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대격변(大激變) (1)
-<때 이른 매장> / 주문서 / A+
성급하게 파묻힌 환자를 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주문서.
일부 연금술사들에게는 ‘엘릭서’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1회만 사용 가능합니다
-특성 ‘소생’ 사용 가능 (특수)
나는 비싼 돈을 주고 산 여벌의 목숨을 한낱 NPC에게 줘 버렸다.
참으로 호구 같은 결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하겠는가?
한번 찢어진 주문서는 다시 되돌릴 수 없다.
파팟!
환한 백색의 빛이 터져 나왔다.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가진 천사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흰색의 불꽃, 그것이 보카사의 몸을 태워버린 뒤 새롭게 재생했다.
보카사는 눈을 떴다.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분명….]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살폈다.
40% 가까이 잃어버렸던 내장들은 멀쩡하게 뱃속에 담겨 있다.
터지고 끊겼던 근섬유들은 부드럽게 말을 들었다.
부러지는 것을 넘어 가루가 되었던 뼈 역시 제자리에서 잘 기능한다.
게다가 단전에 넘칠 듯 차올라 있는 이 마나들은 대체…!
이내, 보카사는 윤솔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얘야, 네가 나를 살렸느냐?]
윤솔은 당황하여 나를 쳐다본다.
“네가 편한 쪽으로 생각하면 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윤솔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보카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그러지 않는 게 좋았을지도.]
기껏 살려 줬더니 하는 소리라곤.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부활 주문서는 경매장에만 올려도 엄청난 값을 받을 수 있다.
몇 배의 웃돈을 주고서라도 사겠다는 이들이 길드 차원으로 줄을 설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부활 주문서를 얻어 썼음에도 불구하고 보사카는 감사 인사 따위는 일절 하지 않았다.
그저 몹시도 지치고 피곤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을 뿐이다.
[…살아났으니 또 계속해야겠지. 힘들고 고된 싸움을.]
물에서 건져 놨더니 왜 건져 놨냐고 투덜거리는 꼴이다.
이래서 인공지능이란.
그러나 단순히 투덜거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보카사는 처음으로 윤솔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쪼글쪼글 주름이 진 손을 들어 윤솔, 아니 천사 소녀 네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티 없이 맑은 순수함을 가진 천사.
그런 천사만이 가질 수 있다는 백색의 화염이 보카사와 윤솔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어딘가 따듯하게 느껴지는 그 불빛에 윤솔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고맙구나.]
보카사 바리새인.
그는 윤솔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스스스스…
몸을 감싸고 있던 흰 불빛이 사라진다.
그리고 희미했던 미소도.
보카사는 다시 엄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가자. 오늘 나는 천사족을 재건할 것이다.]
한 손에는 흰 마법서, 다른 한 손에는 흰 검.
보카사는 결연한 표정으로 왕성을 향해 첫 발을 내딛었다.
비가 쏟아지는 밤.
이제부터 최종보스 페이즈다!
* * *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왕성에 도착했다.
‘천사 황제 니고데모’
아이들을 지하 감옥에 가두고 한 명씩 잡아먹는다는 ‘식인황제’
이 흉악한 보스 몬스터가 젠 되는 왕성은 거대한 던전 그 자체이다.
던전은 16세기 말엽 유럽의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었다.
악마들에게 패해 세계의 가장 구석진 곳으로 숨어들었다는 것에 대한 열패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일까?
왕성은 유난히도 크고 아름다웠다.
전형적인 바로크 식 건축법.
르네상스 풍의 건축 양식에 로마식 표현 기법이 어우러져 실로 독특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건축물의 모든 양각된 부분과 음각된 부분은 빛과 그림자를 이용해 대비를 극대화하면서 형태와 색을 실제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도드라지게 만들고 있었다.
입구 위에는 선명한 괴량감을 가진 골렘과 가고일 모양의 석상들이 즐비했지만 천공섬에 배드엔딩을 제외한 다른 몬스터는 없으니 저것들은 그냥 조각상일 것이다.
보카사 바리새인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웅장해 보이는가? 그럴 것이다. 황제가 가진 절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건축물이니까. 미치기 전, 그는 건축에 일가견이 있었지.]
하긴 그러니 그토록 거대한 미궁도 만들었겠지. 천공섬에 존재하는 모든 배드엔딩들을 전부 처넣어 버릴.
나는 왕성의 벽 안에 있는 마을들을 돌아보았다.
강을 따라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불이 켜져 있는 집은 찾기 힘들었다.
대부분 창문과 대문을 이중 삼중으로 닫아걸고 조용하다.
다들 미친 황제의 눈에 띌까 무서워 꼭꼭 숨어 있는 듯했다.
보카사는 혀를 찼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없어지니 자연히 마을에 생동감이 사라질 수밖에. 다들 자기 자식들을 집 안 어딘가에 꽁꽁 숨겨 두고 있느라 불을 밝힐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분노로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우리가 있는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남쪽 문으로 가겠다. 너희들은 북쪽 문을 맡아다오.]
미궁을 탈출할 때 역할을 나눴듯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그동안 정들었던 천사 NPC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
“…….”
나는 말없이 북쪽 문을 향해 걸었다.
보카사 역시 말없이 남쪽 문으로 향한다.
이번에는 우리 둘 다, 서로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 *
나는 윤솔을 업고 왕성의 북문으로 진입했다.
던전에 진입하자 처음으로 알림음이 떴다.
-띠링!
<‘식인황제의 제전(齋殿)’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고인물’>
오랜만에 들으니 반갑게까지 느껴지는 알림음이다.
아무래도 이곳 왕성에서만큼은 제대로 된 퀘스트 알림음이 뜨는 모양.
-띠링!
<메인 퀘스트에 합류합니다>
<메인 퀘스트 ‘식인황제의 만찬’을 발견하셨습니다>
<퀘스트 발생 조건: ‘어비스 터미널의 히든 퀘스트들을 모두 수행할 것’, ‘’비행로의 히든 퀘스트들을 모두 수행할 것‘, ‘천공섬 전율미궁의 히든 퀘스트들을 모두 수행할 것’>
<퀘스트 완료 조건: 식인 황제 처치>
<※이 퀘스트를 수행하든 수행하지 않든 간에 세상은 크게 바뀝니다>
이 거대한 메인 퀘스트는 발견하기 위해 필요한 선행 조건이 엄청나게 까다롭다.
반면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방법은 너무나도 간단하다.
이 던전의 보스인 ‘식인황제’를 죽이면 되는 것이다.
오랜만에 받아 보는 심플한 퀘스트.
하지만 이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왕성 북문 앞에 선 채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부터는 나도 자세한 공략을 알지 못한다.
오래 전, 천공섬을 클리어한 해외 랭커들의 인터뷰를 얼핏 들은 적이 있을 뿐.
“…감으로 더듬어 나가는 수밖에.”
한 번도 클리어 해 본 적 없는 퀘스트지만 너무 걱정할 것은 없다.
그동안 쌓아 온 숙련도를 믿으면 된다.
몸이 알아서 반응해 줄 테니까.
‘…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 둔다지?’
나는 거침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내 뒤에 서 있던 드레이크와 윤솔이 깜짝 놀라 외쳤다.
“뭐, 뭐야!?”
“왜 왕성 안이 이 모양이야?”
놀랄 만도 하다.
왕성이란 왕이 거주하는 곳 아닌가.
그렇다면 보통 화려하거나 적어도 머물기에 꽤나 편하고 안락해야 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왕성의 내부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왕성의 모습이 아니었다.
부글부글 끓는 유황의 늪과 좁고 가파른 징검다리.
사슬에 매달린 도끼날들이 미친 듯이 날아다니고 있는 정원.
그리고 불타오르는 석탄 밭에 잔뜩 달궈진 쇠의 다리.
뭐 하나 정상적인 맵이 없다.
왕성은 이런 가혹한 던전들의 연쇄로 이어 붙어 있었다.
“악마들이 침공해 올 때를 대비했는가 보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모든 것이 내가 짐작하고 있던 대로다.
유황으로 된 늪에는 징검다리가 있으니 그것을 밟고 건너가야 한다.
그 다음으로 나오는 정원에는 무수한 도끼날들이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것들을 잘 피해 넘어가면 이제 불에 달아오른 무쇠로 된 다리를 건너가야 하는 것이다.
“아무렴. 왕에게 직통으로 가는 백도어를 그냥 방치해 뒀을 리가 없지.”
그래도 여러 개의 스테이지로 나뉘어 있지 않고 쭉 이어지는 일자 형식의 길인 것은 좋다.
시간을 많이 뺏기지 않을 것 같았다.
촤아아아악! 철썩!
…첫 번째 페이즈인 유황 늪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히-히히히히히!]
누런 황천을 뒤집고 튀어나온 것은 기분 나쁘게 생긴 검은 촉수다발이었다.
그것은 마치 팔다리가 달린 말미잘처럼 생겼다.
시커먼 몸 곳곳에 빛나는 노오란 눈알이 웃는 것처럼 휘어져 있었다.
드레이크는 그것이 내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듣고 경악했다.
“…배드엔딩!? 이것들이 어떻게 왕성에!?”
분명 배드엔딩은 천사들의 적이 아니던가?
그래서 황제 니고데모는 그 강대한 힘을 이용하여 배드엔딩들을 미궁 속에 가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무엇인가!
일반적인 상식선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일이다.
황제가 기거하는 왕성 내부에 대놓고 배드엔딩이 서식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나는 고개를 들어 유황늪 저편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각 페이즈를 지키는 수문장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푸르르르륵!]
[킥! 키킥! 풉키풉키!]
도끼날 정원에는 소의 머리를 한 거대한 근육질 인간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달아오른 쇳길에는 다리가 없어 두 팔로만 기어 다니는 깡마른 체구의 인간이 있었다.
전부 다 시커먼 몸에 상식 밖의 폭력성을 가진 배드엔딩들이다.
드레이크와 윤솔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 모든 변수들은 내 계산 범위 안이다.
‘…아직까지는 말이지.’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몸을 풀었다.
그리고 손에 든 깎단을 더욱 더 바짝 움켜쥐었다.
“자, 친구들. 우리 분량 질질 늘어지게 놀지 말자고.”
나는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세 마리의 배드엔딩을 향해 말했다.
기껏 메인 스토리에 합류하지 않았던가?
이제부터는 한국인의 특성을 한껏 발휘할 때다.
……‘빨리빨리’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