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273화 (273/1,000)
  • 274화 배드엔딩(Bad Ending) (4)

    일명 ‘스마일’, 위험등급 A+.

    배드엔딩 중에서도 극히 찾아보기 힘든 ‘나이트메어 폼’으로 그 힘은 천공섬 안에서 적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와 강력한 물리공격력.

    비록 마법 저항력은 낮은 편이라지만, 우리 중에는 공격 마법을 쓸 수 있는 이가 없으니 상대하기 난감하게 되었다.

    콰쾅!

    스마일은 솥뚜껑처럼 커다란 손바닥을 휘둘러 지형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드레이크는 제 역할을 못 하는 마름쇠들을 전부 회수했다.

    그리고는 씹어 내뱉듯 외쳤다.

    “어진! 저 자식, 우리 힐러를 노리고 있다!”

    나는 드레이크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맞다.

    스마일의 AI는 실로 교활하기 그지없다.

    놈은 우리 파티와 교전하는 그 짧은 순간, 가장 많은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방법을 수백만 가지의 패턴으로 분석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겠지.

    ‘힐러를 잡아라!’

    원래 모든 파티의 핵심은 ‘버퍼’나 ‘힐러’ 등의 서포터들이 아닌가?

    공격력이 올라가거나 속도가 빨라지는 ‘버프(Buff)’, HP나 MP를 회복 시켜 주는 ‘힐’이 없다면 레이드는 뒷심이 부족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스마일이 나와 드레이크의 뒤에 있는 윤솔을 잡는 데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콰콰콰쾅!

    스마일은 원숭이처럼 펄쩍 뛰어올라 시커먼 손바닥으로 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 파편들을 우리 쪽으로 마구 집어던졌다.

    “피해!”

    급박한 순간, 나는 윤솔을 반대편으로 밀 수밖에 없었다.

    “꺄악!”

    윤솔은 힘없이 밀쳐져 벽에 부딪쳤다.

    하지만 벽의 표면에는 푹신한 담쟁이넝쿨들이 수북하게 덮여 있었기에 그녀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다 알고 민 것이다.

    ‘…죽는 것보다는 놀라는 게 나으니까.’

    나는 이를 악물었다.

    콰콰쾅!

    떨어져 내린 돌무더기들이 나와 윤솔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오-오오오!]

    스마일은 벽을 거꾸로 기어 내려와 넝쿨 밑에 쓰러진 윤솔을 향해 손을 쫙 뻗었다.

    하지만.

    “어허, 나쁜 손.”

    돌무더기를 무시하고 통과한 내가 그 앞을 가로막는다.

    나는 크라켄의 틈 특성으로 돌무더기 사이의 작은 틈새들을 순식간에 빠져나와 버린 것이다.

    우드득!

    나는 손바닥을 들어 스마일의 손목을 후려쳤다.

    낙석에 맞았던 반사 데미지가 터져 나와 스마일의 손목을 90도로 꺾어 놓았다.

    [그륵!?]

    스마일은 화들짝 놀라 손을 뒤로 물렀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깎단을 빼들고 놈의 하복부 깊숙한 곳으로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 찔리면 골로 가는 거야.”

    깎아내는 단말마.

    나의 송곳이 가진 ‘능지처참’ 특성이라면 이놈을 잡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푸욱-

    깎단이 스마일의 검은 피부를 뚫고 그 안까지 틀어박혔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가로로 쭉 그어졌다.

    놈의 시커먼 몸은 암흑 그 자체와도 같았다.

    몸뚱이는 양갱처럼 물렁하면서도 단단했는데 송곳으로 갈랐음에도 불구하고 뼈나 내장이 보이지 않는다.

    …뿌우우욱!

    다만 한참 뒤에 석유와도 같은 시커먼 액체가 뜨겁게 뿜어져 나왔을 뿐이다.

    [오오오오!]

    스마일은 나를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손바닥이 워낙에 큰 탓에 사타구니 사이로 잘 밀어 넣을 수가 없었다.

    나는 재빨리 놈의 꼬리 밑으로 빠져나와 뒤로 달렸다.

    “잡아 봐. 할 수 있으면.”

    내 이죽임을 들은 스마일이 더욱 더 빙긋 웃는다.

    “……?”

    나는 놈을 유인하다가 말고 잠시 자리에 멈춰 섰다.

    스마일은 깎단에 도트 데미지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다만 놈이 향한 곳은…….

    “꺄아아아악!”

    윤솔! 그녀가 있는 방향이었다!

    “미친!? 어그로가 안 끌린 건가!”

    있는 힘을 다해 놈의 주의를 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스마일은 당초 정한 목표를 바꾸지 않았던 것이다!

    실로 교활하고 또 교활한 지능.

    스마일은 모든 것들을 무시한 채 윤솔을 향해 미친 듯이 돌격했다.

    콰쾅! 우지지지직!

    놈은 어느 순간부터는 멈추려 했지만 결국 자기의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벽에 머리를 들이박고 말았다.

    …위에서 넝쿨을 잡고 내려온 드레이크가 아니었더라면 정말로 큰일 날 뻔했다.

    “이래서 배드엔딩들은 골치 아프다니까. 역겨운 것들!”

    드레이크는 윤솔을 등에 업고는 높은 벽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모든 화살을 스마일에게 퍼붓는다.

    퍼퍼퍼퍼펑!

    스마일은 머리 위로 드레이크의 화살세례를 받았다.

    나의 도트 데미지 역시도 착실하게 들어가고 있으니 시간만 투자한다면 레이드는 어렵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르르르륵!]

    놈은 갑자기 진로를 틀었다.

    우지직! 쿠릉…!

    벽을 박차고 튀어 오른 스마일은 등을 보인 채 도망치기 시작했다.

    갈라진 하복부를 한 손으로 부여잡은 채로.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저 자식 ‘뺑소니’ 특성도 있었던가? 잡아야 해!”

    나는 잽싸게 놈의 뒤를 쫓았다.

    윤솔을 등에 업은 드레이크 역시도 나를 따라 뛰어왔다.

    “아, 좀 무겁죠? 잘 부탁드려요.”

    “…음. 아니다. 하나도 안 무겁다.”

    둘은 아직 어색한 사이인 듯하지만, 앞으로 파티 플레이를 많이 해야 하니 이번 기회에 조금 친해졌으면 좋겠다.

    한편.

    나는 스마일을 뒤쫓으며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스마일은 정말 엄청나게 빠르다.

    고인물 모드인 나와 비교해서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의 속도.

    …과연 A+등급의 몬스터답다.

    심지어.

    ‘저 자식……. HP가 점점 회복되잖아!?’

    나는 스마일의 HP바가 점점 길어지는 것을 보며 경악해야 했다.

    후두두두두둑-

    스마일은 도주하는 동안 한 손으로 하복부에서 흐르는 피를 막고 있다.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는 벽의 넝쿨을 쥐어뜯으며 달리고 있었다.

    꿀열매.

    사과 같은 모양새를 한 과실.

    식감은 꿀을 뭉쳐서 건조시킨 듯하다.

    스마일은 벽의 넝쿨들에 주렁주렁 매달린 이 꿀열매를 따먹으며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놈의 HP가 조금씩 차오른다.

    오로지 배드엔딩들에게만 허락된 금단의 열매인 셈이다.

    “그만 먹어라, 이 자식아!”

    나는 있는 힘껏 달려 스마일을 따라잡았다.

    바로 그때.

    파앗!

    놈은 엄청난 기세로 급제동을 한 뒤 옆에 있는 코너를 돌아 벽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이 교활한…!”

    스마일을 따라 방향을 꺾자, 내 눈앞에는 텅 빈 복도가 보인다.

    “……!?”

    나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주변은 온통 꿀열매와 푸른 넝쿨, 그리고 벽과 바닥만이 존재할 뿐이다.

    황당한 마음에 입이 절로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 짧은 순간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내가 잠시 멍을 때리고 있는 순간.

    [오-오오오!]

    저 멀리, 반파된 계단 아래에서 스마일 놈의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이 자식! 저런 곳에 숨어 있었나!”

    꿀열매로 인해 HP가 회복된 상태인 스마일이 나를 피해 숨을 이유는 딱히 없는지라 의아했지만… 일단 소리가 나니 가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돌발 변수를 상대하기에는 나보다 뒤에 있는 드레이크 쪽이 더욱 노련했다.

    “어진! 가면 안 돼! 함정이다!”

    드레이크가 소리쳤지만 약간 늦고 말았다.

    내가 계단 아래를 향해 고개를 뻗는 순간!

    “……!”

    나는 아차 싶어 이를 악물었다.

    당했다.

    무너진 계단 저 아래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스마일이 아니었다.

    [오-오오오오!]

    커다란 입을 벌린 채 피어나 있는 거대한 식물.

    일전에 드레이크가 적어주었던 도감에도 나와 있는 버로우성 배드엔딩의 커다란 몸뚱이가 보였다.

    <배드엔딩 / 일명 ‘성대모사 파리지옥’> -등급: A / 특성: ?

    -습성: 버로우성

    -서식지: 미궁 외곽, X구역 6시 방향.

    -발견일: 0월 X일 03시 11분.

    -커다란 식충식물의 외형을 하고 있으며 큰 입으로 동료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부름.

    혹시나 동료가 있나 싶어 가까이 다가갔다가 한 입 베어 물리기라도 하면 낭패.

    마치 조개나 캐스터네츠처럼 생긴 커다란 식인식물.

    [오-오오오오오오!]

    그것이 나를 향해 입을 벌리고 스마일의 목소리를 따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스마일은 어디에 있느냐?

    […그르르륵!]

    이 교활한 놈은 숨을 죽인 채 내 머리 위 기둥 대들보의 넝쿨에 몸을 파묻고 매복해 있었다!

    콰쾅!

    나는 등을 후려치는 놈의 손바닥에 맞아 식인식물의 입 속으로 떨어져야 했다.

    ‘젠장!’

    나는 속수무책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르르륵…]

    스마일은 나를 내려다보며 기묘한 소리를 냈다.

    아마도 저건 비웃는 소리겠지?

    이내, 놈은 나를 뒤로한 채 몸을 돌려 드레이크와 윤솔이 오는 방향을 향해 달려 나갔다.

    …….

    아니. 달려 나가려 했다.

    ‘하지만 나는 혼자 죽지는 않는다구요.’

    나는 밑으로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 놈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미끄덩-

    스마일은 달려 나가던 자세 그대로 미끄러져 뒤로 자빠졌다.

    혹시 몰라 깔아 둔 씨어데블의 점액.

    나는 ‘마찰계수’ 특성을 이용해 계단과 이어지는 경사로에 미끈거리는 점액을 쫙 뿌려 놓았던 것이다.

    꼼장어나 미꾸라지의 그것처럼 미끌거리는 점액 때문에 스마일은 위로 올라갈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내가 있는 쪽으로 미끄러져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가아아아악!]

    결국. 나와 스마일은 사이좋게 파리지옥 속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쿵!

    파리지옥의 입 속에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그 안에 갇히지 않았다.

    ‘촉수!’

    나는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이 거대한 조개껍데기 모양의 파리지옥은 안쪽 심층부에 세 개의 촉수를 가지고 있다.

    마치 레버같이 생긴 촉수, 그 중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마지막 촉수의 센서까지 충격이 닿아야 조개껍데기 같이 생긴 감옥문 두 개가 닫히는 형식이다.

    만약 이 안에 갇히게 된다면 별 수가 없다.

    그냥 쏟아지는 강산성 용해액 샤워를 24시간 동안 견뎌내는 수밖에.

    ‘으으으, 촉수를 건드리면 안 되는데!’

    표정 관리가 안 된다.

    식인식물이 우리가 제 입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아직도 눈치 채지 못한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저 스마일 놈이 거대한 덩치로 날뛰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꽤나 난감해질 것이다.

    “…….”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눈앞에 쓰러져 있는 스마일을 바라보았다.

    …한데?

    […….]

    어찌된 영문일까?

    스마일 역시도 상체를 슬쩍 일으킨 채 눈치를 보고 있었다!

    “…….”

    […….]

    나와 스마일은 서로를 마주본 채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스윽-

    그저 둘 다 조용히 몸을 일으켜 파리지옥의 입 속을 빠져나갔을 뿐이다.

    가능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살금살금 움직여서 말이다.

    ‘저 자식, 교활한 줄은 알았지만 설마 나랑 똑같이 판단할 줄이야.’

    인공지능, 딥러닝 시스템은 정말로 무섭다.

    ‘배드엔딩 나이트메어 폼’이 왜 일반적인 배드엔딩과는 격이 다르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윽고.

    파리지옥 밖으로 기어 나온 스마일과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팽팽히 대치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까지 뛰어오느라 체력을 꽤 많이 소모했고 스마일 역시 꾸준히 꿀열매를 따먹지 않으면 죽고 만다.

    회귀 이후 처음으로 나를 난감하게 하는 몬스터를 만났다.

    바실리스크나 샌드웜, 어둠 대왕, 씨어데블, 대망자, 지옥바퀴 대왕게, 아귀 메기…그리고 섬에서 마주쳤던 대형 거미나 해저에 드글거리던 괴물들, 공허의 마수들…….

    그동안 숱한 A+등급 몬스터들을 봐 왔지만 이렇게 교활하고 강한 놈은 처음이다.

    패턴도 불규칙하고 변수도 많으며 알려진 정보도 거의 없다.

    ‘…이거 싸움이 길어지겠는데.’

    하지만 길고 힘든 싸움일 뿐, 어차피 이기는 쪽은 나다.

    미궁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손에 넣을 수 있는 꿀열매의 수는 한정되어 있다.

    꿀열매는 24시간마다 리젠되는 오브젝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놈이 저것들을 다 먹고 난 뒤부터는 내 도트데미지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겠지.

    ‘문제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는 것인데…….’

    내가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때.

    콰콰콰쾅!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눈앞에 있는 스마일의 몸이 갑자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

    그것은 나도, 드레이크도, 윤솔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쿠르르르륵…

    스마일은 거대한 화염구에 맞고 뒤로 튕겨나갔다.

    특이하게도, 불꽃은 빨갛지 않고 하얀 색을 띠고 있었다.

    뜨겁지 않았다면 불인 것도 몰랐을 정도로 새하얀 순백의 겁화(劫火)였다.

    동시에.

    우리 파티를 향해 말을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괜찮은가?]

    사람의 목소리.

    이 시점에서 들려왔다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세상에, 우리보다 먼저 천공섬에 도착한 이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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