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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277화 (277/1,000)
  • 278화 실락원(失樂園) (4)

    [놈들이 옵니다!]

    거대한 장벽 위에서 보초를 서던 천사 하나가 외쳤다.

    그는 두 날개를 뻗어 하늘로 날아오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푸욱!

    장벽 너머에서 뻗어 나온 긴 촉수 하나가 그의 배를 꿰뚫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에에에엑!]

    촉수는 한 가닥이 아니었다.

    마치 머리털과 같은 검은 뭉텅이 하나가 장벽 위로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배드엔딩 / 일명 ‘엉겨드는 두피’> -등급: A / 특성: ?

    -습성: 배회성

    -서식지: 미궁 심장부, D구역 11시 방향.

    -발견일: 0월 X일 08시 13분.

    -수없이 많은 머리카락으로 공격해 온다.

    기본적으로 대식가이며 자기보다 강한 배드엔딩을 제외하면 먹지 못하는 것은 없다.

    거대한 배드엔딩 한 마리가 수많은 촉수를 뻗어 장벽을 타 넘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가아아악!]

    [키키키키…]

    [푸르르륵-]

    각양각색의 수많은 배드엔딩들이 ‘엉겨드는 두피’의 머리털을 잡고 올라와 천사들의 마을을 습격했다.

    경계를 서던 천사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뭐, 뭐야!? 배드엔딩들이 서로 협력을 한다고!?]

    [도망쳐! 저놈들 모두 아이들을 잡아먹는 데 맛이 들린 놈들이다!]

    [이번엔 왜 이렇게 많이 온 거야!?]

    [저것들을 어떻게 막아!]

    [막아! 아이들이 숨을 시간이라도 벌어!]

    어른 천사들이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창이나 칼을 든 채 배드엔딩들에 맞선다.

    피피피피피핑-

    수많은 화살들이 날아 배드엔딩들의 머리 위에 퍼부어진다.

    몇몇 거구의 배드엔딩들이 고슴도치가 되어 장벽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콰쾅! 우지지직!

    곳곳에서 목책이나 축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고통과 공포에 겨운 비명이 도처에 범람하고 있었다.

    [꺄아아아악! 아빠!]

    [엄마! 살려 줘요!]

    가장 먼저 배드엔딩들의 타깃이 된 존재는 아이들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배드엔딩들은 장벽을 넘어오자마자 아이들만을 속속 낚아채 갔다.

    건물 안이나 나무뿌리, 토굴 안에 아무리 꼭꼭 숨어도 배드엔딩들은 귀신같이 아이들이 숨어 있는 위치를 눈치 채고 습격해 온다.

    덥썩! 콱! 홰액-

    배드엔딩들은 아이들을 발견하면 한입에 집어삼키거나 촉수로 돌돌 말아 버렸다.

    크고 빠른 배드엔딩들의 움직임은 어린 천사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차원의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두 번이나 뺏길 위기에 처한 천사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자신들의 아이를 되찾은 부모들은 눈에 핏발을 세운 채 배드엔딩들을 막아섰다.

    [안 돼! 내 딸을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

    [오오 이놈! 내 손자만은 안 된다! 차라리 날 죽여라!]

    [아들! 정신 차려! 절대로 너를 다시 잃지는 않겠다!]

    아직 아이를 만나지 못한 다른 부모들 역시 아이를 지키는 부모들의 마음에 공감하여 무기를 들었다.

    곳곳에 쌓인 장작더미에 불이 붙었다.

    거대한 화톳불이 일어 어둠을 밀어낸다.

    천사들은 그 화톳불을 창과 화살에 옮겨 붙여 배드엔딩들을 쑤셨고 놈들을 저 멀리 뒤로 몰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이쯤 되면 물러가곤 했던 배드엔딩들은 오늘따라 더욱 더 질기게 달라붙는다.

    시커먼 배드엔딩들과 하얀 천사들의 격돌은 점점 시뻘겋게 불붙어 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물럿거라!]

    천사족의 장로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한 손에는 마법서, 다른 한 손에는 자신의 키보다 큰 지팡이를 들고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파아아아앗-

    새하얀 결계가 일어나더니 주변의 배드엔딩들을 모조리 뒤로 날려 버렸다.

    “아앗! 저건 내 기술이잖아?”

    장로의 뒤에 붙어있던 윤솔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천공섬으로 오기 위해 비행로에 진입했을 때 윤솔은 미이라로 변한 해적들에게 이 신성 방어막을 쓴 적이 있었다.

    아마도 천사 소녀 네티에게 그 기술을 가르친 이는 눈앞에 있는 장로인 모양이다.

    [게에에엑!]

    [삐오오오!]

    [큭큭큭큭!]

    수많은 배드엔딩들이 장로의 신성마법 앞에 주춤거린다.

    하얀 장막은 검은 악(惡)들을 계속해서 뒤로 몰아넣고 있었다.

    천사 측의 사기가 확 상승했다.

    그들은 희망찬 목소리로 외쳤다.

    [오오, 장로님이 오셨다!]

    [막을 수 있어! 막을 수 있다고!]

    [저 더러운 배드엔딩 놈들에게 끔찍한 배드엔딩을 선사해 주리라!]

    하지만.

    천사들의 드높던 사기도 거기까지였다.

    쿵!

    그들의 눈앞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것이 등장했다.

    <배드엔딩 나이트메어 폼(Bad Ending Nightmare form) / 일명 ‘스마일’>

    -등급: A+

    -특성: ?

    -습성: 배회성

    -서식지: 미궁 심장부, D구역 4시 방향.

    -발견일: 0월 0일 04시 44분.

    -…일반적인 형태의 배드엔딩과는 뭔가 다른 것 같다.

    ‘스마일’

    섬뜩한 미소가 화톳불의 역광에 반쯤 가리어 으스스하게 드리워진다.

    놈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분위기가 변했다.

    심지어 마을을 습격해 온 다른 배드엔딩들마저 주춤주춤거리며 피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쫘아악!

    스마일은 앞을 가로막고 있던 ‘엉겨드는 두피’를 잡아 찢어 버렸다.

    지금껏 장벽 안으로 수많은 배드엔딩을 공급하던 녀석이 일격에 두동강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스마일은 근처에 있던 다른 배드엔딩들까지 찢어 죽이기 시작했다.

    손에 잡히는 것은 죄다 죽이려는 것처럼 보였다.

    [오-오오오!]

    놈이 시커먼 손바닥을 한번 휘저을 때마다 천사들을 그토록 괴롭히던 악몽들이 A4용지처럼 북북 찢겨 나간다.

    거대한 근육 덩치도, 날카로운 가시로 무장한 녀석도, 양손에 커다란 방패를 든 괴물도, 모조리 으깨지고 박살나고 찢겨 죽는다.

    [으으으…괴물…괴물이야.]

    [저건 규격 외의 배드엔딩이 아닌가! 저런 건 못 막는다고!]

    [‘하얀 불꽃’ 님이 상대하시지 않았었나? 설마 ‘하얀 불꽃’ 님마저 패하신 걸까….]

    천사들은 그런 스마일을 두려운 눈으로 보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때.

    스마일의 앞을 막아서는 ‘하얀 벽’이 있었다.

    [이노옴! 여기가 어디라고!]

    천사족의 장로.

    그녀는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빛의 보호막을 펼쳐들었다.

    백색의 아우라가 파동처럼 요동쳐 스마일의 전신을 때렸다.

    하지만.

    콰긱-

    스마일은 두 손으로 흰 장막을 막아 낸 채 버틴다.

    그것도 모자라 손가락을 장막에 박아 넣은 뒤 손아귀 힘으로 막을 찢기 시작했다.

    [오-오오오오!]

    이 와중에도 스마일의 시선은 장로의 뒤에 숨어 있는 윤솔을 향하고 있었다.

    장로는 이를 악물고 윤솔을 뒤로 숨겼다.

    [얘야! 배드엔딩들은 한번 찍은 먹잇감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단다! 어서 도망치거라!]

    그 말과 동시에.

    뿌지지지직!

    흰 장막이 찢어지고 말았다.

    [캬오오오오!]

    스마일은 보호막을 비집고 들어와 손바닥을 휘둘러댔다.

    퍼펑! 퍼퍼퍼펑!

    가로막던 천사들은 모두 피투성이가 되어 나동그라졌다.

    보호막을 유지하고 있던 장로마저도.

    스마일은 윤솔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순간.

    “……!”

    윤솔의 머릿속에 있던 기억 하나가 되살아났다.

    마치 희미한 와이파이 신호를 붙잡은 동영상처럼, 그것은 기적적으로 재생된다.

    윤솔의 머릿속에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도 비가 내리는 밤. 길을 알 수 없는 미궁이었다.

    ‘오-오오오오오!’

    쏟아지는 비와 어둠에 젖은 목소리.

    눈앞에는 배드엔딩 나이트메어 폼 ‘스마일’의 얼굴이 보인다.

    콰쾅!

    무너지는 바닥.

    네티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울고 있었다.

    몸은 점점 아래로 낙하한다.

    까마득히 아래의 저 망망공해(茫茫空海)로.

    그런 네티의 눈에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활짝 웃고 있는 ‘스마일’의 미소였다.

    “…헉!?”

    윤솔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네티가 지상으로 떨어졌던 이유를 알아냈다.

    눈앞에 있는 저 흉악한 배드엔딩, 악몽 같은 괴물.

    모든 것은 ‘스마일’이라는 괴물 때문이다.

    ‘이놈이 모든 흉악한 사건의 원흉임에 틀림없어!’

    윤솔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스마일’은 분명 관련이 있을 것이다.

    황제가 미치게 된 것, 그리고 미궁 속의 배드엔딩들이 생겨나게 된 원인과.

    꾸욱!

    윤솔은 두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 중요한 비밀을 빨리 어진과 드레이크에게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천공섬의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 할 열쇠를 손에 쥐게 될 테니까.

    하지만.

    [크-아아아악!]

    스마일은 엄청난 기세로 윤솔을 추격해 오고 있었다.

    마치 윤솔이 모든 것을 털어 놓기 전에 그녀의 입을 막아 죽이려는 듯한 기세.

    그 기세는 처절하게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것이어서 마주 대하는 윤솔로서는 그 자리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콰쾅! 쾅! 우지지직! 퍼퍼펑!

    스마일은 엄청난 기세로 돌진해 왔다.

    놈의 돌격 루트에 걸리적거리는 목책과 화톳불, 나무뿌리로 된 집과 흙을 쌓아 뒀던 축대들이 모조리 폭파되듯 박살났다.

    그리고 그 앞에는 작고 가녀린 윤솔이 있다.

    “꺄아아악!”

    윤솔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방어막으로는 스마일의 돌진을 막을 수 없다.

    [안 돼!]

    뒤에서 장로가 지르는 경악성이 카랑카랑하게 울려 퍼졌다.

    다른 천사들이 황급히 창과 칼을 들고 나섰지만 스마일의 집념을 막기에는 너무나도 느리다.

    퍼펑!

    스마일은 커다란 화톳불을 그대로 들이받아 부수고는 윤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사방팔방으로 흩날리는 불똥, 거대한 암흑이 윤솔의 전신을 뒤덮을 듯 잠식한다.

    다섯 개의 시커먼 손가락이 막 윤솔의 작은 몸을 감아쥐려는 순간.

    우득!

    요란한 굉음과 함께, 스마일의 손목이 ㄱ자로 꺾였다.

    펄럭-

    그리고 스마일의 앞을 가로막는 붉은 망토가 하나.

    검은 핏줄로 뒤덮인 몸.

    손에 단단히 쥐여 있는 송곳.

    바로 나다.

    “…어진아.”

    윤솔은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준비’가 늦지 않게 끝나서 다행이다.

    나는 망토로 윤솔을 감싼 뒤 등에 업었다.

    그리고 화광에 젖은 스마일의 미소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2차전이네.”

    이제 미궁 속에서 졌던 빚을 갚아 줄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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