주라는 개발자들의 섬세한 뜻인가 보다.

    보카사는 계속 말했다.

    [행복과 불행이 서로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듯, 천사와 악마 역시도 마찬가지이지.]

    그는 자신의 눈을 하얗게 물들이는 백화(白火)를 바라보며 자기 최면을 걸 듯 낮게 읊조렸다.

    [천사란 무엇이냐? 악마의 심성이 완전히 사라진 존재를 말하는 것일세. 그렇다면 악마란 또 무엇이란 말이냐? 그것은 천사의 심성이 완전히 사라진 존재를 뜻하는 것이야.]

    “…….”

    [그런 고로, 천사와 악마는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할지언정 서로를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네. 천사가 있어야 악마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악마가 있어야 천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

    보카사는 두 팔을 쫙 벌려 이곳 왕성, 아니 천공섬 전체를 가리켰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우리는 악마와의 전쟁에서 패배해 이곳 천공섬에 비루하고 비참하게 숨어살고 있다네. 악마들이 언제 우리의 마지막 삶의 터전을 발견하고 습격해 올까 전전긍긍해 가면서 말이야.]

    “…….”

    [하지만 미궁을 만들고 왕성을 만드는 동안 악마 놈들은 이곳에 한 번도 쳐들어오지 않았어. 그게 왜일 것 같나!]

    보카사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는 잇몸이 터져 피가 흘러나올 정도로 이빨을 앙다물었다.

    이때부터는 말투와 목소리도 변했다.

    [그것은 악마들이 우리를 ‘사육’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레이크와 윤솔은 입을 다물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보카사의 논리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가 뿜어내고 있는 엄청난 광기에 질려 버렸기 때문.

    보카사는 계속해서 으르렁거렸다.

    [악마 놈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멸종당하면 자신들 역시도 악마로서의 의미를 잃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를 다 죽이지 않고 이곳 세상의 최외곽에 몰아넣은 채 사육하듯 키우고 있는 것이다! 마치 쇼윈도에 전시된 애완동물처럼 말이야!]

    천사가 있어야 악마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악마들은 천사들의 명맥을 계속 보존시켜 두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철저한 감시와 통제 속에서 그들 스스로만 그것을 모르게.

    …하지만 그것은 드레이크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을 뿐, 윤솔의 질문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래서, 그게 아이들과는 무슨 상관이죠? 아이들은 어떻게 했어요?”

    윤솔이 재차 따져 물었다.

    그러자 보카사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말했지 않느냐. 악마들을 없애기 위해서는 천사들이 먼저 없어져야 한다고. 아이들은 일족의 ‘미래’다. 미래를 없애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지.]

    “설마!? 아이들을 죽였나요!?”

    윤솔이 깜짝 놀라 묻자 보카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아니다.]

    “…휴우.”

    윤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여기서 보카사가 아이들을 모두 죽였다고 한다면 정말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는 그저 NPC이고 인공지능일 뿐이라지만, 그래도 스토리에 깊게 몰입해 있었으니 감정이 동요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뒤이어진 보카사의 행동에 윤솔은 한숨을 멈춰야 했다.

    [이렇게 했지.]

    보카사는 황제 니고데모의 몸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반대쪽 손으로 자신의 주머니를 뒤졌다.

    바스락-

    보카사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검은 씨앗’이었다.

    흑광택으로 번들거리는 불길한 씨앗.

    보카사는 그 검은 씨앗을 니고데모 황제의 몸에 심었다.

    그러자.

    우드드드득…

    니고데모의 몸속에 박힌 씨앗은 눈 깜짝할 사이에 뿌리와 줄기를 뻗어 니고데모 황제의 몸을 뒤덮어 버렸다.

    …털썩

    니고데모 황제는 완전히 힘을 잃었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아이템 하나가 떨어졌다.

    ‘니고데모의 미궁 설계도’

    아이템마저 떨굴 정도면 그는 이미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후.

    츠츠츠츠츠……

    주변에 넝쿨들이 주렁주렁 창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익숙한 과일 하나가 넝쿨 밑으로 큼지막한 모습을 드리운다.

    윤솔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꿀열매!?”

    그렇다.

    니고데모의 몸을 잠식하고 자라난 과일.

    그것은 미궁 속에서 흔히 보이던 크고 탐스러운 과일이었다.

    …뚝!

    보카사는 꿀열매를 땄다.

    그것은 마치 니고데모의 몸에서 뽑혀 나온 심장과도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아삭-

    보카사는 니고데모의 심장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뻘건 과육이 펄떡거리며 단 즙이 입가와 턱을 타고 줄줄 흘러내린다.

    꾸구구구국…

    니고데모의 심장을 삼킨 보카사는 몸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 난 상처들이 전부 회복되었다.

    파리한 안색에는 혈색이 돌았고 다소 자신감 없게 위축되어 있던 어깨와 등도 당당하게 펴졌다.

    심지어 마력까지도 급증하기 시작했다!

    [후-후후후후… 그래, 바로 이것이야. 황제의 몸을 비료로 써서 그런가 열매도 실하구나. 마력을 증폭시켜 주는 금단(禁斷)의 열매 ‘선악과’! 이것만이 악마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니고데모의 몸에서 뽑아낸 열매를 모두 먹어치운 보카사는 이내 아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역시 ‘어린아이’의 몸에서 키워 낸 열매만큼 효과가 확실한 것이 또 없지.]

    그 말을 들은 드레이크와 윤솔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미궁에 가득하던 꿀열매들.

    햇빛도 물도 별로 없는 환경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그렇게 무성하게 자란 것인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보카사는 고개를 돌려 한 곳을 바라보았다.

    바로 윤솔이 있는 곳이었다.

    오싹-

    윤솔은 전신에 소름이 끼쳐 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맨 처음 미궁에서 보카사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보카사는 윤솔을 향해 반쯤 구부린 검지를 들어 올렸다.

    [그래. 딱 네 나이대의 아이가 비료로 쓰기에 좋단다. 그때 너를 끝까지 지켰어야 하는 것인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윤솔의 머릿속에 신탁의 내용이 떠올랐다.

    세 가지 신탁 중 첫 번째 신탁.

    <아이들 때문에 나라는 사라진다.>

    크게 본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

    어린아이들을 비료로 써서 키운 나무열매로 힘을 얻은 보카사.

    그리고 어린아이들로 인해 분열된, 대를 이을 수 없게 된 천사들.

    윤솔은 토해 내듯 중얼거렸다.

    “그렇군…이제야 알겠어. ‘식인황제’는 니고데모가 아니었어…. 최후의 보스 몬스터, 식인황제는…바로 당신이었던 거야!”

    그녀는 공포와 분노라는 공존하기 힘든 감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플레이어인 윤솔의 마음과 NPC인 네티의 마음이 더해져 생기는 기묘한 공감의 결과였다.

    드레이크 역시도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한편.

    꾸욱!

    나는 인벤토리 속의 엔젤 링 네 개를 꽉 움켜쥐었다.

    납달리를 하던 젊은 천사들의 영혼이 웅웅 울고 있다.

    보카사는 우리를 돌아보며 우울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까지 나를 도와줘서 정말 고맙네, 이방인 친구들이여. 하지만 그대들의 ‘엔딩(Ending)’을 집행하는 것은 아쉽게도 내가 아니라네. 으레 마법사들이 그렇듯, 내가 조금 바빠서 말이야.]

    그리고.

    보카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리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가 있었다.

    우지직- 우직!

    천사족의 마지막 황제 니고데모.

    그의 시체 위에 뿌리내린 꿀열매 나무.

    하지만 지금 뿌리들이 땅에서 뽑혀 나오고 있다.

    이윽고 나무뿌리 밑에서 무언가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흙과 뿌리 밑의 어둠, 그 중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

    그것은 황제 니고데모를 상징하는 ‘황금 건틀릿’을 착용하고 있는 손이었다.

    …하지만.

    뿌지직!

    지상으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손을 제외하고는 이미 니고데모의 외형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르륵… 그르르륵…]

    땅을 기며 저주와 슬픔, 비통함만을 되뇌이는 것.

    그것은 배드엔딩(Bad Ending)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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