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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278화 (278/1,000)

279화 실락원(失樂園) (5)

나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스마일을 바라보았다.

화광에 젖어 붉게 보이는 미소.

“그래, 웃어라. 웃어야 복이 온다잖냐.”

나 역시 싱긋 웃으며 자세를 잡았다.

이제 미궁 속에서 졌던 빚을 갚아 줄 시간이 됐다.

쾅!

나는 발을 굴러 땅을 두 조각으로 쪼갰다.

벽이 밀집되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보니 지진 공격이 먹혀든다.

[그륵!?]

스마일은 그 자리에서 균열 사이로 빠져 버렸다.

물론 완전히 벼랑 사이로 처박히기 직전, 커다란 두 팔을 뻗어 양쪽의 땅 끝을 잡고 버팅기는 스마일이었다.

하지만 그러느라 특유의 기동력이 잠시 봉인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 거기 그대로 있어라.”

나는 깎단 대신 마동왕의 건틀릿을 낀 채 돌격했다.

이미 예전에 도트 데미지의 저주는 걸어 놓았으니 이제 타격만이 남았다.

콰콰쾅!

필드 전체가 요동치며 스마일의 숨통을 조인다.

놈은 지형 데미지를 거의 받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실하게 데미지를 입고 있었다.

“일단 한 대.”

나는 오른 주먹을 들어 스마일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빠각! 쩌적…!

하얀 얼굴에 그려진 붉은 미소.

그것은 커다란 주먹 자국으로 인해 잔뜩 일그러졌다.

“이어서 두 대.”

나는 왼 주먹을 들어 바로 스마일의 반대쪽 뺨에 박아 넣었다.

퍼펑! 우지직…!

스마일의 얼굴은 순식간에 쭈글쭈글해진다.

놈의 몸을 때리자 주먹에 탱탱한 반탄력이 전해져 온다.

마치 커다란 양갱을 때리는 듯한 느낌.

그러자.

파팟!

스마일은 땅 위를 짚고 있던 손을 놓아 버리고 균열 저 깊은 곳으로 물러났다.

일단 내 주먹을 피해 멀리 떨어진 뒤 자세를 가다듬어 다시 공격할 생각인가 보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던 바였다.

“…그 안으로 숨겠다고? 다시는 못 나올 텐데?”

스마일이 땅에 생겨난 균열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두 손으로 양쪽 땅거죽을 잡고 끌어당겼다.

우지지지지지직!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벌어졌던 땅의 균열이 다시 닫힌다.

양쪽의 땅이 나의 악력에 의해 다시 끌어당겨지고 있었다.

[그르륵!?]

스마일은 양쪽 땅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다시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드레이크가 허용하지 않는다.

“나오지 않아도 돼. 들어가.”

마치 배웅 나오는 이를 만류하는 듯한 대사.

드레이크는 땅에 고정해 둔 커다란 쇠뇌를 이용해 화살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르르르륵!]

스마일은 날아드는 화살을 손으로 쳐내거나 어깨로 빗겨 퉁기면서도 꾸역꾸역 밀고 올라왔다.

쿵!

이내 두 조각으로 갈라졌던 땅이 닫혔다.

[크-아아아아악!]

스마일은 땅이 닫히기 전에 지상으로 올라오는 것에는 성공했다.

약 95% 정도의 성공이었다.

왜냐하면 땅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몸을 빼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한쪽 발목이 균열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끼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드레이크는 한쪽 발이 묶인 스마일을 상대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핑- 피핑- 핑-

가벼운 쇠뇌가 계속해서 화살을 발사한다.

그것들은 스마일의 몸에 계속해서 푹푹 꽂히고 있었다.

윤솔이 외쳤다.

“드레이크 씨! 그놈에게는 화살이 안 먹혀요!”

“나도 안다.”

드레이크는 윤솔의 말을 듣고도 태연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윤솔은 비로소 드레이크가 무얼 하고 있는지 알아냈다.

꿀열매!

배드엔딩들의 먹이.

먹으면 HP가 차오르는 금단의 과실.

스마일은 이 꿀열매들이 열린 넝쿨을 허리와 어깨에 주렁주렁 두르고 있었는데 드레이크는 절묘하게 이 꿀열매들만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퍽! 퍼퍽! 파삭… 파사삭…

화살에 맞은 꿀열매들은 산산조각이 나 흩어진다.

바닥에 떨어져 굴러다니는 과육 파편들.

[그르륵!?]

스마일은 허리춤을 더듬다가 흠칫했다.

꿀열매 넝쿨을 만져 보니 과실이 매달려 있던 곳에는 온통 화살만이 가득할 뿐이다.

비축해 둔 꿀열매가 반도 넘게 사라졌다.

[크아아아악!]

스마일은 비로소 사태파악을 한 듯했다.

HP를 회복시켜 주는 꿀열매가 없다면 놈은 다시 깎단의 도트 데미지에 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도망쳐서 꿀열매를 수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놈의 오른쪽 발목은 땅에 단단히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내가 조이고 있는 것이지만 말이지.”

나는 땅에 두 손을 댄 채 싱긋 웃었다.

필드 전체로 압박해 조이는 것이 마동왕의 특기 아닌가?

저번에 미궁 속에 있었을 때는 지형이 너무나도 불규칙해서 쓸 수 없었던 전법이었다.

[크르르르륵!]

스마일은 ‘까먹음’ 특성을 이용해 지형의 힘을 잃게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을 뺄 수는 없었다.

지금 스마일을 붙잡아 두고 있는 것은 땅의 힘이 아니라 나의 힘이니까.

꾸구구국…

나는 계속해서 흙을 밀었다.

단단하게 압축된 흙은 순수한 물리력으로만 스마일을 강제하고 있다.

특성으로 어떻게 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스마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다.

퍼억-

놈은 압축된 흙에 박혀 있던 자신의 오른쪽 발목을 잘라내 버린 것이다.

“이런 미친!”

드레이크가 경악한 채 외쳤다.

스마일은 발목의 절단면으로 그냥 땅을 내딛었다.

석유와도 같은 체액이 쏟아졌지만 크게 개의치 않아하는 듯 보였다.

[크-워어어억!]

하지만 고통만큼은 상당한 듯싶다.

놈은 두 손과 하나 남은 발로 바닥을 기어 후방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끔찍한 저력과 집념이 향한 대상은 바로 윤솔이었다.

드레이크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 와중에도 힐러를 노린다고? 대단한데.”

말을 마친 그는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진! 정말 네가 말한 대로군!”

“맞아.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

나는 드레이크를 향해 손짓했다.

내가 뛰는 방향을 본 윤솔은 깜짝 놀란다.

“어어? 어진아 그쪽은 밖이야!”

그녀의 말마따나, 나는 지금 천사들의 마을 바깥에 있는 미궁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파팟!

죽은 배드엔딩의 거대한 몸을 밟고 뛰어오른 나는 그대로 커다란 장벽을 넘어섰다.

[크아아아아악!]

한쪽 발목이 절단된 스마일 역시도 엄청난 기세를 뿜어내며 나를 추격해 온다.

나는 드레이크에게 오더를 내렸다.

“X구역 6시 방향으로!”

“오케이.”

고개를 끄덕인 드레이크는 나와 다른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손에는 질긴 와이어를 든 채로.

한편 내 등에 업힌 윤솔은 불안한 표정이다.

“어진아. 미궁으로 들어가면 더 상대하기 어려운 것 아냐?”

스마일은 배회성 배드엔딩답게 미궁 속의 지리를 완벽하게 꿰고 있기에 상대하기 까다롭다.

사실상 미궁 전체가 놈의 구역이나 다름없는 상태.

하지만 나는 자신 있게 뛰었다.

이번에는 분명 전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크아아아악!]

스마일이 점점 거리를 좁혀온다.

놈은 한쪽 발목이 잘려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속도가 전혀 줄지 않았다.

다만 그 대신 냉정함이나 침착성은 많이 무뎌진 듯했다.

분노와 집념이 놈의 교활한 두뇌를 잠시 멈추게 한 모양이다.

“…으음, 생각보다 빠른데? 이래서야 계산이 틀어지겠어.”

나는 이를 악물었다.

스마일의 추격 속도는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목적지까지 가기도 전에 잡혀 버릴 것이 분명하다.

타탁!

나는 놈을 따돌리기 위해 잽싸게 무너진 계단을 타내려갔다.

그리고 기둥 뒤로 쏙 숨어 버렸다.

[오-오오오오!]

놈이 나를 따라 막 코너를 돌았을 때.

[크륵!?]

스마일은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나와 윤솔은 무성하게 자라난 넝쿨 밑에 납작 엎드려 있었기 때문이다.

임시방편으로 떠올린 숨바꼭질.

두근- 두근- 두근-

윤솔은 나의 품에 안긴 채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무서운 적에게 쫓긴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 때문일까?

내가 막 윤솔의 귓가에 대고 안심해도 된다는 말을 전하려는 순간.

“이봐 어진! 준비 끝났다! 어디에 있나!”

눈치 없게도, 드레이크가 저 계단 아래에서 나와 윤솔을 소리쳐 부른다.

[크르륵!?]

스마일은 드레이크의 목소리에 귀신같이 반응했다.

콰콰쾅!

놈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그것을 본 윤솔이 다급하게 내 옷깃을 당겼다.

“어진아 어떻게 해! 저러다 드레이크 씨가 당하기라도 하면…!”

하지만 나는 그저 웃을 뿐이다.

“당할 리가 있나.”

윤솔은 나의 태평함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치였지만, 이내 계속해서 들려오는 드레이크의 목소리를 듣고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눈치 챘다.

“이봐 어진! 준비 끝났다! 어디에 있나!”

“이봐 어진! 준비 끝났다! 어디에 있나!”

“이봐 어진! 준비 끝났다! 어디에 있나!”

“이봐 어진! 준비 끝났다! 어디에 있나!”

.

.

드레이크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온다.

한 치의 다름도 없는 일정한 음조로.

나는 윤솔을 업은 채 스마일을 뒤따라갔다.

놈의 발목에서 흘러나온 검은 피 때문에 추적은 쉬웠다.

이윽고 나와 윤솔이 드레이크의 목소리가 들리는 구역에 당도하자.

“역시.”

“세상에!”

나와 윤솔이 예상하고 있던 광경이 눈앞에 들어왔다.

<배드엔딩 / 일명 ‘성대모사 파리지옥’> -등급: A / 특성: ?

-습성: 버로우성

-서식지: 미궁 외곽, X구역 6시 방향.

-발견일: 0월 X일 03시 11분.

-커다란 식충식물의 외형을 하고 있으며 큰 입으로 동료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부름.

혹시나 동료가 있나 싶어 가까이 다가갔다가 한입 베어 물리기라도 하면 낭패.

거대한 파리지옥 하나가 수없이 많은 이빨로 스마일을 뒤덮어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크아아악!]

스마일은 버둥거렸지만 성대모사 파리지옥은 계속해서 그런 스마일을 삼키려 든다.

[이봐 어진! 준비 끝났다! 어디에 있나!]

드레이크의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 말이다.

한편.

“어이, 늦었군.”

드레이크는 손에 와이어를 든 채 반대편 기둥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와이어는 저 아래 파리지옥의 입 속 세 번째 촉수에 단단히 묶여 있는 것이다.

“파리지옥의 입 속에는 세 가닥의 촉수가 있는데 그중 가장 밑에 있는 곳까지 충격이 닿아야 입이 닫히거든.”

“그래서 저번에 떨어졌을 때 미리 그 촉수 부분에 와이어를 묶어 뒀었지. 필요하면 언제든 당겨 버릴 수 있게.”

우리는 씩 웃으며 아래를 쳐다보았다.

발목이 잘려나간 것 때문에 분노한 스마일은 미처 이 파리지옥을 떠올리지 못했나 보다.

“이제 조용한 식사를 즐길 수 있게 해 줘야지.”

나는 지진건틀릿을 들어 주변의 벽과 기둥, 바닥들을 모조리 주저앉히기 시작했다.

우르르르릉!

엄청난 양의 붕괴물들이 떨어져 파리지옥을 파묻어 놓았다.

몸이 멀쩡한 상태의 스마일조차 맞상대하길 꺼려했던 파리지옥의 치악력(齒握力)이다.

거기에 엄청난 무게의 붕괴물까지 더해졌으니 부상당한 상태의 스마일로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거기서 도트 데미지에 절어 죽어라.”

나는 폐허가 된 ‘미궁의 X구역’ 중앙에 섰다.

그리고 가상키보드의 X키를 눌러 조의를 표했다.

“…….”

한편, 윤솔은 고개를 뻗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후두둑- 후두둑-

작은 파편 몇 개만이 구르고 있는 밑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윤솔은 고개를 흔들어 미약한 불안감을 떨쳐 버렸다.

바로 그때.

윤솔의 불안감을 완전히 씻어 줄 만한 일이 벌어졌다.

나와 드레이크, 윤솔의 주위로 어느샌가 수많은 천사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아마 마을에서부터 우리를 따라온 듯했다.

[저 무서운 배드엔딩을 해치우다니, 정말 엄청나군!]

[마을을 구해 줘서 감사합니다!]

[고맙네! 자네들은 우리 아이들의 영웅이야!]

수많은 천사들은 쭈뼛거리는 얼굴로 다가와 서투른 감사인사를 건네 온다.

하지만 그 마음만은 진짜임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앞에 그들의 호감도 게이지가 실시간으로 증가하는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천사들 무리 앞으로 장로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윤솔을 끌어안으며 나를 향해 말했다.

[우리가 했던 홀대에도 불구하고 마을을 위해 나서 주어 정말 고맙네. 자네들의 마음씨를 생각하면 우리들은 천사 실격이야.]

장로는 나와 드레이크를 번갈아 돌아보며 말했다.

[그대들을 우리 마을의 정식 구성원으로 인정하겠네. 함께 돌아 가세나.]

메인 퀘스트에 본격적으로 합류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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