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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289화 (289/1,000)

290화 대격변(大激變) (2)

[히힛! 히히히히히!]

[푸르르르륵! 그으윽!]

[킥! 키킥! 풉풉!]

세 마리의 커다란 배드엔딩이 각각의 관문을 지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첫 번째 페이즈는 유황 늪.

누렇고 걸쭉한 웅덩이가 부글부글 끓는 위로 독한 가스와 수증기가 자욱하다.

거품이 터질 때마다 화한 냄새와 소리가 났다.

이 누런 웅덩이의 수면 위에는 신발 사이즈 270을 기준으로 딱 발자국 하나가 찍힐 수 있는 넓이의 돌이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것들이 1미터 간격으로 드문드문 떨어져 길고 불안한 징검다리를 이루고 있었다.

이것만 놓고 보면 딱히 그렇게까지 위험한 던전은 아니다.

50미터가량의 거리를 발을 헛디디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균형감각과 숨을 2분가량 참을 능력만 있다면 말이다.

…문제는 이 유황늪 아래에 살고 있는 생물체다.

<배드엔딩 / 일명 ‘유황늪 말미잘’> -등급: A / 특성: ?

-습성: 버로우성

-서식지: 북쪽 비밀통로

-발견일: O월 X일 23시 01분.

-여러 다발로 이루어진 정체불명의 촉수. 뜨거운 늪 바닥을 기어 다니다가 수면 위로 움직임이 감지되면 그때부터 먹이활동을 시작한다.

상대가 자기보다 크든 작든 간에 먹잇감으로 인식해 일단 덤벼들고 보는 편이다.

시커먼 촉수다발로 이루어져 있는 말미잘.

촉수들이 모여 있는 몸체는 마치 잘라놓은 관자처럼 생겼다.

근육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이 원통형의 덩어리는 긴 촉수들을 뻗어 유황늪 위로 솟구쳐 오른다.

[히히히히히히!]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징검다리를 덮쳐 오는 말미잘.

이 녀석에게 맞서기 위해 앞으로 나선 이는 바로 드레이크였다.

“새로 얻은 아이템 효과나 좀 볼까.”

드레이크는 한 손으로도 장전과 격발을 할 수 있는 쇠뇌 두 개를 들었다.

퍼퍼퍼퍼펑!

쇠뇌에서 뿜어져 나온 강전이 말미잘의 촉수들을 걸레짝처럼 찢어 놓았다.

[히힛! 히익!?]

말미잘은 깜짝 놀라 물러섰지만 이미 승기는 드레이크가 잡았다.

퍼퍼퍼펑!

관통 효과가 있는 화살은 말미잘이 유황늪 밑바닥으로 숨어도 끝까지 따라붙었다.

유황늪의 깊이는 10미터도 채 되지 않았기에 말미잘은 그리 먼 곳으로 도망칠 수 없다.

차라라라락-

포격에 가까운 화살 난사에 더불어, 드레이크는 유황늪 바닥에 마름쇠를 뿌렸다.

말미잘은 헤엄을 치는 동물이 아니라 해저의 표면에 붙어 살아 가는 존재.

즉 바닥에 닿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종류의 생명체이다.

예전에 ‘기어다니는 무사’가 그랬듯, 네 개 이상의 발이 달린 몬스터나 발이 없어 기어 다니는 몬스터는 이런 마름쇠 종류의 아이템에 데미지가 4배까지 들어간다.

부글부글부글부글…

누런 황천이 검게 물들어 간다.

아무래도 늪 바닥으로 잠수한 말미잘이 피를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늪에 퍼지는 혈액의 양을 보니 다시 싸움을 걸어올 확률은 낮을 듯하다.

‘아쉽네. 만약 마동왕 메타를 쓸 수 있었다면 와류로 한 큐에 박살내 버렸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고인물 모드로 영상을 녹화 중이기에 마동왕의 힘을 쓸 수는 없다.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징검다리를 건넜다.

말미잘은 끝끝내 올라오지 않았다.

*      *      *

다음 페이즈는 도끼날 정원이었다.

넓은 평지 위에 사슬에 매달린 길로틴들이 진자운동을 하고 있다.

섣부르게 잘못 발을 들여놓았다가는 칼날 세례를 받아 전신이 슬라이스 햄처럼 잘려 나가겠지.

“……귀찮겠는데.”

나는 고개를 들어 도끼날 정원의 저편을 바라보았다.

[푸르르륵! 쉬익- 쒸익!]

뜨거운 콧김을 뿜어내고 있는 근육질의 전사 하나가 서 있다.

머리는 소, 목 아래부터는 근육질의 인간형 육체를 가진 검은 피부의 배드엔딩이었다.

<배드엔딩 / 일명 ‘미노타우로스 주니어’> -등급: A / 특성: ?

-습성: 버로우성

-서식지: 북쪽 비밀통로

-발견일: O월 X일 23시 26분.

-도끼를 들고 있는 반인반우.

원래는 미궁 속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어째서 이런 곳에 있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엄청난 근력을 바탕으로 꽤나 광범위한 근접 공격을 해 온다.

[무-우우우우!]

미노타우로스 주니어는 강력한 힘으로 손에 든 도끼를 휘두른다.

놈은 사슬에 매달린 도끼날 사이를 귀신같이 피해 달려들었다.

나는 윤솔을 잠시 내려놓고는 드레이크에게 손짓했다.

“엄호를.”

“라져.”

대화는 짧았다.

나는 전신에 바실리스크의 핏줄을 두른 채 도끼날 정원으로 다이브했다.

쇄애애액-

무시무시한 길로틴들이 나를 향해 쇄도했지만.

땅! 따앙!

드레이크가 쏘아 보낸 화살이 도끼날을 강하게 때려 허공에 붙잡아 둔다.

나는 일순간이나마 허공에 정지한 도끼날들을 스치고 지나가 도끼날 정원 한복판에 있는 미노타우로스 주니어와 마주했다.

[무우우우우!]

엄청난 힘을 바탕으로 밀고 들어오는 미노타우로스 주니어, 그 모습은 흡사 황소의 질주를 앞둔 것 같다.

하지만.

“귀찮다.”

나는 그저 검게 물든 손을 움직여 미노타우로스 주니어의 뿔을 붙잡았을 뿐이다.

콱-

막대한 물리 데미지가 내 전신을 강타한다.

동시에 앙버팀 특성이 나의 HP를 1남은 상태로 한번 버티게 해 주었고 패륜아 특성이 막대한 반사 데미지를 적에게 역조공한다.

콰콰콰쾅!

미노타우로스 주니어는 내 손아귀에 잡힌 자세 그대로 머리통이 박살났다.

쿵!

머리가 깨진 미노타우로스 주니어는 피를 줄줄 흘리며 뒤로 물러났고 이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이후로는 시계추처럼 진자운동을 하던 도끼날들이 알아서 해결해 주었다.

퍽! 퍼억! 퍽! 뻑!

사슬에 매달린 채 흔들리던 도끼날들이 미노타우로스 주니어의 머리통, 가슴, 팔, 어깨, 등짝에 퍽퍽 박혔다.

놈의 상반신은 다진 고기가 되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버렸고 도끼날이 닿지 않는 하반신만이 피를 뿜어내며 드러눕는다.

“으아, 잔인하다.”

윤솔은 모자이크 필터로 미노타우로스 주니어의 시체를 가린 채 나에게 힐을 걸어 주었다.

나는 윤솔을 등에 업고 재빨리 도끼날 사이를 피해 달렸다.

드레이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       *       *

마지막 페이즈는 달아오른 쇳길.

밑은 불타는 석탄 밭.

그 위에 솟구쳐 있는 외길은 무쇠로 이루어져 있다.

치이이익-

이 위로 떨어지는 것들은 전부 엄청난 화염 데미지를 입을 수밖에 없다.

거기에, 이 쇳길 위를 빠른 속도로 뛰어다니는 괴물이 하나.

[풉풉풉풉- 킥킥킥킥!]

하반신이 없어서 두 팔의 팔꿈치로만 기어 다니는 인간형 배드엔딩이었다.

<배드엔딩 / 일명 ‘테케테케’> -등급: A / 특성: ?

-습성: 배회성

-서식지: 북쪽 비밀통로

-발견일: O월 X일 23시 32분.

-평소 습성대로라면 넓은 영역을 배회하며 살아가야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 좁은 공간에 갇혀 한정된 구역만을 돌아다니게끔 되었다.

원래는 아주 긴 몸을 가진 괴물이었는데 갇히기 전 몸을 짧게 절단 당했다고 한다.

테케테케는 바닥이 뜨거워서 그런지 매우 빠른 속도로 기어 다니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팔을 굽혀 팔꿈치로만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상당히 기괴했다.

[캬아아아악!]

놈은 길고 날카로운 손톱을 빼들고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자기처럼 허리를 동강내려는 듯하다.

하지만.

꿀렁-

내가 숨을 참자 씨어데불의 점액이 배어나온다.

그것은 테케테케의 손톱을 그대로 흘려보냈다.

그것도 모자라 쇳길을 미끈미끈하게 만들어 버림으로서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테케테케를 쇳길 아래로 떨어트리게 만들었다.

콰쾅! 퍼석!

테케테케는 그대로 미끄러져 쇳길 아래의 석탄 밭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대로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서 타 죽어 버렸다.

놈은 죽으면서 끔찍한 비명과 냄새를 발산했지만….

“솔아. 모자이크 필터 켜 놨지?”

“응. 나는 아까 미노타우로스 때부터 켜 뒀어.”

“잘했어. 밥맛 떨어질라.”

나는 윤솔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를 업은 채 눈앞에 있는 달아오른 쇳길을 최대한 빠른 속도로 건너갔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HP가 뭉텅이로 깎여 나갔기에 포션을 계속 마셔 줘야 했다.

마동왕 모드였다면 간쇼마루의 신발 덕분에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겠지만, 지금은 영상 녹화 중이니 변신에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       *       *

이윽고.

우리는 북쪽 비밀통로를 가로막고 있는 3개의 관문을 모두 넘어왔다.

걸린 시간은 30분 내외.

거의 신기록에 가까운 주파였다.

“질질 끌지 않아서 좋군.”

드레이크는 지나온 길을 보며 말했다.

부글부글 끓는 유황 소리와 도끼날 휘둘러지는 소리, 석탄 타오르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텅 빈 던전.

윤솔은 뒤로 보이는 풍경을 돌아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으와. 나도 이제 슬슬 게임에 적응이 되려나 봐. 저 광경이 되게 평화롭게 보여.”

그렇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황폐하고 섬뜩하다고 하겠지만 게이머가 보기에는 이처럼 평화롭고 클린-한 광경이 또 없다.

나와 드레이크도 피식 웃었다.

우리 셋은 어느덧 왕성의 심층부로 향하는 마지막 문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마지막 관문.

그것은 실로 크고 웅장한 철문이었다.

꾸국…

드레이크는 힘을 주어 문을 밀어보았지만…당연하게도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툭툭-

나는 문 한 쪽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곳에는 커다란 열쇠구멍이 있었다.

윤솔은 눈을 반짝였다.

“열쇠를 찾아야겠네.”

그녀는 방탈출의 귀재, 이런 추리 및 탐색 콘텐츠를 아주 좋아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페이즈에서는 딱히 추리력을 요하지 않았다.

문 옆의 저 구석에 시커먼 큐브가 보였다.

그것은 단단한 물질로 이루어진 거대한 정육면체였다.

땅! 땅!

손으로 두드리면 마치 쇳덩이를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와 감촉이 느껴진다.

드레이크는 아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설마…이것도 배드엔딩인가?”

그렇다.

검은 큐브는 살아 있는 듯 맥박 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배드엔딩 / 일명 ‘열리지 않는 상자’> -등급: A / 특성: ?

-습성: 버로우성

-서식지: 북쪽 비밀통로

-발견일: O월 X일 23시 37분.

-생물과 무생물, 그 중간에 있는 사물형 배드엔딩.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상자이지만 그 견고함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나는 이 검은 큐브를 손으로 짚은 채 말했다.

“이 안에 마지막 문의 열쇠가 있을 거야.”

그걸 어떻게 아냐는 질문이 나올 법도 하지만, 드레이크와 윤솔은 그런 질문으로 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덕분에 ‘천사들에게 들었다’ 라거나 ‘흔한 클리셰 패턴이다’라는 식의 대화로 분량과 시간을 잡아먹지 않아도 좋게 된 일이다)

드레이크가 중얼거렸다.

“열리지 않는 상자라. 엄청 단단해 보이는군. 이 안에 열쇠가 들었단 말이지?”

말을 마친 드레이크는 단검을 들어 상자를 때려 보았다.

따앙!

상자는 상처 하나 나지 않는다.

동시에 단검에 의한 데미지가 반사되어 드레이크에게 되튕겨 왔다.

퍽!

드레이크는 반사 데미지를 입고 뒤로 물러났다.

“…으음. 이래서야 상자 안에 든 열쇠를 꺼낼 수가 없겠는데.”

단단한 것도 단단한 것이지만 반사 데미지 특성까지 붙어 있는 기분 나쁜 배드엔딩이다.

이 안에 들어 있는 열쇠를 어떻게 꺼내야 할까?

반사 데미지로 인한 엄청난 피해를 각오하고 상자를 부순다고 해도 그로 인해 짊어져야 할 리스크는 상당하다.

상자를 파괴하는 것이 가능한지의 여부도 불분명하지만 그 이후에 최종 보스 레이드를 뛸 체력이 남아있을지도 미지수.

“암담하네.”

“뭔가 방법이 없을까요?”

드레이크와 윤솔이 고민하고 있을 때.

[고민거리가 있는 듯하군.]

어디선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레이크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한 늙수구레한 노인이 굽은 등을 두드리며 서 있었다.

머리 위에는 이라는 이름이 떠 있다.

노인은 말했다.

[열쇠를 꺼내려면 상자의 두꺼운 벽을 오랜 시간 동안 뚫고 들어가야 하네. 꽤나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지.]

그는 손가락 하나를 펴 우리에게 제안을 했다.

[하지만 내게 얼마간의 골드를 준다면 열쇠를 바로 손에 넣을 수 있게 해 주겠네. 어떤가?]

노인이 요구하는 골드의 양은 변변찮았다.

그는 우리에게 겨우 100만 골드만을 요구했을 뿐이다.

현실 돈으로 따지면 10만원에 조금 못 미치는 금액.

그것만으로 상당한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예전에 천만~억 단위의 골드를 요구했던 ‘악마의 만찬’ 호의 선장 치 카이와는 사뭇 다른 저렴한 금액이었다.

“기꺼이 내지.”

드레이크는 인벤토리를 뒤져 골드를 찾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야시장에서 가챠를 하느라 모든 골드를 탕진한 상태.

수중에는 단 돈 100만 골드도 없는 모양이다.

물론 윤솔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NPC의 몸에 빙의해 있는지라 애초에 가진 돈이 없다.

드레이크는 애절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어진.”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간절한 눈빛.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돈 줄 생각 없어. 돌아가.”

누가 봐도 뻔한 함정에 쓸 돈은 없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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