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배드엔딩(Bad Ending) (2)
[게르르르륵!]
‘기어 다니는 무사’는 긴 팔을 뻗어 나를 잡으려 했지만…
타타타탁!
고인물 모드인 나는 속도라면 그 누구에도 뒤지지 않는다.
나는 윤솔을 안은 채 로프를 잡고 가파른 벽을 타올랐다.
한편.
기어 다니는 무사는 네 발을 이용해 전속력으로 달려오다가 제 때 멈추지 못하고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쿵! 와그작!
놈이 쓰고 다니는 투구가 왜 그 모양으로 일그러져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아아아악!]
놈은 또다시 긴 팔을 뻗어 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드레이크는 귀찮다는 듯 인상을 썼다.
“몇 번이고 붙는 것이지만, 정말 질긴 놈이야.”
그는 시위를 당겨 기어 다니는 무사가 쓴 투구 사이 틈에 화살 몇 대를 박아 넣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 다니는 무사가 벽을 타오르는 속도가 줄지 않자….
“그래. 이번에야말로 승부를 내자.”
드레이크는 가죽자루 하나를 꺼내더니 벽면에 대고 흘렸다.
줄줄줄줄줄-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기름이었다.
기름칠 된 벽을 짚은 기어 다니는 무사는 허우적거리더니 그대로 미끄러져 내린다.
물론 바닥에는 날카로운 마름쇠들이 잔뜩 뿌려져 있는 상태였다.
나는 발밑으로 흘러내리는 기름을 보며 드레이크에게 물었다.
“…파이어?”
“좋지.”
드레이크와는 생각이 잘 통한다.
나는 바로 간쇼마루의 신발을 꺼내 신고 기름에 불을 당겨 버렸다.
[끄아아아아악!]
기어 다니는 무사는 마름쇠 가득한 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질렀다.
우리는 놈을 뒤로하고 재빨리 벽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배드엔딩(Bad Ending)’들은 상대해 봐야 골치만 아파.”
드레이크는 그간 이곳을 혼자 둘러보며 꽤나 적응한 듯했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일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는 바로 윤솔이었다.
“어진아. 배드엔딩이 뭐야?”
음,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나는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필드나 던전에 서식하는 생명체 중 플레이어나 NPC를 제외한 것들을 몬스터라고 부르지?”
“응, 그건 알아.”
“몬스터랑 똑같은 개념이야. 다만 이 천공섬에 서식하는 존재들은 따로 ‘배드엔딩(Bad Ending)’이라는 일반명사로 불리지.”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배드엔딩’=‘몬스터’ 뭐 이런 개념이다.
그때, 앞서 달리던 드레이크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곳 천공섬의 몬스터들, 아니 배드엔딩들은 죄다 거지다. 상대할 가치가 없어.”
“…아아, 왜요?”
“경험치는 많이 주지만 골드나 아이템을 거의 안 준다. 도무지 얻어 갈 게 없지. 재료 아이템을 많이 떨구기는 하지만, 주변에 마을이 없어서 그것들을 팔거나 가공할 수도 없어. 게다가 소모품을 벌충할 방법도 없어서 레이드 하기에는 최악이다.”
아무래도 그동안 혼자서 미궁 속을 돌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드레이크가 마냥 불평거리만 모으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때 게임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전설의 플레이어 ‘용냥’답게, 그는 독자적으로 이 미궁의 생태계를 분석해 놓았다.
“배드엔딩들은 다양한 등급과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지. 어진, 너는 그들의 습성에 대해 아는가?”
“나도 잘 몰라.”
“그렇다면 내가 정리한 정보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말없이 내 시야에 상태창 하나를 공유했다.
-띠링!
그것은 드레이크가 직접 발로 뛰어 작성한 분류표였다.
[배드엔딩(Bad Ending)]
[일반명사]
외형: 일일이 따질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움. 같은 모양을 한 복수의 개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한 개체 한 개체가 완전히 독립된 종으로서 존재함.
위험등급: ‘B+’ ~ ‘A’ ~ ‘?’
먹이: 꿀열매, 혹은 자기보다 약한 배드엔딩.
습성: 제각기 다름. 주로 3가지로 나뉨.
↳버로우성: 미궁 바닥에 굴을 파고 생활. 응달진 곳에 잠복해 있는 경우가 심심찮게 보임.
↳나무위성: 나무 위나 벽 위에 은신처를 만들고 생활. 가장 흔하고 일반적임.
↳배회성: 특별한 은신처나 아지트 없이 미궁 전체를 되는 대로 배회하며 생활.
배드엔딩들 사이에서도 흔치 않은, 가장 앱노멀(abnormal)한 형태.
그 뒷부분부터는 지금껏 드레이크가 미궁을 탐사하며 발견한 배드엔딩들을 종류에 따라 기록하고 분류해 둔 페이지였다.
간략한 스케치와 메모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 것이 보인다.
[배드엔딩 도감]
[고유명사]
<배드엔딩 / 일명 ‘춤추는 무희’> -등급: B+ / 특성: ?
-습성: 버로우성
-서식지: 미궁 외곽, A구역 12시 방향.
-발견일: 0월 0일 23시 56분.
-썩은 시체에 기생하는 복수의 벌레 군체.
이 경우 한 개체의 배드엔딩으로 보아야 하는지는 알 수 없음.
시체의 관절 부분에 끓는 애벌레들이 마치 시체를 춤추게 하는 듯한 모양으로 움직임.
대체로 밤에 출몰하며 한 지점에 서서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경우가 많음.
눈이 마주치면 일정 구역까지는 맹렬하게 추격해 오니 각별히 주의할 것.
<배드엔딩 / 일명 ‘성대모사 파리지옥’> -등급: A / 특성: ?
-습성: 버로우성
-서식지: 미궁 외곽, X구역 6시 방향.
-발견일: 0월 X일 03시 11분.
-커다란 식충식물의 외형을 하고 있으며 큰 입으로 동료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부름.
혹시나 동료가 있나 싶어 가까이 다가갔다가 한 입 베어 물리기라도 하면 낭패.
<배드엔딩 / 일명 ‘가려운 함박눈’> -등급: B+ / 특성: ?
-습성: 나무위성
-서식지: 미궁 외곽, C구역 8시 방향.
-발견일: 0월 Z일 14시 02분.
-곰팡이 종류로 추측됨.
미궁의 벽 위에서 함박눈 같은 것이 펑펑 쏟아진다면 십중팔구 이 녀석의 포자임.
벽 위를 털실 같은 것으로 뒤덮고 있으며 살갗에 닿으면 수포가 올라옴과 동시에 극심한 가려움증이 몰려옴.
가려움증은 별도의 치료 없어도 3시간 정도 뒤면 자연히 가라앉음.
본체가 어디에 있는지는 불명.
<배드엔딩 / 일명 ‘등 굽은 사마귀’> -등급: A / 특성: ?
-습성: 나무위성
-서식지: 미궁 외곽, F구역 6시 방향.
-발견일: 0월 0일 01시 06분.
-나무 위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커다란 대낫을 뻗어옴.
그림자가 지지 않는 시간대에 움직이는 것이 특징.
(접근 시 소리가 나지 않으니 각별히 주의할 것)
방어력은 약하지만 순간적인 물리 공격력이 굉장하니 맞붙어 싸우지 않는 것이 좋음.
첫 공격은 주로 목이나 다리를 노리는 듯함.
<배드엔딩 / 일명 ‘막둥이’> -등급: B+ / 특성: ?
-습성: 배회성
-서식지: 미궁 외곽, C구역 1시 방향.
-발견일: 0월 X일 16시 36분.
-거대한 얼굴을 지닌 아기. 느린 속도로 미궁 내부를 기어 다님.
흉측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의외로 얌전한 성격.
<배드엔딩 / 일명 ‘기어 다니는 무사’> -등급: A / 특성: ?
-습성: 배회성
-서식지: 미궁 외곽, D구역 4시 방향.
-발견일: X월 X일 04시 44분.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네 발로 기어 다니며 이빨이나 손톱으로 공격해 옴. 극도로 흉폭함,
공격력 방어력 모두 우수하며 HP가 일정 수치 이하로 줄어들면 이족보행을 함과 동시에 등에 짊어진 칼과 방패로 공격해 오니 각별히 주의할 것.
“…오, 이거 정리 잘 해 놨는데?”
나는 도감의 스크롤을 내리며 감탄했다.
드레이크는 그간 미궁에서 수많은 배드엔딩들과 싸워 본 모양이다.
적어도 이 미궁 속에 관한 것이라면 나보다 더 아는 것이 많을 것 같았다.
한편.
윤솔은 내 품 밖으로 손을 뻗어 넝쿨에 매달려 있는 열매 하나를 툭 땄다.
그녀의 손에 잡힌 열매는 동그랗고 빨갛다.
마치 사과처럼 생겼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매끄럽고 크기도 작았다.
손에 잡히자, 열매는 껍질 표면에서 노오란 꿀과 같은 즙을 방울방울 뿜어내기 시작했다.
“와아, 이게 꿀열매인가?”
윤솔은 감탄했다.
한 입 살짝 베어 물자 달달한 맛이 느껴진다.
마치 꿀을 통째로 굳혀서 동그랗게 만든 느낌.
그리고 뒷맛은 상큼하게 신 맛이 감돈다.
전체적으로 새콤달콤한 맛.
나는 감탄하고 있는 윤솔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그거 씹는 건 좋은데, 삼키진 마. 특히 씨앗은.”
“……?”
윤솔은 내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한다.
그리고 씹던 과육과 씨앗을 퉤 뱉어냈다.
“이거 몸에 안 좋은 과일이야?”
“배드엔딩들의 주식이니까 좋진 않겠지.”
“…참, 그렇겠다.”
윤솔은 꿀열매를 전부 뱉어내 버렸다.
뭐 삼키지 않고 씹는 것만으로도 꿀열매의 맛은 충분히 즐길 수 있으니 상관없는 일이다.
한편.
나는 어느 순간부터 드레이크보다 앞장서서 달리고 있었다.
동시에 드레이크를 향해 오더를 내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왼쪽으로. 그리고 계단을 올라가서 3시 방향으로 점프해. 기둥을 타 내려간다. 그리고 바로 측면에 보이는 계단을 내려가서 양 갈래길 중 좌측으로 이동.”
한편, 내 오더를 들은 드레이크는 뒤를 따라오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진. 여기서부터는 나도 아직 탐사하지 못한 구역이다. 한데 어떻게 길을 아는가?”
윤솔 역시도 아까부터 궁금했다는 듯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그들의 질문에 씨익 웃었다.
‘그야 공략 루트가 훤히 보이니까 그렇지.’
길을 외우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현재 내 눈에는 미궁을 탈출하는 길이 흰색 실선으로 훤히 보이고 있었다.
마치 네비게이션이라도 틀어 놓은 것처럼 말이다.
‘0세대 캡슐’
내가 천공섬 공략 전에 큰맘 먹고 경매에서 샀던 낡디낡은 캡슐을 기억하는가?
이 0세대 캡슐은 신세대 캡슐에 비해 성능이 많이 구리지만, 그래도 딱 하나 좋은 점이 있다.
천공섬 미궁의 해답로를 표기해 주는 버그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미래 지식으로 인해 이 꿀팁을 알고 있던 나는 경매에 0세대 캡슐이 올라온 사실을 알자마자 거금을 써서 바로 구매했던 것이다.
지직- 지지직-
눈을 깜빡일 때마다 길 위로 하얀 실선이 생겨났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한다.
나는 이 버그를 거침없이 이용했다. 최단 기간으로 이 미궁을 돌파해 나갈 생각이었다.
그때.
나의 질주에 제동을 걸어오는 움직임이 있었다.
…콰쾅!
허공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나와 드레이크의 앞을 정면으로 가로막았다.
머리가 깨지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저돌적인 돌진.
화르르르륵…!
그것은 전신이 시뻘건 화염으로 불타고 있는 괴물이었다.
네 개의 팔다리를 뒤틀어 장신을 움직이고 있는 배드엔딩.
‘기어 다니는 무사’!
놈이 우리를 여기까지 추격해 온 것이다!
드레이크는 이를 악물었다.
“젠장! 배드엔딩 놈들은 한번 찍은 먹잇감은 끝까지 쫓아가는 습성이 있다! 이놈은 유난히 더 질긴 것 같아!”
기어 다니는 무사는 드레이크와 몇 번이나 교전을 펼친 적이 있는 질기디질긴 배드엔딩이다.
…하지만.
지금의 기어 다니는 무사는 어딘가 조금 이상했다.
[게에에엑-]
놈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힘없이 비틀거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대로 푹 주저앉았다.
……불길에 잠식되어 힘을 잃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머리를 너무 세게 부딪쳐 뇌진탕이라도 일으켰나?
그렇다면 방금 전의 그 힘찬 도약은 뭐였을까?
우리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쾅! 콰지지직!
의문은 곧 풀렸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기어 다니는 무사가 반으로 확 찢어져 버렸다.
[오-오오오오!]
그 질기던 괴물을 일격에 두 동강 내며 등장한 ‘무언가’
놈은 기어 다니는 무사를 우리 앞으로 집어던져 길을 막은 뒤 그 위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그것과 마주친 순간 나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나타났군.’
회귀하기 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천공섬의 초반 공략 난이도를 혼자서 확 높여 놓은 존재.
‘미궁의 악몽’이라 불리던 최강 최악의 배드엔딩(Bad Ending)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