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290화 (290/1,000)
  • 291화 대격변(大激變) (3)

    노인이 말했다.

    [열쇠를 꺼내려면 상자의 두꺼운 벽을 오랜 시간 동안 뚫고 들어가야 하네. 꽤나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지. 하지만 내게 얼마간의 골드를 준다면 열쇠를 바로 손에 넣을 수 있게 해 주지. 어떤가?]

    눈앞에 있는 문을 열기 위해서는 열쇠가 필요하고 그 열쇠는 이 검은색 큐브 모양의 배드엔딩이 내장하고 있다.

    현실 돈으로 약 10만 원 정도만 내면 열쇠를 바로 손에 넣을 수 있게 해 준다고 하는 제안.

    두말할 것도 없이 좋은 조건이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돈 줄 생각 없어. 돌아가.”

    나는 노인의 제안을 거절해 버렸다. 그러자 드레이크와 윤솔은 깜짝 놀라 외친다.

    “어진! 이건 좋은 기회가 아닌가! 고작 100만 골드로 열쇠를 바로 얻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다!”

    “맞아. 이 상자는 견고한데다가 반사 데미지까지 뿜어내서 부수기 힘들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사실 단순히 돈이 아까워서 이러는 것은 아니다.

    “저건 함정이야.”

    나는 노인의 얼굴을 마주보며 말했다.

    “……?”

    드레이크와 윤솔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들이 미처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푹!

    나는 깎단을 들어 눈앞에 있는 노인을 찔러 버렸다.

    노인공경이 아니라 노인공격!

    내 행동을 본 드레이크와 윤솔은 경악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은 내가 왜 깎단을 휘두른 것인지 눈치 챘다.

    츠츠츠츠츠….

    나에게 공격당한 노인은 그 자리에서 쓰러지더니 천천히 모습을 바꾸었다.

    그것은 흡사 변신 직전의 도플갱어를 보는 듯한 외형이었다.

    이라고 적혀 있던 것은 홀로그램 글씨가 아니라 머리 위에 붙어 있는 장식물에 불과했다.

    그 글자들은 희미하게 변하더니 이내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까 눈앞에 있는 이 정체불명의 존재는 애초부터 NPC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꾸르륵- 꾸륵!

    노인의 눈, 코, 입이 점점 검게 물드는가 싶더니 은근슬쩍 사라진다.

    그리고는 하얀 수염이 달려 있는 검은 촉수로 변해 꿈틀거렸다.

    아니, 가만 보면 노인의 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촉수에 불과했다.

    쉬리릭-

    노인으로 변신했던 검은 촉수는 이내 ‘열리지 않는 상자’의 한쪽 모서리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상자의 벽 일부가 되어 잠잠해진다.

    검은 큐브는 언제 촉수를 움직였냐는 듯 시침을 뚝 떼고 가만히 놓여 있다.

    그 뻔뻔함을 보고 있노라면 방금 전에 본 것이 환각이 아니었나 눈을 의심할 지경.

    나는 입을 딱 벌리고 있는 드레이크와 윤솔을 돌아보며 말했다.

    “‘의태’의 일종이야. 심해의 어떤 물고기는 더듬이를 먹이처럼 보이게 위장해서 다른 물고기를 낚아 잡아먹지. 방금의 노인 역시도 모험가들을 낚기 위해 NPC의 흉내를 내고 있지만…사실은 배드엔딩의 낚시용 촉수에 불과하다.”

    나는 손을 들어 배드엔딩 ‘열리지 않는 상자’의 겉면을 땅땅 두드렸다.

    “아마도 돈을 내고 열쇠를 바로 손에 넣고 싶다고 했으면…이것은 우리를 잡아먹어서 뱃속에 가둬 버렸을 거야. 열쇠는 손에 넣었겠지만 정작 이놈의 뱃속을 탈출하지 못하고 소화되어 죽었겠지.”

    내 말을 들은 드레이크와 윤솔은 식은땀을 닦는 시늉을 했다.

    기껏 여기까지 왔지만 딱 한번 요령을 피운 대가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뻔했다.

    나는 그런 그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남는 장사라는 것은 없어. 장사는 기본적으로 등가교환이 원칙.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야.”

    내 말을 들은 드레이크와 윤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그들도 이해한 듯싶다.

    이 던전에 함정수는 많아도 요행수는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한편, 드레이크는 꽤나 난감한 기색이었다.

    “흠, 그럼 꽤나 난감하게 되었는걸? 이 배드엔딩 녀석…엄청 단단하잖아. 게다가 반사 데미지로 반격도 하고.”

    드레이크는 혹시나 싶어 검은 큐브에 대고 화살을 쏴 보았지만, 당연하게도 그것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만 화살로 인한 데미지를 반사해 드레이크의 HP를 대폭 깎아 놓을 뿐이다.

    그때.

    “…….”

    나와 윤솔의 시선이 한데 마주쳤다. 아마 그녀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나는 두말 않고 검은 큐브의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그것을 밀기 시작했다.

    “……끙!”

    내가 힘을 주자 윤솔 역시도 옆으로 쪼르르 다가와 큐브를 민다.

    의아한 표정의 드레이크 역시 내 옆에 붙었다.

    우리 셋은 그렇게 계속해서 큐브를 밀었다.

    그 방향은 바로 달아오른 쇳길이 있는 곳이었다.

    쿠르르륵-

    석탄밭의 열이 쇠로 된 다리를 뜨겁게 달군다.

    우리는 검은 큐브를 그 위로 계속 밀었다.

    …움찔!

    뜨거운 쇳길에 올라온 검은 큐브는 약간 진동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 정도 뜨거움으로는 큐브를 어찌할 수 없었다.

    “자, 다음 관문이다.”

    나는 힘을 콱 주어 큐브를 앞으로 밀어 버렸다.

    그곳은 도끼날 정원.

    사슬에 매달린 거대한 길로틴들이 진자운동을 하고 있는 구역이다.

    쾅! 콰쾅! 우직! 퍼억!

    수없이 많은 도끼날들이 검은 큐브에 부딪쳤다.

    이 단단한 큐브도 이때만큼은 데미지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벽에 깊은 흉터가 패이고 모서리 귀퉁이들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큐브가 반사하는 데미지 때문에 길로틴들 역시도 무사하지 못했다.

    펑! 콰창! 뿌지지직!

    대부분은 사슬이 끊어지거나 날의 이가 빠진 채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고 그대로 움직임이 멎어 버렸다.

    “자. 다음은 유황 늪이로군.”

    나는 징검다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절벽과 첫 번째 징검다리 사이에 검은 큐브를 끼워 넣고 아래로 밀어 버렸다.

    치이이이익…

    열에 닿은 큐브가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부글부글부글부글…… 펑! 펑! 펑! 펑!

    반사 데미지가 뿌려졌지만 지형 데미지를 반사해 봤자 지형만 조금 변하고 말 뿐이다.

    충격파에 휘말린 유황들이 계속해서 파도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드레이크는 천천히 녹아가는 큐브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미묘하게 속도가 느리군. 이러다가 하루 종일 걸리겠는데?”

    하지만 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기다릴 수 있다.

    어차피 우리가 왕성 북쪽의 문을 열지 못하면 메인 퀘스트도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평소대로였다면 후발주자들이 나를 언제 따라올지 몰라 초조해 했겠지만……지금은 하루가 아니라 며칠을 기다리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내가 이 레이드를 끝마치는 순간 지금껏 나를 따라잡으려 노력했던 경쟁자들의 성과들은 죄다 원점으로 되돌아갈 테니까.

    …하지만, 이내 우리의 일이 조금 빨리 진척될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히-히히히히!]

    전에 격퇴했던 ‘유황늪 말미잘’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녀석은 그새 상처를 모두 회복한 채 건강한 모습으로 다리를 기어올랐다.

    그리고 수면에 달아 있는 검은 큐브를 휘감아 조이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호재였다.

    치이이이이익….

    검은 큐브의 견고한 몸뚱아리가 드디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유황의 뜨거운 독기와 배드엔딩 특유의 강력한 힘이 뒤섞이자 제아무리 ‘열리지 않는 상자’라고 해도 별 수 없다.

    퍼석-

    검은 귀퉁이 한켠이 흐물흐물해지더니 그대로 무너져 유황늪 안에 빠져 버렸다.

    “지금이군.”

    나는 재빨리 로프를 잡고 절벽 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거대한 큐브를 마주보게 되었다.

    검은 큐브의 안쪽은 선홍색 주름진 육벽으로 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매우 불쾌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는데 안에서는 연신 뜨거운 기운과 악취가 뿜어져 나오고 있어 제대로 확인할 길이 없었다.

    푹-

    나는 그 안에 팔을 집어넣고 휘저었다.

    그러자 이윽고 손가락 끝에 금속 재질의 무언가가 닿는다.

    “찾았다, 열쇠!”

    나는 재빨리 열쇠를 집어 들고 로프를 타 올라왔다.

    쉬리리릭!

    유황늪 말미잘이 뒤늦게 나를 향해 촉수를 뻗어 왔지만 드레이크의 엄호사격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이윽고.

    풍덩!

    유황늪 말미잘은 검은 큐브를 끌어안은 채 깊은 황천으로 들어가 버렸다.

    곧이어 누런 수면 위로 검은 혈액이 드문드문 번지기 시작했고 그것이 말미잘의 것인지 검은 큐브의 것인지는 구분할 방법이 없었다.

    “좋았어. 이제 열쇠를 손에 넣었다. 최종 레이드만 남은 거야.”

    나는 하얀색으로 빛나는 열쇠를 들어 보이며 웃었다.

    위에서 드레이크와 윤솔이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       *

    이윽고. 우리 모두는 북쪽 문 앞에 섰다.

    이 문 너머에는 황제 니고데모가 있을 것이다.

    미쳐서 아이들을 잡아먹게 된 식인황제.

    악마에게서 벗어나 꾸린 천사들의 마지막 안식처에서 이런 괴물이 태어났다는 상황이 참 아이러니하다.

    …뭐, 아무튼.

    이제 천공섬 레이드에도 종지부가 찍힐 시간!

    “자, 이제 보스 몬스터만 남았다구. 깔끔하게 처리하고 일상으로 돌아가자.”

    나는 드레이크와 윤솔을 격려했다.

    그러자 둘 다 기합 만빵인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믿음직스러운 모습.

    “그럼 가 볼까!?”

    나는 흰 열쇠를 들어 왕성 북문의 자물쇠에 대고 열렸다.

    이윽고.

    철커덕!

    자물쇠가 열리고 왕성 북문의 거대한 철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쳐버린 황제 니고데모가 앉아있는 옥좌가 바로 코앞이다.

    우리는 문이 알아서 열리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바로 안으로 쳐들어갔다.

    그 순간.

    “…!”

    “…!”

    “…!”

    나와 윤솔, 드레이크는 선 채로 굳어 버렸다.

    눈앞에 보인 광경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광경.

    아름다운 얼굴의 미청년.

    마치 순정만화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듯한 미남 하나가 오연한 기색으로 옥좌 앞에 서 있었다.

    백색의 긴 머리, 그리고 머리 위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엔젤 링.

    그리고 등에 난 커다랗고 풍성한 날개.

    하지만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어 마치 혈액이 그대로 주륵- 흘러내릴 것 같다.

    천사 황제 니고데모!

    우리는 드디어 그를 만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깜짝 놀란 것은 그의 충격적인 미모 때문이 아니었다.

    “…할아버지!?”

    윤솔은 울상이 된 채 소리 질렀다.

    그렇다.

    천사 황제 니고데모의 발밑에는 한 노인의 목이 짓밟혀 있었기 때문이다.

    보카사.

    보카사 바리새인.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그의 모습이 우리의 동공에 아프게 아로새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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