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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275화 (275/1,000)
  • 276화 실락원(失樂園) (2)

    […옛말에 고리 없는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라는 말도 있지.]

    장로가 날갯짓을 하자 근처에 있던 천사들이 창을 꼬느고 우리를 포위했다.

    눈앞에 선택지가 떴다.

    <싸운다> / <도망친다> / <항복>

    “거, 등에 날개 좀 없고 머리에 고리 좀 없다고 너무하는군.”

    “천사들 입장에서는 그게 머리가 없거나 궁둥이가 없는 것으로 보이나 보지 뭐.”

    “그런 느낌인가? 알았다.”

    내 말을 들은 드레이크는 체념한 표정으로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항복> 선택지를 고른 셈이다.

    특이하게도 천공섬의 메인 퀘스트에서는 알림음이나 퀘스트 표시가 따로 뜨지 않았다.

    마치 퀘스트 자체를 숨기려는 듯한 철저한 움직임.

    한편.

    윤솔은 안절부절 못하는 느낌이다.

    겉은 천사족의 어린아이 ‘네티’의 몸을 하고 있지만 속은 여전히 윤솔 본인이었으니까.

    엄밀히 말하면 천사 소녀 네티는 지상에 떨어진 시점에서 이미 죽어 있었다.

    지금 이 소녀의 몸이 움직이는 것은 아카식 레코드의 관리자인 불똥정령의 힘에 의해 윤솔의 영혼이 네티의 몸에 빙의했기 때문이다.

    “어진아. 괜찮은 거야?”

    윤솔은 불안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아무 문제없다는 듯 웃어보였다.

    “당분간은 별일 없을 거야.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괜찮아.”

    “……그래두.”

    “우린 걱정 말고 좀 쉬고 있어. 이 섬 생각보다 볼 게 많은 곳이니까 구경하는 재미가 있을 거야.”

    내가 윤솔을 달래고 있을 때.

    제한시간이 모두 지났다.

    남길 말을 모두 남길 만큼의 충분한 시간이 지나자 장로가 명령을 내렸다.

    [저놈들을 당장 감옥에 가둬!]

    가차 없게 들리는 목소리이지만 실제로는 충분히 대화할 시간도 줬고 결정할 시간도 줬다.

    여차하면 도망갈 여지까지 줬었으니 오히려 상당히 친절한 셈이다.

    우리는 천사 경비병들에게 두 손을 묶였다.

    [음, 인간은 머리 위에 고리가 없으니 어찌 묶나?]

    […이런, 적을 생포해 본 일이 있어야지.]

    [악마는 그냥 죽이기만 한 터라서 생포하는 법은 잘…….]

    원래 천사들이 서로를 포박할 때에는 두 손과 고리를 묶는 모양이지만, 우리의 머리 위에는 고리가 없으니 포승줄을 어디에 걸어야 할지 난감한 모양이다.

    천사들은 한동안 쩔쩔매다가 결국 우리의 두 팔과 목을 한데 묶어 놓았다.

    그리고는 등을 창으로 콕콕 찌르며 마을 구석의 최외곽으로 향했다.

    감옥으로 이동하는 동안 나는 천사 경비병들에게 이것저것 말을 붙였다.

    “이봐. 이름이 뭐야?”

    [흥! 천사들이 진명을 그리 쉽게 알려 줄 것 같나? 내 이름은 레오나르도지만 절대로 네놈에게 그것을 말해 주지 않을 것이다.]

    “옆에 있는 친구들 이름은 뭐고?”

    [흥! 각각 라파엘, 미켈란젤로, 도나텔로지만 네놈이 그것을 알게 되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름을 함부로 알려 주지 않거든. 더욱이 너 같은 외부인에게는 말이다.]

    피자를 좋아할 것 같은 이름들.

    기본적으로 천사 같은(?) 마음씨를 가진 이들이라서 그런가 대답하는 족족 친절하게 답변이 돌아온다.

    드레이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츤데레들인가? 천사니까 천데레?”

    “이 마을의 젊은 천사들이 좀 순진한 구석이 있지. 기본적으로 거짓말을 잘 못하거든.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세대이기도 하고.”

    나는 천사들에게 다시 물었다.

    “아까 우리 보고 배드엔딩이라고 하던데. 배드엔딩이 뭐지?”

    그러자 파란 머리띠를 하고 있는 천사 레오나르도가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도 많군. 어차피 네놈들은 이게 마지막이니 특별히 말해 주마.]

    “그래, 그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말해 봐.”

    [배드엔딩은 비교적 최근에 천공섬에 출몰하기 시작한 괴물들이다. 원래 천공섬에는 다양한 생태계를 가진 몬스터들이 존재했는데 저 배드엔딩이라는 괴물들이 나타나면서 섬의 토착 생태계는 멸종했지.]

    “음, 원래 천공섬에 서식하는 고유한 종이 아니라는 건가?”

    [그래. 우리는 저 괴물들의 기원과 역사에 대해 알지 못한다. 우리가 어릴 적만 하더라도 저런 것들은 없었는데…어느 날부터 갑자기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어.]

    레오나르도는 계속해서 설명에 설명을 이었다.

    [원래 이 거대한 미궁도 갑자기 생겨난 배드엔딩들을 격리시켜 놓기 위해 황제가 직접 만든 것이다.]

    “황제가?”

    [그렇다. 미치기 전만 해도 그는 훌륭한 군주였지. 악마들의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성역(聖域)을 지키는 고결한 존재였어. 이제는 아니지만…….]

    레오나르도의 설명은 비교적 간단했다.

    이곳 천공섬은 악마와의 전쟁에서 패해 거의 멸종되다시피 한 천사족들의 마지막 아지트인 셈이다.

    그들은 이곳에 숨어 악마들의 눈을 피해 근근이 명맥만을 이어 가고 있는 터였다.

    [그러던 차에 일이 터졌다. 황제가 미쳐서 폭주하기 시작했지.]

    “폭주?”

    나는 계속해서 레오나르도의 말에 맞장구치듯 리액션을 보였다.

    그러자 레오나르도는 자연스럽게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신탁에 의하면 어린 아이들에 의해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더군. 그래서 황제는 새롭게 태어난 모든 어린 아이들을 지하감옥에 가두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지하감옥에? 미쳤군.”

    [미친 거지. 거대한 미궁을 만드느라 힘을 거의 다 소진한 시점이라서 그랬을지도 모르겠군. 그토록 현명하고 자애롭던 황제가 어찌 그런 미치광이가 되었는지…. 휴. 악마의 꾐에 속아 넘어가기라도 한 것일까?]

    “…그래서, 아이들을 지하감옥에 가둬서 어쨌는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아이들을 삶아서 고기로 만들어 먹는다는 말도 있고, 그 피를 욕조에 받아서 목욕을 한다는 말도 있고…아무튼 끔찍한 소문들 뿐이다.]

    “그걸 그냥 참고만 있었나?”

    [어쩔 수 없었다. 황제는 강해. 모든 천사들이 다 덤벼들어도 이길 수 없다. 우리들 역시 황제의 마수를 피해 미궁으로 도망쳐 이곳에 마을을 형성하는 것이 고작이었어.]

    배드엔딩들을 격리하기 위해 만든 미궁이라면 추격자들도 오지 않을 것이다.

    도망친 천사들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침중한 안색으로 말했다.

    [하지만 도망에 성공한 이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우리는 이곳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지.]

    “기다린다고? 누구를?”

    [우리들의 아들, 딸. 황제의 지하감옥으로 끌려갔던 아이들이 돌아오기만을 말이야.]

    “무슨 소리야? 아이들은 지하감옥에 갇혔다며? 너희들은 이곳 미궁 안으로 도망쳤고. 그런데 아이들이 어떻게 감옥을 빠져나와 이 마을을 찾아와?”

    내가 묻자 레오나르도는 또다시 친절하게 대답했다.

    [구세주가 있다.]

    “구세주?”

    [왕성 안에 우리와 내통하는 분이 계셔. 그분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하감옥에 갇힌 아이들을 조금씩 빼돌려 이곳으로 보내 주시지. 이 마을 사람들은 그 아이들 틈에 자신들의 자식이 있을까 기대하며 매일매일을 살아간다.]

    마치 ‘쉰들러 리스트’ 같은 느낌이다.

    미치광이 황제 편인 척을 하며 몰래 아이들을 탈옥시켜 주는 남자라.

    나는 다시 물었다.

    “그 ‘내통자’가 누구인데?”

    그 말에 레오나르도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은 절대로 말해 줄 수 없지. 참고로 너희와 같이 왔던 네티 역시도 그분에 의해 지하감옥에서 구출되어 이곳 마을로 온 아이였다.]

    순간, 그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던’ 아이였지. 지하감옥을 탈옥해 우리 마을로 오던 도중 배드엔딩들의 습격을 받는 바람에….]

    네티, 지금의 윤솔의 몸이 된 소녀.

    그녀는 무슨 연유로 지하감옥을 탈옥해서 이곳으로 오던 중 사라졌을까?

    우리가 그녀를 발견한 곳은 까마득히 아래에 있는 지상, 그것도 그 지상으로부터 2만 미터는 더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 ‘어비스 터미널’이다.

    과연 그 작은 소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왜 이곳에서 4만 미터나 아래에 있는 곳에 떨어져 죽어 있던 것일까?

    “당최 알 수가 없군. 이런 알쏭달쏭한 퀘스트는 처음이야.”

    드레이크는 고개를 저으며 투덜거렸다.

    그때.

    레오나르도가 고개를 돌렸다.

    둥- 둥- 둥- 둥-

    멀리서 북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감옥이 있는 언덕 저 아래에서는 수많은 천사들이 모여 횃불을 든 채 어떤 의식을 하고 있었다.

    그곳은 무덤가처럼 보이는 지형이었는데 무덤 위에는 영롱한 고리들이 놓여 있다.

    천사들의 머리 위에 달려 있던 엔젤 링이었다.

    봉긋 솟아오른 봉분 위로 흰 연기 같은 것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것들은 엔젤 링의 가운데를 통과해 하늘로 올라가 구름과 섞여든다.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이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레오나르도는 그 비를 맞으며 슬픈 얼굴로 말했다.

    [저것은 장례식이다. 배드엔딩들의 습격에서 죽은 이들의 무덤이지. 천사는 죽으면 곧바로 구름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비가 되어 다시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구름이 되고, 비가 되고, 흙이 되는 것이 우리들의 숙명이고 기쁨인 것이야.]

    “아니, 그건 안 물어봤고. 그래서 그 내통자라는 게 누구냐고…!”

    나는 다시 답을 재촉했다.

    그러자 레오나르도는 과연 천사답게 또다시 대답을 준비한다.

    [어허, 그것만은 말해 줄 수 없다고 했지 않나! 그분의 존함이 ……인 것만은 말해 줄 수 없…!]

    하지만 때마침 굵어지기 시작한 빗줄기 때문에 레오나르도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쏴아아아아…

    때마침. 우리는 감옥에 당도했다.

    감옥은 언제든 탈옥할 수 있게끔 굉장히 친절한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깊은 흙구덩이를 판 뒤에 튼튼한 나무막대기로 #자 모양을 만들어 덮어 준 것이 고작이었으니까.

    “이런 천사 같은 감옥이라니.”

    나와 드레이크는 얌전히 토굴 속에 수감되었다.

    빗물이 좀 차오른다는 것만 빼면 나름 괜찮은 감옥이다.

    나는 감옥의 뚜껑 사이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드레이크에게 물었다.

    “드레이크. 아까 내통자의 이름 들었어?”

    “나는 들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드레이크는 그 와중에 빗소리를 뚫고 레오나르도의 말을 들은 모양이다.

    나는 토굴 속으로 기어 들어가 빗물이 차오르지 않는 구역에 벌렁 드러누웠다.

    드레이크 역시 나를 따라 그렇게 했다.

    그는 누운 채로 내게 물었다.

    “감옥이 굉장히 허술해 보이는데.”

    “맞아. 원하면 언제든 부수고 나갈 수 있지.”

    “언제쯤 나갈 텐가?”

    “조금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아. 현재로서는 여기만큼 안전한 곳이 또 없거든.”

    안전하다고?

    내 말을 들은 드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위험한 상황이 닥치는 모양이군. 이 마을에.”

    “맞아.”

    나는 과거 북대륙의 바다를 여행할 당시 탑승했던 ‘악마의 만찬’ 호를 떠올렸다.

    가장 춥고 비린내 나는 배 밑 어창이 1등석인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 지금, 이 축축하고 깊은 토굴이 로얄석인 이유도 있는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지금 동료 한 명이 이 로얄석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것?

    윤솔.

    그녀는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마을에서 가장 안락하고 편안한 곳으로 안내되었다.

    ‘…늦지 않아야 할 텐데.’

    나는 비 새는 토굴에 갇힌 채 오히려 그녀의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곧 다가올 파국(破局)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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