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283화 (283/1,000)
  • 284화 미궁 속의 격리자들 (1)

    미궁의 벽이 열렸다.

    그것을 넘어온 이는 노인.

    아주 지쳤지만 여전히 날이 서 있는 듯한 남자였다.

    희고 풍성한 수염은 짰을 때 핏물이 한 바가지는 나올 것처럼 붉게 절었다.

    옷이나 머리카락 날개 등의 다른 흰 부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

    나는 그를 본 순간 바로 눈치 챘다.

    예전에 미궁 속에서 스마일과 맞닥뜨렸을 때 우리를 구해 줬던 남자다.

    그는 이곳의 주민들에게 ‘하얀 불꽃’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듯했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사용하는 백색의 불꽃 마법 때문이겠지.

    남자가 등장하는 순간 마을 안의 모든 천사들이 죄다 모여들었다.

    하나같이 간절하고 또 애타는 표정.

    그들의 대표로 나선 장로는 남자의 쪼글쪼글한 손을 잡았다.

    [잘 오셨소, 보카사!]

    NPC ‘보카사 바리새인’

    천사족의 궁정마법사.

    천사 황제 ‘니고데모’를 최측근에서 섬기는 충신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정체는 피난민들과 내통하는 ‘내부자’였던 것이다!

    보카사는 미친 황제 니고데모가 지하감옥에 가두어 놓은 아이들을 몰래 빼돌려 이곳 미궁으로 데려와 부모들에게 연결해 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보카사가 붉게 변한 로브자락을 들자 그 뒤로 몇몇의 아이들이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들아!]

    [오오 내 딸!]

    [나의 손자가 돌아왔도다!]

    우글우글 모여든 천사들 중에서 몇몇 이들이 눈물범벅이 된 채 달려 나왔다.

    하지만 아직도 절대다수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돌려받지 못했다.

    […이번에는 이 아이들뿐이라오.]

    그들은 보카사의 늙고 힘없는 목소리에 고개를 푹 숙여야만 했다.

    한편 보카사가 데려온 아이들 중에 부모가 없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장로의 자애로운 손길에 의해 어루만져졌다.

    장로는 보카사에게 물었다.

    [이보오 바리새인. 이번에는 몇 명이나 데리고 온 거요?]

    […지하감옥을 나올 때는 열둘이었소이다.]

    하지만 보카사의 뒤를 따라온 아이들의 수는 그 절반인 여섯뿐이었다.

    나머지 아이들은 미궁으로 오는 길에 배드엔딩들의 습격을 받아 실종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말이 실종이지 사실상….

    모든 천사들이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미친 황제의 폭정에서 도망쳐 하염없이 아이들을 기다려야 하는 생활.

    언제까지 이런 고통의 시간을 겪어야 할 것인가.

    그마저 보카사가 충신으로 위장한 채 황제의 밑에 남아 아이들을 빼돌려 주지 않았다면 더욱 절망적인 상황이었을 것이다.

    한편.

    보카사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때 만났던 이방인들인가? 다행이군. 무사히 마을 안으로 들어와서.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맬까 봐 걱정했다네.]

    그는 나에게로 뚜벅뚜벅 걸어와 악수를 청했다.

    [마을 상황을 보아하니 배드엔딩들의 습격이 있었군. 그것을 막아 준 이는 아마도 자네들이겠지?]

    “네.”

    [그럴 줄 알았어. 배드엔딩들의 습격을 막아 낼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이들은 우리 마을에 없으니까.]

    그는 고개를 돌려 드레이크와도 악수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윤솔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

    움찔!

    윤솔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피와 화광에 젖은 보카사의 몰골이 너무나도 그로테스크했기 때문이다.

    한편, 윤솔이 악수를 거부하자 보카사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만도 하다. 나는 너와 네 언니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으니까.]

    그렇다.

    윤솔은 지하감옥에 갇혀 있던 도중 보카사의 도움으로 미궁을 탈출해 천사들의 마을에 오던 중 습격을 받아 실종되었던 아이.

    보카사는 윤솔과 맞추었던 시선을 뗐다.

    그리고 냉정하게 돌아섰다.

    [나를 두려워하고 욕해도 좋다. 네겐 그럴 자격이 있어. 아니, 모든 아이들이 그렇지. 이 미친 세상을 만들어 낸, 그리고 이 미친 세상을 막지 못한 어른들을 욕하거라.]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당신이 두렵지 않아요!]

    뒤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까 오목알과 초콜릿을 바꿔 주었던 소년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던 다른 소년소녀들도 우르르 달려 나와 보카사를 에워쌌다.

    [지하감옥에 갇혀 있던 우리를 꺼내 준 것은 당신이에요!]

    [할아버지는 저희를 구원해 주셨어요. 부모님을 다시 만나게 해 주셨고요.]

    [미궁으로 들어오며 봤어요. 당신이 얼마나 처절하게 배드엔딩들과 싸웠는지.]

    모두들 저번에 미궁으로 도망쳐 와 마을 적응을 끝낸 아이들이었다.

    이번에 미궁으로 도망쳐 온 아이들은 아직도 공포와 충격에 덜덜 떨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 진정된 아이들은 보카사를 향해 신뢰와 믿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 무서워하고 있는 아이들도 차차 시간이 지나 안정됨에 따라 저렇게 될 것으로 보였다.

    “…나도 저랬던 때가 있었는데.”

    드레이크는 이런 상황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 또한 군인이었던 시절 아이들을 위해 싸웠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네티의 기억을 더듬은 윤솔이 말했다.

    “네티는 마을에서 안정을 취할 시간이 없었겠구나. 저 아이들과 같이 무서워하고 있는 것이 느껴져. 도대체 미궁 속에서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

    “…우리가 겪었던 것과 똑같은 일을 겪었겠지.”

    “만약 그렇다면…작고 힘없는 어린아이에게는 정말로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무서운 기억이었을 거야.”

    윤솔은 덜덜 떨리는 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쩐지 이 작은 천사 소녀가 가엽게 느껴지는 그녀였다.

    *       *       *

    한편.

    천사족의 궁정마법사 보카사 바리새인은 마을의 모든 천사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부슬부슬…

    비가 야음을 적신다.

    그것은 보카사의 몸에 깊게 배인 핏물까지 씻어 내고 있었다.

    보카사의 전신이 서서히 흰색으로 되돌아온다.

    그는 이글거리는 횃불을 든 채 좌중들 앞에서 외쳤다.

    [황제가 점점 미쳐 가고 있소!]

    보카사의 외침은 어둠을 살라먹으며 불탄다. 그 뜨거움 앞에 천사들은 전율했다.

    [니고데모 황제는 사흘 안에 온 나라에 존재하는 아이들을 모두 잡아들여 지하감옥에 가둘 것이라고 공포했소이다. 특히나 장자(長子)들은 더더욱 위험하오!]

    그 말을 들은 모든 천사들의 얼굴이 납덩이처럼 굳었다.

    이곳에 모여든 모두는 미치광이 황제의 대국민적 유괴, 납치 소동 때문에 피난 온 이들.

    그 때문에 부모를 잃고 자식을 잃어버린 존재들이다.

    천사 하나가 격분하여 물었다.

    [대체 왜 그런답니까!?]

    보카사는 잠시 입을 다물고 질문한 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읊조렸다.

    [아이들 중 천공섬을 무너뜨리는 자가 나온다.]

    [……?]

    [그런 신탁이 내려왔소.]

    보카사의 말에 모두가 경악했다.

    그는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가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하오. 천공섬의 몰락을 보는 순간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합디다.]

    보카사의 말에 천사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반응이다.

    어린아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나라를 멸망시키겠는가?

    하지만 보카사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천사들에게 신탁을 전해 오는 하얀 수정구를 집어 들었다.

    수정은 밝은 빛을 뿜어 허공에 메시지를 수놓는다.

    <아이들 때문에 나라는 사라진다.>

    <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세 살 난 어린아이.>

    <구시대의 질서가 막을 내림과 동시에 새 시대를 여는 출생이 있을 것이다.>

    확실히 신탁이 내려온 것 자체는 사실이다. 보카사는 침중한 안색으로 좌중을 돌아보았다.

    [사실 이 신탁 역시도 황제의 입을 통해 들은 것이기에 온전히 다 믿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외다.]

    그 역시도 확실한 믿음이 없어 흔들리는 듯한 어조.

    하지만 다른 천사들은 그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옳소!]

    [무슨 어린아이가 나라를 망친단 말이냐!]

    [니고데모 황제가 미쳐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 분명하오!]

    [어린아이들이 나라의 미래이면 미래이지 어찌 해악이 될 수 있는지…!]

    하지만 천사족의 장로는 침중한 안색이다.

    […니고데모 황제의 예언은 단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지. 왜냐하면 그것은 신탁이기 때문이야.]

    갑분싸.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천사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고 바닥을 쳐다본다.

    장로의 말은 사실이었다.

    니고데모 황제는 미치기 전까지만 해도 역대 황제들 중에서 가장 신탁을 잘 받아들이기로 칭송이 자자했으니까.

    하지만 보카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결연한 표정으로 장로의 어깨를 짚었다.

    [니고데모 황제의 총명함은 이미 옛말이오. 이제 그는 미쳐 날뛰는 ‘식인황제’에 불과하지.]

    니고데모 황제가 아이들을 지하감옥에 가둔 뒤 밤이면 밤마다 몇몇씩을 잡아가 다양한 기행을 벌인다는 소문은 이미 파다하다.

    고문을 한다느니, 비틀린 성적 취향을 채운다느니….

    심지어 아이들의 살점을 먹고 그 피로 목욕을 한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었다.

    보카사는 분노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아이들은 차갑고 좁은 지하 감옥에 갇힌 채 괴기스러운 소문에 떨고 있소. 이제 몇몇씩 데리고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오. 황제가 우리의 존재를 눈치챘거든. 오늘 온 이 아이들이 마지막이란 말이오!]

    [……오오 세상에!]

    많은 천사들이 절규했다.

    아직 아이를 되찾지 못한 부모들이었다.

    이제 지하감옥으로 끌려간 아이들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

    부모들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들고 통곡했다.

    그런 이들에게, 보카사는 말했다.

    [이제 우리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요.]

    그 말을 들은 젊은 천사들의 눈에 허연 불이 번쩍인다.

    ‘반란(反亂)’

    답은 이미 정해졌다.

    가장 보수적이고 미온적이던 장로, 그리고 원로급 천사들 역시도 이번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자네들은 어떻게 하겠나?]

    보카사 바리새인.

    그가 우리를 돌아보며 물었다.

    근엄하고 엄격한 표정.

    하지만 그 기저에는 불안과 슬픔의 빛이 어려 있다.

    곧은 신념으로 한평생 외길을 걸어온, 그런 순수한 존재만이 될 수 있다는 천사족의 궁정마법사.

    그는 애걸하는 듯한 태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을 구하고 싶소. 힘을 보태 주길 간곡히 간청하오. 이방인들이여.]

    눈앞에 선택지 따위는 뜨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명백한 퀘스트였다.

    그것도 이 세계관의 역사에 길이 남을 메인 퀘스트!

    미쳐 버린 황제냐 미약한 반군 세력이냐.

    어느 쪽의 편을 들든 간에 역사는 크게 바뀔 것이 분명하다.

    약간을 고민한 끝에.

    “…….”

    나는 결정을 내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