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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276화 (276/1,000)
  • 277화 실락원(失樂園) (3)

    동료들이 비 새는 감옥에 갇혀 빗방울을 헤는 동안.

    “…아이구, 이런.”

    윤솔은 불편한 마음으로 성대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어서 오너라. 그간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느냐?]

    장로는 마치 손녀를 보듬는 할머니처럼 윤솔을 안아 주었다.

    그녀는 황급히 두 손으로 눈가를 꾹 눌렀다.

    순간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나 울음이 왈칵 나올 뻔했다.

    ‘어진이가 NPC에게 감정이입하는 건 바보 같은 거라고 했는데….’

    윤솔은 애써 눈물을 꾹 참은 채 감정을 컨트롤했다.

    그러자 장로는 다시 한 번 윤솔을 안아 주었다.

    [자, 이렇게 돌아왔으니 됐다. 이제 마음 편하게 여기서 지내거라. 그렇게 뻣뻣하게 있지 말고.]

    그녀는 윤솔의 손을 잡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굵은 나무뿌리 아래에 위치한 통나무집.

    군데군데 피어 있는 버섯이 형광등처럼 밝은 빛을 뿌린다.

    윤솔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바로 목욕탕이었다.

    “…와아!”

    윤솔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천사들의 목욕 문화는 실로 발달된 것으로서 현대인들이 누리는 시설보다도 훨씬 더 편리하고 화려했다.

    습기를 빨아들이는 숯 굴뚝으로 구름을 붙잡아 바로 정수한 뒤 뜨거운 열을 내뿜는 버섯으로 덥힌다.

    열탕과 미온탕, 증기탕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냉탕은 따로 없었다.

    [날개에 기름을 바른 뒤 들어가렴.]

    장로는 손수 나무열매의 기름을 짜 윤솔의 날개에 발라 주었다.

    이윽고 열탕에 들어간 윤솔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우와…기분 좋다.”

    물은 마치 입욕제라도 푼 듯 부드럽고 향긋했다.

    손가락으로 뿌연 김이 올라오는 수면을 흩으면 미약한 점성이 느껴졌다.

    그녀는 물에 몸을 담근 채 눈을 감았다.

    후두둑- 후둑-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어진아…미안…드레이크 씨… 죄송해요….’

    너무 기분이 좋아 순간 동료들이 억울한 옥살이 중이라는 사실도 깜빡해 버렸다.

    윤솔이 자기의 머리를 때리며 자책하고 있을 때.

    [찜질을 하는 동안 책이라도 보련?]

    장로는 욕실 한 구석에 있는 책장을 권했다.

    윤솔은 책이 젖을까 봐 독서를 주저했지만 이내 천사들의 책은 물에 젖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동화책 몇 권을 집어 들었다.

    “와아, 페이지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구현되어 있네. 대단하다.”

    윤솔은 물속에서 페이지를 넘기며 감탄했다.

    세계 각국의 천사에 대한 기록들이 번역되어 삽화와 함께 소개되고 있다.

    평소 종교나 신화 등에 관심이 없던 윤솔 역시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만한 내용들이었다.

    한편으로는 이 섬을 디자인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을지가 상상이 된다.

    하지만 그럴수록 어진이 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불안해진다.

    ‘곧 알게 될 거야. 이곳이 절대 힐링이 되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윤솔은 어진의 말을 떠올리며 두 손으로 뺨을 짝 쳤다.

    “그래, 방심하면 안 돼. 아자! 바짝 경계하자!”

    그때.

    장로가 여러 가지 음식들이 담긴 바구니를 든 채 욕실로 들어왔다.

    바구니 속에는 다양한 과일열매들이 들어 있었다.

    보는 이의 마음을 절로 풀어지게 할 정도로 아름답고 풍성한 만찬이었다.

    [목욕하면서 먹자꾸나.]

    장로는 바구니를 들며 웃었다.

    마치 로마의 귀족들처럼, 목욕을 하면서 식사를 하는 것은 천사들의 고유한 문화인 듯하다.

    그때.

    윤솔은 바구니 속의 다양한 과일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수많은 과일들 중에 보여야 할 한 가지가 안 보인다.

    “꿀열매는 없나요?”

    윤솔은 입이 기억하고 있는 그 새콤달콤한 맛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러자. 장로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네? 꿀열매요. 미궁에서 흔하게 봤었는데…….”

    [그것은 해로운 열매다.]

    장로는 단호한 어조로 재차 말했다.

    [그 열매는 감히 입에 담을 수도 없을 만큼 불길한 열매란다. 착한 천사라면 절대로 그것에 손을 대서는 안 돼요.]

    “아앗. 그런 건가요. …네 알겠습니다.”

    윤솔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꿀열매가 맛있기는 했지만 장로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먹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또 어진이가 한 말도 있었지.’

    윤솔은 꿀열매를 떠올리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배드엔딩들이 주식으로 삼는 과실.

    하기사, 그런 추악한 괴물들의 먹이로 통하는 열매가 정상적인 것일 리가 없다.

    ‘분명 독이 있거나 그럴 거야.’

    윤솔은 꿀열매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털어 버렸다.

    어째서일까, 잊으려 해도 자꾸 생각나는 맛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한편, 장로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런 윤솔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미친 황제 때문에 아무 죄 없는 네가 고생이 많구나.]

    윤솔은 귀를 쫑긋했다.

    천사 소녀 네티의 기억이 떠오를락 말락 하고 있었다.

    ‘…어쩌면 기억의 퍼즐 조각을 또 찾을 수 있을지 몰라!’

    윤솔은 장로에게서 가능한 많은 이야기를 들어 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대로, 장로는 알아서 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감옥에서 빠져나와 미궁까지 오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배드엔딩들에게 납치까지 당하다니…그동안 어디서 무슨 고생을 하고 다녔던 거니?]

    윤솔은 자기의 사정을 설명했다.

    기억은 없지만 눈을 떴을 때는 이곳으로부터 4만 미터 아래의 지저(地底)였다고.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말을 들은 장로는 크게 놀랐다.

    [대체 어떤 연유로 왕성의 지하감옥을 탈옥해 미궁으로 도망 왔던 어린아이가 그런 먼 곳에서 눈을 뜰 수가 있었을꼬. 이 할미는 당최 알 수가 없구나.]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모르겠네요.”

    […참, 네 언니에 대해서는 좀 기억나는 게 있느냐?]

    장로가 물었다.

    순간.

    욱신-

    윤솔은 약간의 두통을 느꼈다.

    캡슐 속에 흐르는 전류가 두피를 살짝 자극한 모양이다.

    ‘뭐지?’

    분명 머릿속에서 어떤 동영상 하나가 재생되려다가 말았다.

    그것은 마치 희미한 와이파이 신호에 연결된 유튜뷰 영상처럼 계속해서 버퍼링이 걸린다.

    ‘아오! 답답해!’

    윤솔은 손으로 가슴을 팡팡 쳤지만 그런다고 해서 네티의 기억이 바로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윤솔은 새로운 기억 영상 시청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장로의 말 덕분에 명확해진 것은 있었다.

    1. 천사 소녀 네티는 미친 황제에 의해 지하감옥에 수감된 수많은 어린아이들 중 하나였다.

    2. 어느 날 네티는 언니와 함께 지하 감옥을 탈옥하여 이곳 미궁 속의 낙원으로 도망쳐 왔다.

    3. 그 도중에 미궁에 서식하는 배드엔딩들의 습격을 받아 기억을 잃고 지상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그 언니란 애는 누구지?’

    윤솔은 버퍼링에 걸려 버벅거리는 기억 영상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기억.

    별 수 없이, 윤솔은 장로에게 언니라는 인물에 대해 물어보기로 했다.

    잘 하면 네티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조금 더 깊어질 것 같기도 하다.

    “장로님. 제 언니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그러자 장로는 약간 서글픈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는 어렸을 적부터 겁이 참 많았지. 툭하면 울음을 참지 못하고 목 놓아 울어 버렸어. 그런 주제에 머리는 똑똑해서 무서운 것을 보면 그것을 오래도록 기억하며 무서워했단다.]

    장로는 이곳으로 피난을 오기 전부터 네티와 그녀의 언니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이웃인 듯했다.

    그녀는 오래 전의 기억을 회상하는 듯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몇 분 일찍 태어난 네 쌍둥이 언니 ‘베티’는 너와 정 반대인 성격이었어. 머리는 그리 똑똑하지는 못했지만 겁이 정말 없었지. 언제나 동네의 골목대장이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겁 많은 너를 지켜주겠다면서 부러 씩씩한 척 굴었던 것 같기도 하구나.]

    “아아. 그랬나요?”

    [그럼. 베티는 조금 바보 같은 면이 있었지만 마음씨는 참 부드러웠으니까. 언젠가는 무서운 동화를 읽고 그것이 자꾸 생각난다며 우는 너를 위한답시고 손바닥으로 머리를 몇 번이고 세게 내리친 적도 있었지. 호호호. 제 딴에는 머리에 충격을 줘서 네 나쁜 기억을 까먹게 해 주고 싶었나 봐.]

    “아하하. 귀엽네요. 하지만 소용없었겠군요.”

    [당연하지. 오히려 머리에 혹이 난 네가 더 큰 소리로 우는 바람에 둘 다 야단만 맞았단다. 호호호.]

    말을 마친 장로는 잠시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윤솔을 꼭 끌어안았다.

    [네가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을 보니 베티 역시도 어딘가에 건강하게 살아 있을 거란다. 너무 걱정하지 마렴.]

    장로의 말을 들은 윤솔은 마음의 어딘가가 무거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천사 소녀 네티는 이미 죽었다는 것을.

    처음 네티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지저 깊이 파묻혀 죽어 있었고 지금 그녀의 몸을 조종하는 존재는 윤솔이다.

    “…….”

    윤솔이 네티의 끝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사실에 침울해하고 있자, 장로는 손을 뻗어 가만히 윤솔의 손을 덮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얘야. ‘하얀 불꽃’이 우릴 지켜 줄 거란다.]

    …하얀 불꽃?

    윤솔은 불현듯 뇌를 스치는 기억에 몸을 떨었다.

    그것은 네티의 기억이 아니라 윤솔의 기억이었다.

    미궁 속 시커먼 배드엔딩을 상대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던 ‘하얀 불꽃’

    그를 뒤에 남겨 두고 오며 얼마나 불안하고 죄스러웠던가.

    혹시 장로는 그 노인을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장로님. 사실 제가 미궁에서 웬 할아버지를…….”

    윤솔이 막 ‘하얀 불꽃’에 질문하려 할 때.

    콰-쾅!

    어디선가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땅이 진동하고 욕탕의 물이 흘러넘친다.

    동시에, 저 먼 망루에서 보초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다! 배드엔딩들이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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