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배드엔딩(Bad Ending) (3)
천공섬을 빙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메이즈.
이 미궁들은 극도로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어지간한 사람은 광활한 넓이와 복잡함에 질려 진입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
악마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천사들이 숨어 사는 곳이니 당연히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진입 난이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미궁이 무서운 이유는 단지 길을 알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다.
미궁 안에 존재하는 독자적인 생태계.
길이 복잡한 것과는 별개로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이 미궁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는 것이 이 미궁을 더욱 더 살벌하게 만든다.
‘배드엔딩(Bad Ending)’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몬스터들.
이 괴물들 역시 미궁에 갇혀 나가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놈들은 이 미궁 속에 독자적인 생태계를 형성한 채 저마다 은신처, 아지트, 영역을 설정해 두었다.
따라서.
미로는 길을 알 수도 없을 만큼 복잡하거니와 설사 길을 안다고 해도 괴물들의 영역과 겹친다면 진입이 불가능하기에 공략 난이도가 훨씬 더 상승하는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이 바로 그렇다.
“젠장. 더럽게 물렸군.”
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들었다.
지금 우리 파티의 앞을 막고 있는 배드엔딩(Bad Ending)은 지금까지 나타났던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놈이었다.
[…….]
말없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괴물.
그 모습은 실로 단순하게 생겼다.
덩치가 커다란 사람의 형상.
하지만 전신이 시커먼 암흑으로 뒤덮여 있고 몸에 비해 두 팔이 비정상적으로 길다.
마치 날렵한 체형의 거신병을 보는 듯한 느낌.
손바닥은 몸통 전체를 덮을 수 있을 정도로 컸고 등이 약간 굽어 있어 자세만 놓고 보면 마치 겨우 이족보행에 성공한 유인원을 보는 듯했다.
특이하게도 목이 상당히 길었는데 그 긴 목을 앞으로 쭉 뻗고 부엉이처럼 고개를 좌우로 갸웃갸웃 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기괴하다.
‘불쾌한 골짜기’ 효과 때문일까?
인간과 비슷한 그 모습이 어쩐지 묘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무엇보다, 얼굴에는 몸의 색깔과는 전혀 대비되는 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민둥민둥한 가면 위에는 성의 없는 낙서처럼 그려진 스마일 표시가 보인다.
붉은 피로 찍힌 두 개의 점이 눈, 대충 그려진 곡선이 입.
보는 이를 불쾌하게 만드는 ‘미소(smile)’였다.
<배드엔딩 나이트메어 폼(Bad Ending Nightmare form) / 일명 ‘스마일’>
-등급: A+
-특성: ?
-습성: 배회성
-서식지: 미궁 심장부, D구역 4시 방향.
-발견일: 0월 0일 04시 44분.
-…일반적인 형태의 배드엔딩과는 뭔가 다른 것 같다.
지금까지 출몰했던 모든 배드엔딩들을 압도하는 등급과 피지컬.
존재 자체가 불길한 배드엔딩의 등장이다.
드레이크는 멍한 표정으로 눈앞에 출몰한 배드엔딩을 바라보았다.
“…나이트메어 폼? 위험등급이 A+이라고?”
기가 막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등급의 배드엔딩.
심지어 ‘나이트메어 폼’이라니?
이런 불길한 수식어까지 붙어있다는 것은 눈앞의 몬스터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으레 ‘네임드 몬스터’들은 일반적인 다른 몬스터들이 비해 압도적으로 강하게 설정되어 있으니 말이다.
스윽-
드레이크는 자세를 낮추고 몸을 뒤로 뺐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가 눈에 들어온다.
‘기어 다니는 무사’
강력한 피지컬을 가진 고등급의 배드엔딩.
포악한 성질머리와 엄청난 근성으로 드레이크를 몇 번이나 궁지에 몰아넣었던 호적수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런 녀석이 ‘스마일’의 일격에 허리가 동강나 즉사했다.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거지?”
드레이크는 경악한 표정으로 눈앞의 스마일을 바라보았다.
향하는 곳을 알 수 없는 저 섬뜩한 미소.
정체를 모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부담스러웠다.
…한편.
“으음, 드디어 만났군. ‘스마일’.”
적의 정체를 알고 있는 나조차도 부담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놈이 단순히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미궁 속에 흐르는 공기가 바뀌었다.
주변 온도가 몇 도나 낮아지고 다른 배드엔딩들이 멀리서 내던 잡음들도 싹 사라졌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이놈의 등장에 숨을 죽이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놈의 등장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이놈이 나타났다는 것은 우리가 올바른 루트로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
나는 눈앞의 스마일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온통 암흑으로 물든 몸뚱이.
우리를 향해 짓고 있는 저 섬뜩한 미소. 게다가 위험 등급 ‘A+’라는 살벌한 표기까지.
과연 ‘미궁의 악몽’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괴기스러움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놈을 악명 높게 만드는 것은…
콰쾅!
이렇게 주먹 한 방, 한 방으로 만들어 내는 미친 자연재해이다.
스마일이 한번 커다란 손을 휘젓자 주변의 미궁 벽들이 망치에 맞은 두부처럼 퍽퍽 박살났다.
기둥과 벽, 계단 등 모든 건축물들이 붕괴했고 땅이 뒤집어진다.
A급 몬스터 중에서도 개체값 최상위권의 피지컬을 자랑하던 ‘기어 다니는 무사’가 일격에 죽었으니 그 흉악함은 굳이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하리라.
놈의 물리공격력은 동급 몬스터인 샌드웜을 맨손으로 찢어죽일 정도로 강력하다.
그러니 무조건 피하는 것이 상책!
“제길! 어디서 이런 게 튀어나와가지고는… 멀리 떨어져라!”
드레이크는 스마일을 향해 마름쇠를 뿌렸다.
차차차착!
스마일의 발밑에 뾰족한 마름쇠와 압정들이 가득 깔렸다.
하지만.
[오-오오오!]
스마일은 바닥에 깔려 있는 마름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들었다.
퍽! 퍼퍽! 푹!
마름쇠가 스마일의 발바닥을 뚫고 박혀들었지만 놈은 통증 따위는 전혀 느끼지 않는 듯했다.
“…헉!?”
오히려 놀란 쪽은 드레이크였다.
분명 마름쇠 데미지가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놈은 마나 사용이나 특성 발현에 있어서 전혀 제약이 없는 것 같다.
마치 마름쇠의 효과를 전부 무시하는 듯한 광경!
나는 드레이크에게 조언을 했다.
“저놈을 상대로는 지형 데미지가 거의 먹히지 않아.”
“…뭐라고? 그게 가능한가?”
“가능하지. ‘까먹음’ 이라는 특성 때문이야. 저놈은 모든 지형 효과나 데미지를 반감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는 저 특성이 얼마나 성가시고 귀찮은지 모른다.
지진이나 와류 등 자연재해 특성이 주요 공격스킬인 마동왕에게는 천적이나 다름없는 카운터 특성.
어지간한 몬스터는 발가락도 못 움직이게 봉쇄해버리는 드레이크의 마름쇠 역시도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콰콰콰쾅!
스마일은 엄청난 속도로 도약해 내가 서 있던 땅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놀랍게도, 스마일이 손바닥으로 내려친 곳의 땅은 움푹 파이더니 그대로 밑으로 쑤욱 꺼져 버렸다.
우르르릉…
깊은 구멍이 생기며 저 아래로 하늘이 들여다보인다.
바닥이 무너져 저 아래 지상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으음. ‘까먹음’ 특성은 지형의 효과나 데미지를 무시… ‘비행’ 특성이 있는 천공섬의 지형까지도 변화시키는 것인가.”
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지형을 무시하는 힘은 상당한 위력을 발휘한다.
이렇게 까마득한 창공 위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공격 패턴은 단순했지만 여러모로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이었기에, 우리는 일단 뒤로 피했다.
윤솔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이러다가 저 괴물이 섬을 다 무너뜨리면 어떻게 하지?”
“이 섬이 얼마나 큰데 저놈 하나에게 무너지겠어. 파리 한 마리가 유조선을 침몰시키는 게 빠를 거야.”
“그래도 시간만 있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맵은 24시간마다 복구되니까 걱정 마.”
나는 윤솔을 등에 업고 드레이크를 돌아보았다.
“저놈은 지금 잡으라고 만든 몬스터가 아니니까… 일단 피하자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드레이크는 언제나 그렇듯 내 의견에 이의가 없다.
나는 스마일을 피해 앞으로 내달렸다.
0세대 캡슐의 버그가 네비게이션처럼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흰 선으로 표시된 금을 따라 달리자 이내 눈앞에 거대한 벽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본 윤솔이 눈을 반짝였다.
“기억의 파편 속에서 봤어! 천사족만이 열 수 있는 문이야!”
“맞아. 네가 손바닥을 대야 열릴 거야.”
내가 달리는 것을 멈추자 윤솔이 부리나케 벽으로 달려가 두 손을 뻗었다.
지이이잉-
윤솔의 손이 닿자 벽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벽에 주렁주렁 늘어져 있는 넝쿨들이 저절로 길을 터 준다.
벽이 마치 커튼처럼 둘로 갈라지며 내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것!
“어어어, 너무 느리게 열리는데 이거?”
윤솔은 실날 같이 벌어진 벽 사이의 틈을 보며 외쳤다.
아마 사람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몇 분은 걸릴 듯싶다.
그리고 이 점은 나도 미처 예측하지 못한 변수였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공략을 위키로 배우니 이런 문제가 생기는군.’
이런 디테일한 점들은 미처 기억하지 못했다. 파이오니아들의 인터뷰에서도 찾아보지 못했던 것들이다.
“그렇다면 문을 열고 도망치는 것은 기각.”
나는 빠르게 단념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뒤의 스마일을 바라보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가 없다.
‘난이도 조절 실패’, ‘밸런스 붕괴’라는 악명으로 자자한 배드엔딩 ‘스마일’
놈은 분명 잡으라고 만든 몬스터가 아니지만…
“이렇게 되면…잡아 버릴 수밖에 없잖아.”
나는 혀로 입술을 한번 핥았다.
사실 일반적인, 정석 공략법을 따라서 도망치기만 하기에는 뭔가 아쉽던 차다.
괴물 같은 반사신경.
핵에 가까운 동체시력.
상상을 초월하는 물리공격력.
그리고 미친 듯이 끈질긴 집념과 근성.
‘…나를 미소 짓게 하는군.’
놈은 여러모로 나를 자극하는 존재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뉴비’, ‘뉴타입 비스트(New Type Beast)’!
“…그래. 어디 한번 붙어 보자.”
지금까지는 미래 지식을 이용한 꼼수로만 이겨 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 없다.
현재도 미래에도 특별한 공략이 알려져 있지 않은 이 몬스터를 상대로, 나는 결사의 출사표를 내던졌다.
이제는 거의 8만 시간에 가까워진 플레이 타임.
고인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