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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274화 (274/1,000)
  • 275화 실락원(失樂園) (1)

    ‘…이거 싸움이 길어지겠는데.’

    나는 시선을 흘끗 돌려 벽에 매달린 꿀열매들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배드엔딩 나이트메어 폼, 일명 ‘스마일’은 벽에 매달린 꿀열매를 먹어 가며 체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꿀열매.

    전 세계를 통틀어 단 두 군데의 땅에서만 자라나는 금단(禁斷)의 과실.

    스마일은 아마 이 미궁의 꿀열매들을 혼자 다 먹어치워서라도 나에게 저항할 모양이다.

    ‘여차하면 이곳 꿀열매 군락을 모두 없애 버려야….’

    나는 드레이크에게 눈짓했다.

    내가 스마일을 막는 동안 일정 구역 안에 존재하는 모든 꿀열매들을 말살시켜 버릴 생각이었다.

    장기전에 대비하는 것이다.

    하지만.

    콰콰콰쾅!

    뜻밖의 일이 일어나는 통에 나는 계획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새하얀 불꽃이 스마일의 몸을 태우며 밀어 내고 있었다.

    […괜찮은가?]

    벽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아주 늙은, 그러나 묵직한 음성이었다.

    “……!”

    나와 드레이크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벽 위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흰 모자와 로브로 전신을 가리고 있는 노인이었다.

    쪼글쪼글한 주름과 길고 풍성한 턱수염은 마치 오래된 신화에 나오는 대마법사를 연상케 했다.

    사실 외견대로 본 게 맞다.

    그는 실제로 마법사였으며 이를 증명하는 듯 양손에는 마도서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탁!

    그는 높은 벽 위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했다.

    꽤나 높은 곳에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옷매무새에 아무런 흐트러짐도 없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등에는 커다란 흰 날개가 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심지어 머리 위에는 신성해 보이는 고리까지 떠 있었다.

    누가 봐도 천사족, 윤솔과 연관이 있는 존재였다.

    [이곳은 내가 맡겠다. 물러나서 살 길을 찾으라, 젊은이들이여.]

    마법사는 허리춤에서 하얀 칼을 빼 들었다.

    그리고 반대쪽 손에 든 하얀 마법서를 높게 들고 주문을 외쳤다.

    “Thermal Dome!”

    그가 마법서를 덮자 또다시 새하얀 순백의 불길이 타올라 눈앞에 있는 스마일을 태우기 시작했다.

    [오-오오오오!]

    꿀열매를 닥치는 대로 따먹던 스마일은 시커먼 손을 휘저어 하얀 불길을 걷어냈다.

    하지만 흰 불길은 일반적인 빨간 불길보다 훨씬 더 뜨겁고 훨씬 더 끈적한 것이었다.

    쿠르르르륵-

    불길은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스마일을 태운다.

    하얀 마법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비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얼른 가라! 아무리 나라도 이 녀석을 상대로는 오래 못 버틴다!]

    “……!”

    나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멍한 표정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곧바로 자리에서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그런 내 옆으로 드레이크와 윤솔이 따라붙었다.

    “어진! 저 자는 누구지? 설마 플레이어인가?”

    나는 드레이크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런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정신 차리고 보니까 NPC네.”

    “역시 그렇지? 우리보다 빨리 온 이가 있을 리 없으니.”

    나와 드레이크는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미궁을 달렸다.

    한편.

    “…….”

    내 등에 업힌 윤솔은 아까부터 계속 말이 없다.

    “왜 그래?”

    내가 고개를 돌려 묻자, 윤솔은 어두운 안색으로 물었다.

    “이렇게 다 떠맡기고 도망쳐도 괜찮을까?”

    “왜? 어차피 NPC인데.”

    “아니. 그냥…어딘가 마음이 무겁고 막 그러네. 뭔가, 소중한 사람을 유기하는 것 같은 죄책감이…….”

    나는 손사래를 쳤다.

    NPC에게 과몰입하는 것은 가상현실 게임의 초보자들이 흔히 하는 실수이다.

    “괜찮아. NPC일 뿐이야. 그들의 입장에 너무 몰입하면 게임 플레이가 힘들어져.”

    “…그렇겠지?”

    윤솔은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작아지는 하얀 마법사를 돌아보았다.

    콰쾅! 쿠르르륵!

    멀리서 들려오는 폭발음은 몇 개의 벽과 계단을 넘어가자 이제 완전히 들리지 않게끔 되었다.

    …전투가 생각보다 길었기 때문일까?

    어느덧 날이 깊게 저물고 있었다.

    *       *       *

    한참 동안을 걸어서 되돌아온 끝에, 우리는 0세대 캡슐이 가진 버그의 힘으로 미궁을 탈출할 수 있었다.

    끼기기긱-

    미궁의 끝에 있던 커다란 벽이 윤솔의 힘에 의해 천천히 움직인다.

    천사족만 열 수 있는 거대한 벽이 두 조각으로 갈라지며 그 안쪽으로 통하는 입구를 열어 주었다.

    벽 너머로 보인 광경은 놀라운 것이었다.

    “…와아!”

    윤솔은 눈앞에 펼쳐진 몽환적인 풍경에 탄성을 질렀다.

    굵은 나무뿌리에 휘감겨 있는 통나무 오두막, 커다란 버섯의 내부를 파서 만든 집, 커다란 견과류의 껍데기로 만들어진 집 등등….

    다양한 재료와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집들이 도처에 가득하다.

    어스름하게 빛나는 버섯들이 밝히고 있는 길에는 시원하고 촉촉한 이끼들이 덮여있었고 곳곳에는 부드러운 진흙과 자갈이 깔렸다.

    그리고 그것들의 주위로는 맑은 물이 굽이굽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이 작은 마을은 미궁의 가운데에 만들어진 것으로 주변은 온통 높고 험한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모든 벽의 아래에는 넝쿨들이 수북했고 그 밑에는 수목들이 빼곡하게 자란다.

    그리고 마을을 구성하고 있는 집들은 그 나무들의 뿌리나 줄기 사이에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사아아아…

    저 멀리, 구름이 물로 변해 벽을 타고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강은 마을 중심부로 흘러내려 온다.

    곳곳에서 버섯들이 야광빛으로 반짝거리는 포자를 뿜어낼 때면 밤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이 환하게 밝아지곤 했다.

    “…진짜 예쁘다. 세상에 이렇게 예쁜 마을이 존재한다니.”

    윤솔은 작은 은하수처럼 눈앞을 지나가는 버섯 포자들을 향해 감탄했다.

    그리고는 상기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 게임 진짜 힐링된다! 사람의 상상력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

    그리고, 나는 윤솔의 말에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사람의 상상력은 정말 대단하지. 곧 알게 될 거야.”

    “…응?”

    윤솔은 나를 향해 고개를 갸웃한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단호하게 일축했다.

    “…이곳이 절대 힐링이 되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서웠다.

    아름다운 마을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나무 뿌리 밑, 혹은 집 담벼락 뒤, 커다란 버섯의 갓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사람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등에 하얀 날개가 달렸고 머리 위에 신성한 고리가 떠 있다는 것이다.

    이곳이 바로 천사들의 마을이었다.

    한편.

    천사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쟤 걔 아니야?]

    [맞네, 맞아. 그때 그 아이야.]

    [아니, 대체 어떻게 살아 돌아온 거지?]

    그들은 겁먹은 표정으로 웅성거릴 뿐이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다가오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천사들은 쭈뼛쭈뼛거리며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탁!

    우리의 뒤로 돌아와 맨 뒤에서 걷던 윤솔을 끌어안고 저 멀리 도망친다.

    “어엇!?”

    윤솔이 버둥거렸지만 아이의 몸이 되어 있는지라 소용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납치당했다.

    “…뭐야?”

    드레이크는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천사들은 윤솔을 끌어안고 저 멀리 가 버렸다.

    그리고는 저마다 모여들어 윤솔을 위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구, 이 길 잃은 어린양.]

    [이 어린 아가가 얼마나 무서웠을꼬!]

    […이젠 괜찮다. 돌아왔으니 이젠 괜찮아.]

    따듯한 말로 윤솔을 위로하는 천사들. 적의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윤솔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녀를 위로하는 천사들의 모습은 실로 자애로운 것이어서 보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천사들이 나와 드레이크를 바라보는 시선은 윤솔을 대할 때와는 그야말로 180도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함께 온 저것들은 뭐지?]

    [추악해. 등의 날개도, 머리 위의 고리도 없어.]

    [미궁 밖에서 왔어. 불결하고 불길해! 배드엔딩의 다른 형태인 것이 분명해!]

    천사들은 우리를 벌레 보듯 보고 있었다.

    아, 저런 혐오에 가득한 표정 오랜만이네.

    이윽고.

    […웬 소란이냐!?]

    마을 고위직의 전형적인 대사와 함께 꼬장꼬장해 보이는 노파가 등장했다.

    그녀 역시도 희고 풍성한 날개와 머리 위의 신성한 고리를 지녔다.

    등이 굽어 있어 키가 작고 몸집도 왜소했지만 뿜어져 나오는 신성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천사족 장로>

    NPC의 직함으로 봐서는 그녀가 이 천사 마을의 수장인 듯싶다.

    한편.

    장로는 윤솔을 보더니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에그머니나! 이 가엾은 것이 돌아왔구나! 오오! 이것은 기적이다!]

    장로는 한없이 따듯하고 자애로운 눈빛과 손길로 윤솔을 보듬어 안았다.

    [이제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거라. 우리가 너를 지킬 것이다. 두 번 다시는 같은 일을 겪지 않도록…….]

    어딘가 슬퍼 보이는 목소리.

    윤솔은 어리둥절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머릿속에 있는 네티의 기억이 동영상으로 재생되고 있는 것이다.

    ‘믿어도 좋은 사람들.’

    윤솔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기에 있는 모든 NPC들은 자신에게 우호적이라는 것을.

    하지만.

    나와 드레이크는 예외였다.

    [여기 있는 두 마리는 미궁 밖에서 왔으니 수상하다. 옛말에 고리 없는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라는 말도 있지. 혹여나 배드엔딩들이 교활한 속임수로 침투해온 것일 수 있으니 당장…!]

    장로는 마을 곳곳에 있는 창과 화살을 가리키며 외치다가 잠시 멈칫했다.

    이내, 그녀는 말을 바꿨다.

    [지금은 신성한 의식 기간이니 피를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일단은 감옥에 가둬라!]

    묘하게 설명조인 판결이었지만 일단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차차착-

    몇몇 건장한 천사들이 창을 들고 우리를 포위했다.

    드레이크는 인상을 찌푸렸다.

    “If goodwill continues, people consider it the right. 어떻게 나오는가 참고 봐줬더니 정도를 모르는군.”

    그는 마름쇠와 쇠뇌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탁-

    나는 그런 드레이크를 만류했다.

    “일단은 이들의 결정에 따르는 게 맞아.”

    “……!”

    척하면 척이다.

    나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온 드레이크는 내 흥미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바로 눈치 챘다.

    바로 천사들의 ‘감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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