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대격변(大激變) (4)
천사 ‘니고데모 산헤드린’
수많은 업적을 남긴 천사족의 황제.
그는 천공섬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미궁을 만들어 악마족의 침입을 원천봉쇄했고 역대 천사들이 사용했던 건축물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궁전을 짓기도 했다.
미궁 속의 지형이 가진 신묘함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어서 미궁 속을 통과한 바람들이 기묘하게 꺾이고 뒤틀려 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와류를 만들어 내 하늘로의 침입까지 막아 버릴 정도였다.
왕궁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에 있는 이들은 편안함을 느끼지만 밖에서 들어오는 이들은 엄청나게 가혹한 시련을 마주해야 했다.
그야말로 건축의 진수를 보여 주는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렇게 대단한 위업을 달성해 낸 황제도 광증(狂症)만은 피할 수 없었던 것일까?
콰긱!
황제 니고데모는 발아래 깔린 보카사를 향해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보카사. 미쳤느냐?]
[…….]
[고개를 드는 것을 허락하마. 그 비루하고 미천한 눈을 떠 네가 지금 누구에게 거역하고 있는지를 보라.]
니고데모의 발아래 깔린 보카사는 피 섞인 기침을 하고 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 아이들을.]
그는 겨우겨우 이 말만을 내뱉었을 뿐이다.
[흥!]
니고데모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보카사를 뻥 걷어찼다.
콰쾅!
보카사는 백색의 돌기둥 세 개를 부수고 저 멀리 회랑으로 나가 떨어졌다.
그때.
[……!]
니고데모의 머리 위에 붉은색 느낌표 하나가 떴다.
막 북쪽 문을 열고 들어온 나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니고데모는 붉은 눈을 크게 뜨고는 비죽 웃었다.
[인간? 어째서 이것들이 여기에 있지?]
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저 멀리 쓰러져 있는 보카사를 돌아보았다.
[갈 데까지 갔구나 보카사. 저런 하등한 것들과 손을 잡다니. 어디까지 추락할 셈이더냐.]
한숨을 쉰 니고데모는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양손에는 황금색 건틀릿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새하얀 불길이 넘실거린다.
이것은 보카사의 것이 아니다.
쿠르르륵!
니고데모는 자신이 만들어 낸 백색의 불길로 양 건틀릿을 휘감았다.
번쩍-
그가 주먹을 내뻗자 정면에 백색의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거대한 주먹 모양의 불꽃이 우리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나와 드레이크는 재빨리 불똥을 피해 움직였다.
윤솔은 아직 레벨이 1이라서 움직임이 느리기에 내가 업어야만 했다.
콰쾅!
니고데모의 주먹에서 쏘아진 불벼락이 왕성의 벽면에 부딪쳤다.
우르릉…
궁전 전체가 덜덜 떨리는 충격파!
“공격력이 상당하군.”
드레이크는 니고데모를 향해 화살을 날려 보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공격력만 대단한 것이 아니다.
텅! 터엉! 텅!
드레이크의 화살들은 니고데모가 입고 있는 백금 갑옷에 부딪쳐 전부 튕겨 나왔다.
물리 방어력 또한 상당한 경지.
우리로서는 당장 확인할 길이 없지만 아마도 마법 방어력 또한 비슷할 것이다.
나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니고데모의 정보를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천사 황제 니고데모> -등급: A+ / 특성: 빛, 회복포식자, 소환, 선택
-서식지: 천공섬 ‘식인황제의 재전(齋殿)’
-크기: 3m.
-악마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천사들은 세계의 귀퉁이인 이곳 천공섬으로 도망쳐 숨어들었다.
한때 이 세상의 지배종으로 군림했던 영광은 이제 옛 이야기.
이후 천사들은 이곳에서 근근이 명맥을 보존하며 과거의 영광을 노래하고 추억하는 낙으로 살아가게끔 되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렇게 무기력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몇몇 천사들은 자신들을 몰락시킨 악마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더 나아가 일족을 다시금 부흥시켜 지배종으로 군림하기 위해 복수의 칼날을 벼리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여기 있는 천사 황제 ‘니고데모 산헤드린’인 것이다.
원래 천공섬에는 몬스터가 없고 배드엔딩들이 출몰한다지만, 니고데모만은 예외이다.
놈은 이곳 천공섬의 보스 몬스터로서 군림하는 것이니만큼 반드시 싸워야 한다.
‘그나저나, 특성이 낯익군.’
나는 니고데모를 보며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을 받았다.
실제로, 니고데모의 전투 방식 역시도 상당히 낯익은 것이었다.
막강한 공격력을 앞세워 저돌적으로 돌진, 손에 낀 건틀릿으로 주변 지형물 파괴, 힐이나 버프 등의 모든 서포트 마법을 대신 흡수해 버리는 사기적인 특성, 거기에 자신의 HP를 회복시키는 수많은 흰 비둘기들을 소환….
‘엥? 이거 완전 어둠 대왕 아니냐?’
나는 천사 황제 니고데모에게서 어둠 대왕의 향수를 느꼈다.
어둠 대왕 역시도 A+등급의 몬스터.
7대 악마성좌 중 ‘파리 대왕’ 벨제붑 직속의 군단장으로 악의 고성을 지배하고 있는 존재이다.
막강한 공격력을 앞세워 저돌적으로 돌진, 손톱으로 주변 지형물 파괴, 적의 HP를 흡수해 버리는 사기적인 특성, 거기에 남의 HP를 갉아먹는 수많은 검은 박쥐들을 소환…….
모든 공격 패턴이 천사 황제 니고데모와 상당히 흡사하다.
거의 이쯤 되면 안티테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흰 비둘기 몇 마리를 손등으로 후려쳤다.
그리고 니고데모에게 물었다.
“혹시 솔로몬이라고 알아요?”
솔로몬은 어둠 대왕의 본명.
그가 타락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용했던 이름이다.
그 이름을 들은 니고데모는 한쪽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는 나의 오랜 벗이지. 인간 중에는 유일하게 나와 친구가 될 만한 자였다. 이곳 천공섬으로 숨은 이후에는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건만…나는 그의 강함과 의지, 심성을 안다. 아마 지금도 살아서 악마들과 싸우고 있겠지. 그는 절대로 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약간 씁쓸해졌다.
“님 친구는 이미 악마의 노예가 된 지 오래에요.”
내가 사실을 말해 주자 니고데모는 코웃음을 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내가 어둠 대왕을 죽이고 얻은 ‘혈액포식자의 링’과 ‘솔로몬의 목걸이’를 들어 보이자 니고데모의 표정은 급변했다.
[어허, 어허이! 친구여! 내 오랜 벗이여! 이게 무슨 일인가!]
그는 검게 변색된 내 아이템들을 보며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본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 하늘이 무너진 것은 모르겠지만 억장 정도는 확실히 무너진 것 같다.
“자, 보스 몬스터의 멘탈이 터졌다. 이제 잡자고.”
나는 깎단을 들고 니고데모를 향해 돌격했다.
“이게 친구도 없는 게 까불어!”
[아, 아니다! 내 친구는 어딘가에 살아 있다고!]
“뭐↘어↗? 바보야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살해당한 거겠지! 네 친구는 죽었어. 그것도 모르냐?”
마치 검정고무신의 기철이가 빙의한 것처럼, 나는 정신없이 패드립(?)을 치며 깎단 작업을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물리적인 폭력보다 언어폭력이 더욱 질이 나쁘다고 했던가?
내 모독성 발언을 들은 니고데모의 멘탈이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신성모독이다!]
니고데모는 뒤늦게야 정신을 차리고 반격 준비를 했지만… 이미 멘탈이 터진 뒤라 그런가 각종 스탯 수치들이 크게 저하되어 있었다.
이 시점에서, 드레이크와 윤솔이 고개를 저으며 레이드에 합류했다.
“…어진. 인성 나쁘다.”
“어째 몬스터가 불쌍하게 느껴지네요.”
어휴, 하여간 나쁜 역할은 다 나지 그냥.
하지만 천사 황제 니고데모는 공방일체의 완벽한 밸런스형 OP몬스터, 이렇게 꼼수라도 쓰지 않으면 레이드가 너무 힘들단 말이다.
결국 오랜 공방전의 결과, 천사 황제 니고데모는 비통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쿵-
그는 금이 간 각반을 땅에 대고는 머리를 떨구었다.
그리고 비통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아아, 내가 무릎을 꿇게 되다니. 이제 천사족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구나!]
그 말을 들은 윤솔은 눈을 치켜뜬 채 코웃음쳤다.
“아이들을 수없이 납치하고 잡아먹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니네요.”
“맞아. 아이들이야말로 곧 미래. 일족의 앞날을 생각한다는 놈이 그런 만행을 저지르다니. 기가 막히는군.”
드레이크 역시 윤솔의 말에 맞장구쳤다.
하지만.
[……?]
천사 황제 니고데모는 고개를 갸웃한다.
[…그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냐? 내가 아이들을 납치하고 잡아먹는다니?]
그러자, 천사족 소녀의 몸에 빙의한 윤솔이 화를 냈다.
“시치미 떼지 마세요! 당신이 아이들을 부모에게서 빼앗아 감옥에 가두고 한 명씩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있어요!”
그러자 니고데모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또 처음 듣는 미친 소리로고. 내가 아이들을 지하감옥으로 데려가는 이유는 아이들을 돌림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이다.]
……?
그 말을 들은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니고데모는 끊어져 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끔찍한 전염병이 창궐했다는 보고를 받은 나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지하감옥을 개방했다. 그것은 궁전 안에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이 지하감옥뿐이었기 때문이며 현재 아이들이 살고 있는 지하감옥의 내부는 안락하고 쾌적하게 증축된 상태란 말이다.]
말을 마친 니고데모는 벽 한 켠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태평성대에 죄인이 없어 텅텅 빈 지하감옥을 대피소로 리모델링하는 것에 대한 도면과 계획표들이 빼곡했다.
식량과 편의시설들이 잘 갖추어진 지하감옥 안.
아이들이 편안하고 또 안전하게 살 수 있게끔 설계된 공간.
거대한 미궁이나 왕궁을 짓는 등 건축에 일가견이 있는 니고데모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감옥을 수선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니고데모는 으르렁거리듯 입을 열었다.
[네놈들의 말대로 아이들은 일족의 미래다. 나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동원했어. 배드엔딩들이 퍼트리는 나쁜 병균으로부터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그 말을 들은 드레이크와 윤솔은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악의(惡意)에 예민한 네티의 감각조차도 니고데모의 말에서 별달리 나쁜 기운을 감지하지 못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
윤솔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식인황제로 알려진 니고데모는 기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성군(聖君)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염병으로부터 안전한 곳에 격리된 아이들에게 ‘식인황제 괴담’을 전파해 불안감을 조성한 뒤, 그곳을 탈옥시켜 미궁으로 데려갔던 존재의 저의(底意)가 다시금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드레이크와 윤솔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순간.
번쩍!
뒤에서 뻗어 나온 하얀 불꽃이 그들 사이를 달려 나갔다.
쿠르르르륵!
어떤 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백색!
가장 순수한 천사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백열의 불꽃이 천사족의 마지막 황제 니고데모의 전신을 사납게 불태웠다.
쿵…
니고데모가 완전히 쓰러졌다.
그리고 어둠 저편에서 하얀 그림자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해냈구나, 이방인들이여.]
보카사 바리새인이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