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287화 (287/1,000)
  • 288화 미궁 속의 격리자들 (5)

    비가 쏟아지는 밤.

    콰쾅!

    번개가 떨어져 주변을 밝혔다.

    일순간 파랗게 멀어 버린 시야와 하얗게 물든 장벽.

    쏴아아아아…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어느덧 장대 같은 폭우로 바뀌어 있었다.

    세상을 지워 버리려는 듯한 대홍수.

    …콸콸콸콸!

    하늘에 닿을 듯 높은 장벽.

    빗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장벽 두 개가 서로 마주보고 뻗어 있는 길고 광활한 공간.

    “…끝났다.”

    나와 윤솔, 드레이크는 그 빈 공간의 사이로 몸을 빼냈다.

    미궁의 끝.

    우리는 메이즈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궁의 출구는 제법 고지대의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빗물이 장벽을 타내려 언덕 아래로 흘러가고 있다.

    이 미궁은 원래 빗물을 가두는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었던 듯싶다.

    빗물이 콸콸 흘러가고 있는 저 너머에는 야음에 젖은 성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사방에서 튀어 오르는 포말과 시끄러운 소리, 빗줄기와 어둠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아마도 그것이 왕성에서 가장 높은 첨탑의 꼭대기이리라.

    왕성은 어둠 속에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 어두운 밤 속에서도 불빛 한 점이 없어 더욱 더 으스스하게 보였다.

    우르릉…

    하늘이 옅게 떨리며 원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먼 곳에서 작렬하는 불빛이 왕성의 실루엣을 드문드문 끊어지게나마 비춘다.

    “……!”

    드레이크는 미궁을 탈출하자마자 땅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고 가슴을 쫙 편 뒤 양 팔을 넓게 벌렸다.

    “공포는 미궁에 가둘 것이고 희망은 자유롭게 하리라.”

    뭐 어디 탈옥 영화의 명대사를 읊으며 감성에 젖고 싶은 모양이지만…….

    쏴아아아아아아아!

    그러기에는 비가 너무 많이 내린다.

    “읖! 캌! 퉷! 푸학!”

    드레이크는 코와 입으로 미친 듯이 차오르는 빗물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쇼생크 탈출을 즐기기에는 날씨가 너무 나쁘다.

    그는 얼굴을 씻고 자리에서 일어나 저 멀리 보이는 왕성의 꼭대기를 가리켰다.

    “퉤! 이제 저기로 가서 미친 황제를 잡기만 하면 이 천공섬 레이드도 끝이군. 얼른 가지. 날씨도 안 좋은데.”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보카사와 다른 천사들을 기다려야지.”

    “우리가 먼저 가서 잡으면 안 되나?”

    “왕성에도 남쪽 루트와 북쪽 루트가 있어. 두 루트를 동시에 공략하지 않으면 최종 스테이지가 열리지 않아. 어찌되었건 천사들과의 협력은 필요하다.”

    드레이크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장벽에 잔뜩 달라붙어 있는 넝쿨 밑으로 가 쏟아지는 빗물을 피하기로 했다.

    한편.

    “…….”

    윤솔은 두 눈을 감고 이 몸의 원래 주인인 네티의 기억을 더듬었다.

    눈을 감으면 캄캄한 화면 속에 몇 개의 동영상이 떠오른다.

    윤솔은 눈썹을 살짝 떨었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짧은 동영상 파일들 끝에는 새로운 동영상 파일이 떠 있었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클릭하자.

    딸깍-

    이내 네티의 기억이 머릿속 스크린에 재생된다.

    …네티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미궁 속을 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달리는 이는 바로 보카사 바리새인이다.

    그는 네티를 돌아보며 다급한 표정으로 외쳤다.

    [더 빨리 뛰어라 네티! 저것들에게 잡히고 싶은 게냐!? 더 서둘러!]

    네티는 그 말을 듣고 옆을 돌아보았다.

    어둠 너머에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

    수많은 배드엔딩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밀려오는 오싹함에 몸을 떨던 윤솔, 그녀는 문득 네티의 손에 주목했다.

    보카사의 손을 잡고 있는 손의 반대쪽 손.

    그쪽 손도 누군가의 손을 굳게 잡고 있었다.

    ‘누구지?’

    윤솔은 인상을 찡그렸다.

    더 보고 싶었지만 영상은 거기까지였다.

    윤솔은 기억을 더듬어 추리했다.

    마을 장로에게 듣기론 네티에게는 언니가 한 명 있었다고 했다.

    ‘…어쩌면 그 손의 주인이 베티일지도 몰라.’

    윤솔은 눈을 감고 영상 말미에 잡힌 손을 조금 더 자세히 떠올렸다.

    그 순간.

    화악-

    영상이 꺼지며 커다란 얼굴이 갑작스레 나타났다.

    그것은 미궁에서 만났던 배드엔딩 ‘막둥이’의 얼굴이었다.

    “꺄악!?”

    윤솔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상념에서 깨어나자 보이는 것은 미궁의 출구다.

    “…괜찮아?”

    내가 묻자 윤솔은 이마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네티의 기억을 들여다봤어.”

    “뭐가 좀 보였나?”

    내가 묻자 윤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티가 지하감옥을 빠져나와 미궁을 달리는 장면을 봤어. 보카사가 도와주고 있더라.”

    “그렇군. 뭐 다른 특이점은 없었어?”

    “음, 보카사 말고 또 다른 누군가가 네티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누군지는 확인 못 했어. 갑자기 막둥이의 얼굴이 보이는 바람에…으, 이건 내 트라우마가 섞여서 그런가?”

    윤솔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미약한 두통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참을 만한 수준이었다.

    아파 가면서까지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을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한번 게임의 세계관에 깊이 몰입하고 나면 약간의 고통은 오히려 몰입감을 느끼기에 좋다.

    바로 그때.

    펑!

    미궁 안에서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디 한 군데 고여 있던 웅덩이의 물이 범람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 물은 온통 시뻘건 색이었다.

    “뭐, 뭐야!?”

    드레이크는 깜짝 놀라 외쳤다.

    “…….”

    나는 손을 들어 빗물을 한 움큼 떴다.

    흘러오는 밀물의 색이 시뻘겋게 바뀌었다.

    비릿한 냄새.

    이건 핏물이 분명하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 미궁 속에는 배드엔딩들만이 서식한다.

    배드엔딩의 혈액은 타르처럼 진득한 검은색.

    “……그렇다면 이 피는.”

    나는 고개를 들어 미궁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우리가 온 북쪽 길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은 투명한 색이다.

    하지만 반대편인 남쪽 길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은 피가 섞여 시뻘겋다.

    “…….”

    나는 말없이 서 있었다.

    이윽고.

    철벅- 철벅- 철벅-

    저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힘없이 가느다랗게 이어지는, 금방이라도 끊겨 버릴 듯한 소리.

    풍덩!

    무언가가 쓰러져 물웅덩이에 빠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리고 한참 뒤에 또다시 철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내, 내 시야의 끝에 붉은색 점 하나가 보였다.

    보카사 바리새인!

    그가 만신창이가 된 몰골로 걸어오고 있었다.

    철벅! 철벅!

    보카사는 벽에 어깨를 붙인 채 쓰러질 듯 걸어온다.

    백발과 수염, 옷은 온통 피로 물들어 시뻘겋다.

    배와 허리에 시커먼 손톱자국이 다섯 개 이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스마일과의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은 듯하다.

    풍덩-

    그는 결국 미궁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엎어졌다. 그리고 바닥에 고인 빗물에 잠긴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몸에서 빠져나온 피가 주변에 고인 빗물을 붉게 물들여  간다.

    “이봐!”

    나는 그런 보카사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허물어져 가는 그의 의식을 다시 곧추세웠다.

    “왜 당신 혼자야? 다른 천사들은?”

    내가 묻자, 보카사는 쏟아지는 빗물을 맞으며 허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모두 다 배드엔딩(Bad Ending)을 맞이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그것은 천사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고리, 엔젤 링이었다.

    레오나르도,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도나텔로의 엔젤 링.

    빛을 잃은 네 개의 고리.

    ‘꼭 다시 만나자고 친구들!’

    ‘또 우리랑 납달리 해야 해!’

    ‘푸하핫! 즐거웠다! 이따 출구에서 보자!’

    ‘반드시 살아남아라. 이 멋진 자식들아!’

    미궁에서 갈라지기 직전 들었던 목소리가 머릿속에 메아리친다.

    그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렇군. 다들 죽었구나.”

    나는 천사들이 남긴 고리를 품 안에 갈무리했다.

    쏴아아아…

    빗발이 더욱 거세진다.

    세상천지가 죄다 물이건만 오로지 내 입안만은 건조하다.

    건조하다 못해 바싹바싹 타들어가고 있었다.

    한편.

    보카사는 피에 젖은 손을 뻗어 윤솔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움찔-

    윤솔은 본능적으로 보카사의 손을 피했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보카사는 그런 윤솔을 안타깝다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래. 내가 무섭겠지.]

    “…….”

    [네 언니를 잃게 만든 나를 용서하지 말거라.]

    윤솔은 입을 벌려 아니라는 말을 하려 했다.

    무섭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보호해 주려 했던 존재.

    엄하고 딱딱했으며 언제나 피에 절어 있었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늘 시야 한 구석 자리를 든든하게 지켜 주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고마운 대상은 인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윤솔의 머리를 향하던 보카사의 손은 바닥에 떨어졌다.

    차가운 물이 몇 방울 튀김과 동시에, 그는 눈을 감았다.

    땅그랑!

    머리 위에 있던 엔젤 링이 빛을 잃고 땅에 뒹굴었다.

    보카사 바리새인.

    한평생 천사족의 부흥을 위해 힘쓰던 궁정마법사.

    말년에는 수많은 아이들을 미친 황제의 손에서 구해 내었던 위인.

    그는 죽었다.

    끝끝내 미궁을 벗어나지 못한 채 싸늘한 시체로 변해 버린 것이다.

    “…….”

    “…….”

    “…….”

    나도 드레이크도 윤솔도 말이 없다.

    우리는 그저 억수같이 퍼부어지는 비를 맞은 채 미궁의 끝자락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

    “…어떻게 할래?”

    나는 물었다.

    내 시선은 윤솔을 향하고 있었다.

    “?”

    윤솔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다.

    나는 다시 말했다.

    “우리에겐 이런 게 있지.”

    내 인벤토리에서 나온 것은 일전에 야시장에서 구매했던 주문서.

    -<때 이른 매장> / 주문서 / A+

    성급하게 파묻힌 환자를 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주문서.

    일부 연금술사들에게는 ‘엘릭서’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1회만 사용 가능합니다

    -특성 ‘소생’ 사용 가능 (특수)

    이 1회용 주문서를 사용하면 딱 한 번에 한해 죽은 자를 되살려낼 수 있다.

    여벌의 목숨이나 다름없기에 게임 내에서 구할 수 있는 장소는 손에 꼽는다.

    천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보물.

    나는 지금 그것을 눈앞에 있는 이 NPC에게 쓰려고 하는 것이다.

    한낱 NPC의 죽음.

    하지만 윤솔의 동공은 흔들린다.

    나는 윤솔에게 재차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보카사를 살릴게. 하지만 원하지 않는다면 이대로 왕성으로 갈 거야.”

    “…….”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내가 묻자 윤솔은 혼란스럽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그걸 내가 정해야 해?”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선택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할 수 없다.

    윤솔. 아니, 네티.

    그녀의 선택에 따라 앞으로의 역사가 크게 바뀔 것이다.

    “…….”

    한참 동안이나 고민하던 윤솔은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살리고 싶어.”

    아직도 보카사를 보면 손발이 덜덜 떨리는 그녀이다.

    그것은 지하감옥과 미궁을 거쳐 오며 보카사를 두려워하게 된 네티의 본능 때문.

    하지만 윤솔은 어두운 기억을 잊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부디 이 몸의 원래 주인인 네티 역시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끄덕-

    윤솔이 결정을 내렸으니 따라야 했다.

    ‘아깝네.’

    나는 주문서를 가져다 찢었다.

    그리고 벌써 싸늘하게 식어 버린 보카사의 몸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파팟!

    환한 백색의 빛이 터져 나왔다.

    보카사의 몸을 물들이고 있던 붉은 빛과 검은 빛이 서서히 빠져나간다.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가진 천사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흰색의 불꽃. 그것이 보카사의 전신을 태우며 새롭게 재생시키고 있다.

    그동안 굳게 가려져 있던 대격변의 장막이 조금 걷힌다.

    약간 새어나온 무대 안쪽의 빛을 본 느낌이었다.

    동시에.

    번쩍-

    보카사의 눈이 뜨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