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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280화 (280/1,000)
  • 281화 귀시(鬼市) (2)

    다리를 재건하거나 빨래를 하는 것 외에도 할 일은 산더미였다.

    다행스럽게도 천사들 중에는 버퍼나 힐러가 특기인 이들이 아주 많았기에 마을은 빠른 속도로 재건되어 갔다.

    다친 이들은 힐로 인해 회복되었고 일하는 이들은 버프로 인해 작업 효율이 몇 배가 된다.

    무너진 축대와 장벽은 더 튼튼하게 세워졌고 식량 창고는 다시 가득 차올랐다.

    [대단하군. 피해를 복구하려면 적어도 한 달은 걸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초동 대처가 빨라서 사망자나 실종자도 없었어.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이게 다 저기 인간 친구들 덕분이지!]

    천사들은 입을 모아 나와 드레이크를 칭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높은 곳에 열리는 과일과 버섯을 따 오거나 무거운 벽과 다리를 재건한 이는 대부분 드레이크와 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남자, 여자, 노인, 어린아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의 호감도가 골고루 상승했다.

    일부 젊은 청년층과는 이미 호감도를 MAX까지 찍어 버린 상태.

    그리고 그 여파는 금방 나타났다.

    피해 복구를 거의 다 끝마쳤을 무렵, 한 떼의 건장한 천사족 청년들이 ‘납달리(Naphtali)’를 제안해 온 것이다.

    [이봐, 이방인! 너무 일만 하지 말고 한 판 어때?]

    [아까 보니까 힘 좀 쓰는 것 같던데.]

    [너무 일만 하는 것 아냐? 같이 놀자구!]

    스무 명 가량의 청년들이 타원형의 가죽 공 하나를 이쪽으로 던졌다.

    탁-

    나는 공을 받아든 채 씩 웃었다.

    ‘납달리’라는 것은 천사들이 즐기는 일종의 스포츠 경기이다.

    스무 명의 사람들이 두 팀으로 나뉘어 붙는데 룰은 일반적인 미식축구와 흡사하다.

    손이든 발이든 상관없으니 공을 가지고 돌진하여 100미터 앞에 있는 상대방의 진영 가장 깊숙한 곳에 꽃아 넣으면 점수를 내는 게임.

    참고로 말하자면 이 납달리는 천사들과의 유대감이 어느 정도 형성되었을 때나 참관, 참여 가능한 것으로 이 경기를 같이 하자고 제안 받는 것은 평생의 친구가 되자는 말과도 진배없다.

    승부에서 이겼을 시의 보상으로는 호감도가 대폭 상승한다는 것이 있다.

    으레 사내들이 운동을 함께 하며 땀을 빼고 나면 급속도로 친해지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납달리라, 좋지. 오랜만에 해 보겠네.”

    나는 길쭉한 가죽 공을 든 채 마을 중앙에 있는 커다란 운동장으로 향했다.

    내가 50*100미터의 필드에 발을 들여 놓자마자, 경기가 시작되었다.

    두두두두두-

    적 팀 플레이어들이 황소처럼 돌진해 오는 것이 보였다.

    어찌나 마초적으로 달려드는지 지축이 뒤흔들릴 정도다.

    “…호오?”

    나를 상대로 달려드는 천사들을 보니 천사족 중에서도 덩치가 크고 날랜 이들로만 모였다.

    그들 중에는 맨 처음에 나와 드레이크를 포박해 감옥으로 끌고 갔던 레오나르도, 라파엘, 미켈란젤로, 도나텔로 4인방도 있었다.

    [천사족의 힘을 보여 주겠어!]

    [어디 배드엔딩 나이트메어 폼을 격퇴한 용사의 실력 좀 볼까!?]

    [빨래할 때 보니까 근력이 보통이 아니던데, 한 수 배우지.]

    [최고로 High한 컨디션이다! 좌니난! 천사라! 나를 욕하지는 마!]

    네 명의 라인맨이 엄청난 기세로 돌격해 온다.

    그들의 임무는 공을 가진 상대방을 근육질의 육체로 압박해 전진을 막고 더 나아가 공을 빼앗는 것.

    하지만 나는 지금 마동왕 모드이다.

    수많은 배드엔딩들, 심지어 나이트메어 폼조차 주먹질 한 방으로 격침시킨 내가 저들에게 밀릴 턱이 없다.

    콰악-

    나는 한 손으로 근육질 천사들의 배를 붙잡았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집어 내던지기 시작했다.

    콰콰콰쾅!

    코뿔소처럼 달려오던 라인맨들은 내 어깨에 부딪치자마자 멈춰 섰고 그대로 뒤로 되튕겨져 나갔다.

    “방해하지 마라.”

    라인맨들을 모두 격퇴한 나는 바로 고인물 메타로 변신했다.

    그리고 따라붙는 러너(Runner)들을 압도하는 스피드로 달려 나갔다.

    스팟!

    천사들은 내 움직임을 따라잡기는커녕 눈앞을 지나가는 것조차도 보지 못했다.

    나는 너무도 가뿐하게 라인을 무너트리고 파수꾼들을 제쳐 버렸다.

    “터치 다운(TouchDown).”

    상대방의 골 라인에 공을 떨어트린 나는 천사들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그러자 레오나르도를 비롯한 천사 4인방은 호승심에 불타오르는 표정으로 공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공격이다! 난 원래 수보다는 공이라고!]

    [얕보지 말라구! 우리의 저력을 보여 준다!]

    [젊은 층에서 우리를 따라오는 이들은 아직껏 없었다!]

    [넌 지금까지 넣었던 골의 개수를 기억하고 있나? 나는 하지 못할 정도라굿!]

    그들은 공을 잡고 다시 우리 쪽 골 라인을 향해 돌격해 오기 시작했다.

    과연 이 라인맨들의 힘은 굉장한 것이었다.

    우리 쪽 라인맨들은 그들과 부딪치자마자 나가 떨어졌다.

    녀석들은 힘이 셀 뿐만 아니라 빠르기까지 해서 우리 편 골 라인까지 다가오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한 명만 마크하지 못하도록 여러 방향으로 산개한 채 서로 공을 이리저리 주고받으며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차라라라라락!

    나는 전신을 시커먼 핏줄로 뒤덮었다.

    피카레스크 마스크가 하얀 눈알처럼 변했고 몸 곳곳에서 검은 핏줄과 철조망이 뱀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썩은물 모드!

    참고로 이 몸에는 ‘여덟다리 대왕’의 특성 ‘킬 체인’이 따라붙는다.

    킹! 키잉- 차라라락…!

    내 몸에서 쏘아진 검은 철조망들이 적 팀 플레이어들을 휘감았다.

    콰콰콰쾅! 우지직!

    나는 골 라인을 향해 달려가던 모든 러너와 라인맨들을 한꺼번에 공중으로 띄웠고 이내 땅바닥에 거꾸로 처박아 버렸다.

    (더불어 공 또한 철조망으로 휘감아 가져와 버린 것은 물론이다)

    […….]

    우리 팀조차도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압도적인 플레이.

    러너(Runner) / 고인물

    라인맨(Line man) / 마동왕

    리시버(Receiver) / 썩은물

    혼자서 모든 포지션을 소화하는, 그야말로 1인 군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더 해 볼래?”

    내가 웃는 얼굴로 묻자.

    [나 참, 당연하지!]

    [이렇게 재미있는 납달리는 처음인걸!?]

    [마음에 들었다 이방인! 이제부터는 형제로 인정하지! 지금부터 본편이니까 기대하라구!]

    [자! 한 판 더 간다!]

    혈기왕성한 천사족 젊은이들은 껄껄 웃으며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낸다.

    나는 나대로 즐거웠다.

    이렇게 팔팔한 전투력 측정기들은 오랜만이었으니까.

    회귀하기 전, 게임 속에서 벌어진 납달리 대회에 출전했을 때의 추억도 새록새록 돋아난다.

    ‘…그때 공대원들과 함께 엎치락뒤치락 참 재미있었는데. 몇 년 안 가서 다들 게임 접었었지. 지금 이 시점이라면.…다들 아직 게임 시작도 안 했겠군.’

    내가 먼 옛날의 추억에 젖어 있을 무렵.

    “어진아 힘내!”

    저 멀리서 윤솔이 응원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언제부터였을까?

    관중석에는 이미 수많은 천사들이 모여들어 납달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꺄악! 도나텔로 멋지다!]

    [미켈란젤로 파이팅! 잘생겼어요!]

    [납달리 하는 남자들 너무 멋져!]

    납달리 선수들은 원래 동년배 또래 이성들에게 인기 폭발이다.

    …아니나 다를까.

    개중에는 이미 나를 향해 열렬한 눈빛을 보내오는 이들도 있었다.

    [쒸익, 쒸익…저 친구…근육이 아주 탐나는걸? 우리 ‘머슬흉부털’ 팀에 꼭 스카웃 해야겠어.]

    [오우야. 저 대퇴부 좀 보라지. 죽여주잖아. 러닝이 아주 폭발적일 게 분명해. 우리 ‘머스탱 콧수염’ 파에게 꼭 필요한 인재야!]

    [그르르르… 더 이상 못 참겠다. 저 친구의 근질이 너무 궁금해. 꼭 벗겨서 살펴보고 말겠어. 그리고 꼭 우리 ‘헬스마초단’에 들어오게 하겠다!]

    …전부 다 근육질의 남자들뿐이다.

    윤솔은 그들을 보며 식은땀을 닦은 뒤 다시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아, 아무튼 힘내!”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든 뒤 다시 필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천사들과의 호감도에 아예 MAX 종지부를 찍어 버릴 심산이다.

    *       *       *

    봉사활동, 대민지원이 모두 끝났다.

    이후 갑자기 불이 붙어 펼쳐진 납달리 경기에서도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그 증거로, 내 주위에는 온통 근육질의 남자들이 모여들어 뜨거운 콧김을 내뿜고 있다.

    [이봐, 평소에 운동 뭐 하나?]

    [형님 식사는 어떻게 하십니까? 보충제 뭐 드시나요?]

    [자네는 근골이 좋아. 하지만 납달리를 하는 자세가 잘못돼서 효율이 안 나온다고.]

    [자, 나를 따라해 봐. 엉덩이 뒤로 빼고. 이렇게. 그리고 숨을 흐읍! 하! 침은 흘리지 말고, 근손실 오니까.]

    전부 다 운동 같이 하자거나, 운동을 알려 주겠다거나, 몸을 만져 봐도 되겠냐고 묻는 남자들뿐이다.

    한편 저 앞에 있는 드레이크의 주위에는 여자 천사들이 잔뜩 달라붙어 재잘거리고 있다.

    새로 따온 과일을 맛보여 주고 새로 작곡한 음악을 들려주고 새로 짠 옷감을 대 보며 저희들끼리 깔깔 웃는다.

    ‘…어? 열받네?’

    화가 난다.

    그냥 화가 나.

    내가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을 눈치 챈 드레이크는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아아, 어진. 호감도 MAX를 찍은 것 같다.”

    “…그걸 위해 무슨 노력을 했지?”

    “응? 아무것도. 원래 저절로 올라가는 것 아닌가?”

    “그럴 리가. 세상에 거저 얻는 게 어딨어. 뭔가를 했기에 호감도가 올라갔겠지.”

    “하지만 정말로 뭐 없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가져다주는 과일을 맛있게 먹고 말하는 것을 대충 들어주었을 뿐이야.”

    젠장! 젠장! 젠장! 이건 뭔가 불공평하다!

    …….

    …뭐 아무튼.

    과정이 심히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어찌되었건 우리는 천사들과 많이 친해질 수 있었다.

    나는 불특정다수의 남자들에게.

    드레이크는 불특정다수의 여자들에게.

    “와, 잘됐다. 어진아!”

    윤솔이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드레이크 또한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오더를 완수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도 씁쓸한 얼굴로 박수를 쳤다.

    한편. 윤솔은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진아. 호감도를 MAX까지 찍은 것에 대한 보상이 뭐야?”

    그래. 빨리도 물어본다.

    나는 윤솔과 드레이크의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마을 저편을 바라보았다.

    “……?”

    “……?”

    둘은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다.

    그러자.

    저물어 가는 석양과 그 밑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들의 틈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보였다.

    둥둥둥…♬

    북을 치는 듯한 소리가 작게 들려오는 와중, 검은 형체를 한 무언가가 그림자 속을 꾸물꾸물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것들은 한두 마리가 아니었는데 그 수가 눈 깜짝할 사이에 십, 이십, 삼십, 사십…계속 늘어난다.

    검은 형체는 기괴하게 생긴 하얀 얼굴을 높이 들어 올렸고 이내 북소리에 맞춰 춤을 추듯 움직였다.

    그 모습은 마치… 마치…

    “배드엔딩!?”

    드레이크가 기겁을 하며 쇠뇌와 화살을 빼들었다.

    하지만 나는 손을 뻗어 드레이크를 만류했다.

    “배드엔딩이 아냐.”

    “……?”

    “잘 봐.”

    내 말을 들은 드레이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면을 주시했다.

    이내. 그는 알 수 있었다.

    눈앞에 움직이는 것들이 사실 천사들이라는 것을!

    등등등…♪

    천사들은 배드엔딩의 가죽과 탈을 뒤집어쓴 채 북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은 기묘한 동작으로 덩실거리며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는데 그 끝에는 수많은 횃불과 좌판들이 쭉 늘어놓여 있었다.

    이글거리는 횃불이 밝히고 있는 어둠 속에는 이미 수많은 천사들이 모여 묘한 복장에 묘한 탈을 쓰고 북소리에 맞춰 춤을 춘다.

    그리고 길게 깔려 있는 좌판 위에는 듣도 보도 못한 온갖 기묘한 아이템들이 쫙 깔려 있었다.

    ‘야시장(夜市場)’

    그것을 본 내 두 눈에는 하나의 마크가 새겨졌다.

    ‘$’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마을 주민으로 인정받기 위해 겪었던 온갖 고생의 결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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