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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286화 (286/1,000)
  • 287화 미궁 속의 격리자들 (4)

    콰콰쾅!

    낙뢰 한 줄기가 미궁을 밝혔다.

    마치 그것을 신호로 삼기라도 한 것처럼, 미궁에 갇혀 있던 존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배드엔딩(Bad Ending)’

    그것들은 막둥이의 울음소리에 반응하여 나타났다.

    칠흑 같은 어둠을 헤집고 나타난 그것들은 미궁 외곽지대에 있었던 배드엔딩들보다도 훨씬 더 크고 강력했다.

    “…불안한데.”

    드레이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그간 미궁 외곽지대에서 혼자 살아남으며 배드엔딩들의 강함을 읽을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굳이 오랜 시간 동안 배드엔딩 생태계를 조사하지 않았더라도 알 수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지금 모여드는 녀석들은 심상치가 않다.

    ‘전신이 시커먼 강철로 이루어진 뱀’

    몸 전체에 더덕더덕 붙어 있는 뿔을 이용해 닥치는 대로 부딪쳐 온다.

    그 몸통던지기의 파괴력은 그야말로 상상초월!

    위험 등급은 무조건 A등급 이상이다.

    ‘폭탄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나무’

    뿌리를 이용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걸어 다닌다.

    열매는 바닥에 떨어지는 즉시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졌는데 수많은 씨앗들이 세열수류탄의 파편처럼 사방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위험 등급은 A등급 정도로 추정.

    ‘관통하는 비늘을 발사하는 고슴도치’

    놈은 재빠른 속도로 아군 진영 사이를 누비고 다녔는데 단순히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광역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위험 등급 A등급 이하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강산성 위액을 토해 내는 새’

    바람이 불지 않는 허공을 낮게 날며 끊임없이 뜨거운 토사물을 끼얹고 있다.

    이 토사물에 맞으면 갑옷이 녹아내리고 안의 살점에 수포가 생긴다.

    위험 등급은 최소 B+ 이상!

    ‘주변 배드엔딩들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공급하는 게’

    이 커다란 게는 드물게도 다른 배드엔딩과 공생을 하고 있었다.

    아마 주변 배드엔딩들에게 활력과 투지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듯싶다.

    게 자체의 공격력은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주변 배드엔딩들을 더욱 심하게 날뛰게 만든다는 점에서 위험 등급을 높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대략 B+에서 A등급 사이에 있지 않을까?

    ‘어둠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 반투명한 몸을 가진 촉수다발’

    이 배드엔딩은 정말 할 말이 없다.

    자꾸만 아군의 수가 줄어드는 것이 이상해서 뒤를 돌아보자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데미지가 들어왔다.

    몇 초간 한 곳을 자세히 보고 나서야 이 녀석이 장벽 위에서 은밀하게 촉수를 뻗어 오고 있다는 것을 겨우 눈치 챌 수 있었다.

    위험 등급은…아직 산정하지 못했다! X발!

    “…한둘이 아니구만!”

    나는 도감을 작성하던 손을 멈추고 이마를 짚었다.

    막둥이의 단말마가 불러 모은 배드엔딩들의 수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온 미궁의 배드엔딩들을 죄다 끌어 모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

    심지어 하나하나가 전부 강력한 놈들이다.

    단일 대상으로 레이드를 뛰어도 골치 아플 판에 이런 개떼 물량이라니!

    드레이크는 밀려드는 적들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그는 연신 뒷걸음질 치며 화살을 날리고 있었는데 야시장에서 가챠로 구한 한손 쇠뇌 두 개를 한꺼번에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드엔딩들의 총공세에 밀리고 있었다.

    “지금 모여드는 놈 하나하나가 외곽에 가면 한 구역의 보스 급이다. 난이도의 차원이 다르군.”

    드레이크가 투덜거리자 그것을 들은 보카사가 이를 악물었다.

    […당연하다. 애초에 외곽에 서식하는 배드엔딩들을 그쪽으로 몰아낸 주범이 바로 이 녀석들이거든. 너희들이 마을에 들어오기 전까지 만났던 배드엔딩들은 거의가 다 쭉정이었을 뿐이라고!]

    하지만.

    나는 보카사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딱 하나.

    외곽에 서식함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배드엔딩들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의 전투력을 가진 놈이 있다.

    …그리고 그놈도 양반은 되지 못했다.

    콰쾅! 뿌직! 뿌지지직!

    그동안 아군 천사들을 골치 아프게 했던 반투명한 촉수가 허공으로 딸려 올라가는가 싶더니 그 자리에서 갈가리 찢어졌다.

    그리고 이내 어둠 속에 묻혀 보이지 않던 실루엣이 달빛 아래 드러났다.

    [오-오오오오오!]

    인간형의 시커먼 육체에 하얀 얼굴.

    섬뜩하게 새겨진 미소.

    <배드엔딩 나이트메어 폼(Bad Ending Nightmare form) / 일명 ‘스마일’>

    -등급: A+

    -특성: ?

    -습성: 배회성

    -서식지: 미궁 심장부, D구역 4시 방향.

    -발견일: 0월 0일 04시 44분.

    -…일반적인 형태의 배드엔딩과는 뭔가 다른 것 같다.

    배드엔딩의 또 다른 형태. 스마일.

    이 기묘한 괴물이 또다시 미궁의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역시 살아 있었구만.”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놈은 다른 배드엔딩의 뱃속에 들어간 채 수백 톤 어치의 돌무더기에 깔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 있었다.

    비록 뱃가죽에는 나에게 입은 흉터가 길게 나 있었고 머리의 군데군데 역시 돌무더기에 깔려 움푹 들어가 있었지만 그래도 놈은 멀쩡하게 움직인다.

    실로 괴물 같은 피지컬.

    으적- 으적-

    스마일은 허리춤에 매단 꿀열매 몇 개를 씹어 먹었다.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촉수 다발을 내팽개치고는 장벽 아래로 다이빙했다.

    이곳에 몰려든 배드엔딩들 중 가장 강하고 흉폭한 ‘강철 뱀’이 있는 곳이었다.

    콰쾅!

    스마일과 강철 뱀이 격돌했다.

    [우-어어어어어!]

    강철 뱀은 전신에 돋아난 시커먼 뿔을 이용해 스마일을 후려쳤다.

    더불어 차갑고 딱딱한 몸뚱아리를 이용해 스마일을 휘감으려 들었다.

    하지만.

    스마일은 순수한 육체의 힘만으로 강철 뱀을 제압했다.

    쾅!

    커다란 주먹을 들어 강철 뱀의 머리통을 후려갈기는 스마일.

    놈의 주먹은 그야말로 워해머와도 같았다.

    그 육중한 주먹에 한 대 맞는 순간 강철 뱀은 반쯤 의식이 날아간 듯하다.

    일순간 스턴 상태에 빠진 강철 뱀은 그 자리에서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스마일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놈은 튼튼한 다리로 강철 뱀의 몸통을 졸랐다.

    뿌-득!

    그리고는 두 팔을 뻗어 뱀의 머리를 단단히 붙잡은 뒤 그대로 위로 당겨 뽑아 버렸다.

    콰쾅!

    육중한 무게의 강철 뱀이 땅바닥에 쓰레기처럼 패대기쳐졌다.

    스마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놈은 폭탄 열매를 달고 다니는 나무를 몸통박치기로 부숴 버렸고 고슴도치를 맨발로 짓밟아 죽였다.

    그 과정에서 나무열매 몇 개가 머리 근처에서 폭발했고 가시 몇 개가 발등을 뚫고 나왔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 뒤 역시 파죽지세였다.

    스마일은 날아다니는 새의 목을 잡아 꺾어 버렸고 그것을 그대로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게에게로 패대기쳐 두 배드엔딩을 일격에 피떡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을 본 드레이크는 입을 반쯤 벌렸다.

    “우와. 한 마리 한 마리가 보스 급 배드엔딩들인데…혼자서 전투 씬 분량을 확 줄여 버리는구먼.”

    하지만 지금은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눈앞에 있는 스마일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백전노장 특성을 가지고 있나? 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은데.”

    확실히, 스마일의 몸 곳곳에는 엄청난 싸움의 흔적들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보카사의 하얀 불꽃에 타 일그러진 화상, 내 깎단에 찢겨나간 뱃가죽 흉터, 드레이크가 쏜 화살이 만들어놓은 점박, 돌무더기에 깔려 움푹 움푹 들어간 곳….

    하지만 그럼에도 스마일은 미친 듯이 날뛴다.

    [오-오오오오오!]

    놈은 고개를 들어 미소 짓는 표정으로 아래를 살폈다.

    무엇을 찾는지 뻔하다.

    윤솔.

    맨 처음으로 정했던 타깃.

    스마일은 무시무시한 집념을 뿜어내며 윤솔에게 쇄도했다.

    [그에에에에엑!]

    그 압도적인 기세에 눌린 윤솔은 그만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스마일의 거대한 손바닥이 윤솔을 움켜잡기 직전.

    쿠르르르륵!

    뜨거운 불꽃이 윤솔과 스마일의 사이에 장벽을 만들었다.

    눈이 멀 듯한 흰 불꽃.

    보카사 바리새인이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윤솔을 지키고 있었다.

    [이 아이를 원하는가 악몽이여!?]

    그는 눈앞에 있는 스마일을 노려보았다.

    [그렇다면 내 시체를 밟고 넘어가 보거라!]

    그리고 하얀 마법서에 대고 주문을 영창했다.

    콰쾅!

    하얀 폭발이 일어나 스마일의 안면을 뒤로 날려 버린다.

    동시에, 보카사는 나를 쳐다보며 외쳤다.

    […북쪽으로 가시게들!]

    양 갈래 길.

    막둥이의 시체와 계속해서 몰려드는 배드엔딩, 그리고 미친 듯이 날뛰는 스마일.

    보카사와 천사들은 스마일에 대항해 싸우며 점점 남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막둥이의 시체가 있다.

    [크아아아악!]

    [시시시시…]

    [브그윽- 게엑-]

    기세는 조금 줄었지만 지금도 계속해서 몰려들고 있는 배드엔딩들이 그런 막둥이의 시체에 꼬여들고 있었다.

    결국 보카사를 비롯한 천사들과 우리 파티는 배드엔딩들에 의해 갈라지게 되었다.

    [미궁의 출구는 하나야! 거기서 모이세!]

    보카사가 내뿜는 흰 빛은 이내 빗줄기와 배드엔딩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끔 되었다.

    드레이크가 제일 먼저 바뀐 상황에 적응했다.

    “여기를 떠야 해! 이러다간 한도 끝도 없겠어.”

    하긴, 계속 밀려오는 몬스터 웨이브를 밑도 끝도 없이 상대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윤솔을 등에 업었다.

    윤솔 역시도 비장한 표정을 지은 채 내 목을 끌어안았다.

    파아앗-

    윤솔은 나와 드레이크가 소모한 HP들을 모두 회복시켜 주었다.

    [이방인들이여! 부디 우리 아이들을 부탁하네-]

    마지막까지 아이들을 생각하는 보카사의 음성이 저 멀리서 작게 들려온다.

    그의 것뿐만이 아니었다.

    [꼭 다시 만나자고 친구들!]

    [또 우리랑 납달리 해야 해!]

    [푸하핫! 즐거웠다! 이따 출구에서 보자!]

    [반드시 살아남아라. 이 멋진 자식들아!]

    마을에서 같이 럭비를 했던 레오나르도,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도나텔로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NPC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말자는 주의임에도 불구하고…녀석들의 외침은 나를 살짝 동요시켰다.

    나도 가능하다면 녀석들과 또 납달리를 하고 싶다.

    …….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지 않은가?

    “…가자.”

    나는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뒤는 배드엔딩들이 우글거리는 지옥.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궁이다.

    우리는 정면을 향해 질주했다.

    눈을 질끈 감았으나 뜬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칠흑 속을.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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