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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270화 (270/1,000)
  • 271화 배드엔딩(Bad Ending) (1)

    “접속.”

    [음성 인식으로 보안 해제]

    .

    .

    [동기화 중입니다……]

    .

    .

    [동기화 완료!]

    나는 게임에 접속했다.

    그동안 마동왕으로 꽤나 오랜 시간을 보내왔으니 이번에는 고인물 메타이다.

    나는 환한 빛무리를 헤치고 땅을 밟았다.

    평소였다면 항상 아무도 없는 곳에서 로그인과 로그아웃을 했겠지만 오늘만큼은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어차피 나 말고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천공섬!

    상공 2만 미터에 떠 있는 하늘 위의 섬.

    나는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어 이곳으로 한 번에 워프한 것이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렸던 천공섬 공략이다!”

    지금부터 공략할 던전은 내가 지금껏 플레이 해 왔던 던전 중에 가장 크고 난이도가 높은 구역.

    이곳은 지금까지의 던전들과는 난이도에 있어서 그 궤를 달리한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함정들과 강력한 몬스터, 그리고 공략을 미리 알고 있지 않다면 도저히 클리어할 수 없는 사기적인 난이도의 히든 퀘스트들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토리가 미친 듯이 길고 질질 늘어지고 막 그런 건 또 아니지.”

    천공섬은 다채로운 생태계나 퀘스트 등 즐길 것이 많고 임팩트 있는 메인 스토리 또한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던전들의 히스토리나 설정에 비해 특별히 더 장황하거나 루즈한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짧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기에 수많은 게이머들에게 ‘박수칠 때 떠났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준수한 던전이기도 하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내가 막 한 발을 떼어 놓는 순간.

    위이이잉-

    바로 뒤에서 환한 빛무리가 터져 나왔다.

    윤솔이 접속한 것이다.

    “앗? 어진아! 빨리 들어왔네!”

    그녀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내가 아이돌 E스포츠 선수권 대회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는 동안 그녀 역시도 예능 촬영과 뷰티 방송에 집중하느라 한동안 접속을 하지 못했었다.

    윤솔은 나를 보며 웃었다.

    “우와, 나 그새 여기에 빠져들었나 봐. 게임 하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특히나 여기 천공섬의 풍경을 다시 보고 싶어서!”

    “아아, 풍경? 그럴 만도 하지.”

    나와 윤솔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천공섬.

    그것의 외형은 실로 신비롭다.

    그것은 자욱한 구름 무리에 반쯤 잠겨 있었는데 마치 흰 바다를 끼고 있는 섬 그 자체의 모습이다.

    푸른 숲이 단단한 암반층을 뒤덮고 있었다.

    저 멀리 까마득하게 엿보이는 섬의 중앙에는 고대의 것으로 보이는 성이 하나 있었는데 넝쿨과 이끼에 잔뜩 뒤덮여 있어서 매우 오래된 것처럼 보인다.

    성을 둘러싸고 있는 광활한 대지 위에는 울창한 녹지가 우거져 있다.

    빗물이 고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호수의 외곽으로 지상을 향해 떨어지는 폭포 등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천공섬의 중심부로 진입했을 때의 이야기.

    천공섬의 아름다운 중심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거대하고 광활하고 삭막한,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고 복잡한 메이즈(maze)였다.

    미궁(迷宮).

    검은 암석으로 된 벽들이 기하학적인 모양을 그리며 높게 솟구쳐 있었다.

    나와 윤솔은 이 메이즈의 최외곽, 구름의 바다가 보이는 구석진 곳에 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타고 온 운석은 결국 이 미궁의 한 일부였던 셈이지.”

    나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천공섬의 중심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외곽지대의 거대한 미궁을 통과해야 한다.

    뒤로는 넓게 펼쳐진 구름바다와 그 너머로 보이는 섬의 반대편이 어렴풋하게 보인다.

    미궁을 탈출하는 것 외의 다른 길은 전혀 없었다.

    음산한 미궁이 우리의 앞을 기다리고 있다.

    “자, 이제 이 미궁을 돌파할 차례다!”

    이것이 천공섬 진입의 첫 번째 단계.

    복잡한 미로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쪽의 중심부에서 메인 퀘스트를 수행할 수 없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돌파해야 한다.

    *       *       *

    나와 윤솔은 미궁 속으로 들어왔다.

    휘이이이잉-

    스산한 바람이 불어 소름을 쓸어 간다.

    “우와, 춥다. 바깥보다 온도가 훨씬 낮네.”

    윤솔은 양팔을 쓱쓱 문지르며 말했다.

    그녀가 입을 열자 미약하게나마 입김이 생겨나는 것이 보인다.

    나는 윤솔에게 보온용 망토를 덮어 주며 중얼거렸다.

    “…으음, 막상 들어와 보니 맵이 너무 넓은데.”

    이거 내 예상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수도 있겠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자 미궁의 내부가 보인다.

    검은 벽들이 하늘에 닿을 듯 높게 솟구쳐 있었고 울창한 넝쿨식물들은 그 벽을 꼭대기까지 뒤덮었다.

    그런 미궁이 어마어마한 넓이로 펼쳐져 있다.

    당장 근처에 있는 벽이나 계단, 기둥들만 해도 한 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

    윤솔은 미궁의 벽을 따라 걸으며 연신 감탄했다.

    “내가 아주 작은 미생물이 되어서 인간의 손가락 지문 속을 뱅글뱅글 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야.”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이 미궁의 초입에서부터 공포를 느끼고 주저앉았겠지만…….

    “너무 흥분돼! 나 이런 거 진짜 좋아하거든!”

    그녀는 방 탈출이나 메이즈 같은 것을 원체 좋아하는 스타일.

    이런 생소한 맵에도 훌륭하게 적응해 냈다.

    한편.

    나는 벽을 따라 오른쪽으로 계속 돌았다.

    구름이 안개처럼 낀 광장을 지나 아래쪽으로 연결된 나선형 계단을 타 내려가자 구멍이 숭숭 뚫린 벽이 나왔다.

    나는 그 벽의 중앙부에 있는 32번째 구멍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쪽으로 올라가야 해.”

    그러자 윤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진아. 너 길을 다 알고 가는 거야?”

    “당연하지.”

    나는 씩 웃으며 넝쿨을 잡았다.

    사실 나 역시도 이곳 천공섬의 지리를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도 모른다고 해야 맞다.

    왜냐하면 나는 이곳 천공섬을 밟아 본 적이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은 전부 고인물들의 집단지성에서 얻은 거지 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 메이즈의 해답로를 착실하게 밟아 가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그 이유는…….’

    그때.

    내 생각을 방해하는 것이 있었다.

    펑!

    옆쪽의 벽이 무너지며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손바닥이었다.

    엄청나게 커다란.

    “…헉!?”

    나는 잽싸게 윤솔의 허리를 잡고 벽을 박찼다.

    넝쿨이 있었기에 추락은 면했지만 하마타면 큰일 날 뻔했다.

    “소리도 없이 튀어나오네.”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건너편 벽으로 점프했다.

    벽을 부수고 나온 손바닥은 손가락이 짧고 손바닥이 뚱뚱했다.

    전형적인 간난아이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부에에에에-]

    벽 뒤에서 거대한 생김새의 괴물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설악산 흔들바위처럼 거대한 얼굴이었다.

    생김새로만 보면 귀여운 간난아이의 얼굴이지만 그 크기를 마주하면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것은 너무나도 컸기에 벽 위로는 얼굴밖에 보이지 않았다.

    윤솔은 경악했다.

    “뭐, 뭐야!? 어진아 저거 몬스터야!?”

    “……적어도 NPC는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윤솔을 허리에 낀 채 잽싸게 뒤돌아 달렸다.

    저 몬스터는 유명하기에 이미 알고 있다.

    일명 ‘막둥이’, 상대하기 피곤한 괴물이니 피하는 것이 상책.

    [빼애애애애!]

    뒤에서 막둥이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가볍게 무시해 준다.

    혐오스럽게 생긴 외형과는 달리, 나름 평화를 좋아하는 비선공 몬스터이니 굳이 건드릴 것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앗! 이제 안 쫓아오네? 의외로 착한 녀석인가 봐.”

    윤솔은 내 등 뒤를 살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맞아. 선공(先攻) 몬스터와 달리 비선공(非先攻) 몬스터는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아.”

    “역시. 아까 딱 봤을 때 약간이지만 친근하게 느껴지더라고. 그런데 아까 그 손바닥 공격은 뭐였을까?”

    “그냥 움직이는 중이었겠지 뭐.”

    나는 벽 하나를 꺾은 뒤 오르막길을 타올랐다.

    이 미궁은 평평한 것만이 아니라 위, 아래로 꺾이는 지형 또한 무수히 많은지라 상당히 힘들다.

    내가 윤솔을 업은 채 막 벽 하나를 돌려고 할 때.

    “…어진아!”

    윤솔이 그런 내 어깨를 탁 짚었다.

    그리고는 신중한 표정으로 내 귀에 속삭였다.

    “앞에 뭐가 있는 것 같아.”

    그녀의 따듯한 숨결이 내 귓바퀴를 타고 빙그르 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근거는?”

    “담쟁이넝쿨들이 다 말라죽어 가고 있어.”

    나는 윤솔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지금껏 우리가 달려온 길의 식물들은 짙은 녹색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저 벽 건너편의 식물들은 누렇게 떠 말라죽어 있다.

    아니, 말라죽어 가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또 골치아픈 놈을 만났군.”

    나는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아까 ‘막둥이’ 때와는 달리 이번 길은 외길이다.

    따로 도망칠 곳도 없었다.

    일전불사(一戰不辭), 어쩌겠나?

    나는 심호흡을 한 채 코너를 돌았다.

    그러자, 이내 예상했던 대로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르륵- 키에엑-]

    쩍 벌어진 입에서 침을 질질 늘어트리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몸 군데군데를 가리고 있는 흰 갑옷, 그리고 그 갑옷 토막들 안으로 보이는 것은 시커멓게 썩어 들어간 몸뚱이다.

    등에는 무거운 바스타드 소드와 방패를 들고 있었고 얼굴에는 해머에 맞은 듯 찌그러진 투구를 썼다.

    두 눈은 썩어 문드러져 푹 파여 있었고 입술이 없어서 이와 잇몸이 훤히 드러나 보인다.

    기긱- 기기긱-

    놈은 기괴한 자세로 엎드려 네 발로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다니고 있다.

    그럴 때마다 등에 짊어진 대검의 끝이 돌바닥을 긁으며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일명 ‘기어다니는 무사’

    저놈은 ‘막둥이’와는 다르게 아주 흉악한 성질머리를 가진 놈이다.

    미궁 속을 미친 듯이 헤집고 다니며 보이는 모든 것을 공격하는 타입.

    “…끙. 하필 저놈을 만나다니 운도 없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렇게 저돌적인 스타일의 괴물과는 가능한 붙고 싶지 않다.

    패턴도 난잡하고 개체값과 특성치도 괴랄하게 높아서 상대하기 까다롭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데….’

    하지만 놈이 길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 이상 피하기도 힘들다.

    [그르르르- 게엑- 구에엑-]

    ‘기어다니는 무사’는 입에서 썩은 체액을 게워내며 이쪽으로 기어오고 있었다.

    범람하는 광기가 메이즈 한 구역을 통째로 잠식해 간다.

    바로 그때.

    퍼퍽-

    화살 한 대가 날아들어 기어다니는 무사의 목에 꽂혔다.

    동시에 하늘에서 쇳조각들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그것은 마름쇠였다.

    나와 기어 다니는 무사 사이에 뾰족한 가시밭이 펼쳐졌다.

    네 발로 보행하는 타입의 몬스터에게는 4배의 데미지가 들어가는 것이 바로 마름쇠 계열 아이템 아니던가.

    기어 다니는 무사 입장에서는 가장 짜증나는 공격일 것이다.

    한편.

    “‘배드엔딩(Bad Ending)’들은 상대해 봤자 별다른 아이템도 안 줘. 피하는 게 낫지.”

    저 멀리, 벽 위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반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드레이크 캣.

    내가 아이돌 E스포츠 선수권 대회를 준비하는 동안 먼저 천공섬의 생태계를 둘러보고 있겠다던 그.

    차라락-

    드레이크가 나를 향해 밧줄을 던지며 씩 웃었다.

    “늦었잖아. 기다렸다고.”

    “미안.”

    나는 등에 윤솔을 업은 채 드레이크가 던진 밧줄을 잡았다.

    꽤나 적절한 타이밍에 나온 마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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