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266화 (266/1,000)
  • 267화 살수(殺手) (3)

    이나다 도모미.

    이제 막 20대의 젊은 여대생이다.

    그녀는 현재 일본 랭킹 18위에 위치해 있는 고수이기도 했다.

    주 무기는 한 자루의 긴 일본도.

    이 칼에 베이면 그곳은 바짝 마르게 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가뭄 검사’였다.

    확실히 그녀는 칼 말고도 전신에 두른 아이템을 전부 ‘가뭄’ 특성으로 도배해 두었다.

    때문에 이나다 도모미와 근접전을 벌이는 이는 조심해야 한다.

    아차 싶은 순간 온몸이 미라처럼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특성이 가장 잘 발현될 수 있는 맵이 아니면 싸우지 않는다.

    때문에 항상 드넓은 사막이 펼쳐져 있는 서대륙 ‘가혹한 사막’에서 주로 자리를 맡아 두고 사냥을 하는 편이었다.

    이나다 도모미는 실시간으로 송출되고 있는 카메라 스크린을 보며 윙크를 날렸다.

    “아이 참. 오늘도 샌드웜을 찾으러 왔는데 안 보이네. 이거 진짜 발견하기 힘든 필드보스인가 봐.”

    그녀는 말을 마친 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밑에는 커다란 모래 구덩이가 푹 파여 있었고 마찬가지로 커다란 개미귀신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파사사삭-

    바람이 불자 개미귀신의 시체는 모래로 변해 흩날렸다.

    이나다 도모미의 ‘가뭄’ 특성이 몬스터를 바짝 말라붙게 만든 탓이다.

    그녀는 다시 카메라 쪽을 바라보았다.

    “에잇. 오늘도 샌드웜 발견은 실패인 걸로. 들어보니 한국 랭커들이 샌드웜을 두 번이나 잡았다기에 우리도 당연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네. 걔네들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겠지만….”

    이나다 도모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는 샌드웜을 찾을 목적으로 사막의 제일 깊숙한 심층부까지 들어온 터다.

    때문에 마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꽤나 먼 길을 걸어가야 했다.

    “휴, 덥네.”

    이나다 도모미는 낙타를 몰아 사막을 나아갔다.

    사막 필드는 굉장히 넓어서 플레이어의 걸음으로는 지날 수 없다.

    낙타를 탄다고 해도 하루는 족히 걸릴 것이다.

    “아오! 더워! 허탕 친 뒤 돌아가는 길은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질까요?”

    이나다 도모미는 카메라 너머의 인터넷 방송 시청자들을 향해 하소연했다.

    사실 허탕을 쳐서 길이 멀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사막의 길은 원래 멀다.

    거기에 미친 듯이 내리쬐는 뙤약볕과 사막한 모래바람은 플레이어들의 체력을 더욱 빨리 고갈되게 만든다.

    아무리 고수 유저라고 해도 대자연의 지형 데미지에는 버티기 힘든 법이다.

    이나다 도모미는 낙타의 옆구리에 매달아 놓은 물병을 꺼내 입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안에 든 물을 남김없이 꿀꺽꿀꺽 비워 버렸다.

    그녀는 카메라 스크린에 대고는 말했다.

    “에? 물을 너무 낭비하는 것 아니냐고요? 에이! 괜찮아요!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오아시스 군락이 있어요.”

    사막 지형은 중간중간에 있는 오아시스가 아니면 사냥터의 레벨이 너무 올라간다.

    미친 듯한 무더위와 건기로 인한 체력 손실은 방어구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때문에 중간중간 오아시스에 들려 물을 벌충해 주어야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내 흐늘거리는 아지랑이 너머로 야자수와 호수가 보였다.

    여행자들의 쉼터 오아시스다.

    “…!”

    하지만, 이나다 도모미는 오아시스 앞에 멈춰 서자마자 움찔해야 했다.

    “뭐, 뭐야 이게!? 왜 이래?”

    그녀는 황급히 오아시스를 둘러보았다.

    오아시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한 야자수들이 전부 까맣게 타 죽어 있다.

    불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뿌리부터 잎사귀 끝까지 쪼글쪼글 고사한 것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설마?”

    그녀는 황급히 낙타에서 내려 뛰어갔다.

    고개를 빼들어 아래쪽에 있는 호수를 들여다보자…….

    “우욱!”

    토악질이 올라온다.

    호수는 온통 시커멓게 오염되어 있었다.

    냄새로 봐서는 맹독이다.

    근처의 야자수들을 뿌리부터 죽인 것이 바로 이것인 모양.

    “어떤 미친놈이 오아시스에 독을 풀었나 봐요. 하여간! 혹시 한국인이 아닐까요? 예전에도 관동대지진 이후 우물에 독을 푼 족속들이니….”

    이나다 도모미는 말도 안 되는 망언을 지껄이며 한참 동안이나 화를 냈다.

    하지만 가만히 서서 멍청한 소리를 지껄인다고 해서 누가 물을 주지는 않는다.

    결국 그녀는 다른 오아시스를 찾아 자리를 떠야 했다.

    “괜찮아요. 여기서 30분만 더 가면 다른 오아시스가 있습니다. 좀 작기는 하지만요.”

    이나다 도모미는 낙타를 몰아 다음 오아시스로 향했다.

    하지만.

    “아앗!?”

    그녀가 본 것은 전과 마찬가지로 검게 오염된 오아시스였다.

    누군가가 여기에도 똑같은 짓을 해 놨다.

    물은 죄다 독으로 오염되어 있었고 나무들은 까맣게 말라죽었다.

    “어떤 몰상식한 사람이 이런 짓을 해 놓은 걸까요? 정말 싫다.”

    이나다 도모미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낙타를 몰았다.

    이렇게 된 이상 1시간 넘게 떨어져 있는 오아시스로 가야 한다.

    그때까지 체력이 버텨 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미칠 듯이 쏟아지는 뙤약볕을 뚫고 가길 1시간 째.

    이나다 도모미는 어느덧 스크린을 보며 멘트를 칠 여유마저 잃고 있었다.

    쿵-

    낙타가 중간에 쓰러졌다.

    더위에 짓눌려 죽은 것이다.

    별 수 없이, 이나다 도모미는 도보로 다음 오아시스까지 이동해야 했다.

    그리고 겨우겨우 오아시스를 발견한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꺄아아아악!”

    또다시 검게 오염된 물과 말라죽은 나무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단순히 물이 오염되고 나무들이 타 죽은 것이 문제가 아니다.

    “…큭큭큭.”

    독에 푹 절다시피 오염된 오아시스의 중앙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훤칠한 키, 떡 벌어진 어깨.

    하지만 그 정체는 사람인지 몬스터인지 쉽게 분간할 수 없게 생겼다.

    온통 검은 핏줄로 뒤덮인 몸뚱이.

    그것들은 마치 석유처럼 검은 혈액을 공급하는 파이프처럼 힘차게 펄떡거리고 있다.

    얼굴은 검은 핏줄에 뒤덮여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아무것도 없이 새햐얀 두 눈만이 번들거리고 있을 뿐이다.

    이나다 도모미는 표정을 찡그렸다.

    사막에서 이런 몬스터가 출몰한다는 정보는 들은 적이 없기에, 눈앞의 괴인은 분명 플레이어일 것이다.

    “…뭐야 이 미친놈은?”

    그녀는 바짝 경계했다.

    스릉-

    허리춤에서 긴 일본도가 뽑혀 나왔다.

    하지만, 사막을 횡단하느라 기진맥진해 있던 그녀이다.

    제대로 된 전투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파팟!

    검은 괴인의 몸놀림은 그야말로 상상초월! 실로 무시무시한 스피드를 자랑한다!

    “어어엇!?”

    눈 깜짝할 사이에 이나다 도모미의 팔 한 짝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차라락!

    검은 괴인의 몸에서 시커먼 철조망이 튀어나와 이나다 도모미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 때문에 그녀는 도망도 가지 못한 채 전신을 할퀴는 끔찍한 격통에 시달려야 했다.

    퍼억!

    도망가기 위해 발버둥 치던 그녀의 다리 한 짝이 떨어져 나갔다.

    졸졸졸졸-

    붉은 피가 마른 모래에 스며든다.

    그 순간, 이나다 도모미는 떠올렸다.

    눈앞의 저 검은 괴인,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써, 썩은물? 예전에 한국에서 화제가 되었던 몬스터잖아!? 어째서 여기에…!”

    그렇다.

    전신을 시커먼 핏줄로 뒤덮은 괴물.

    오로지 살육과 파괴를 위해 살아가는 빌런.

    그 썩은물이 지금 여기에 등장한 것이다.

    이나다 도모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플레이어가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몬스터로 판명되었었지 분명…그때 죽지 않았다는 것도 들었어. 설마 이런 곳까지 나타날 줄은….”

    하지만 상황을 안다고 해서 타개책이 있는 것은 아니다.

    “큭큭큭큭.”

    썩은물은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다가왔다.

    그리고 이나다 도모미의 두 눈이 공포로 물든다.

    “그, 그만. 나는 죽으면 안 돼. 떨어트리면 안 되는 아이템이 한가득…….”

    하지만 몬스터에게 협상이 통할 리가 없었다.

    결국 이나다 도모미는 사막에서 극심한 기갈에 시달리다가 사지가 찢겨 죽는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그녀를 랭커로 만들어 줬던 몇몇 소중한 아이템들을 잃어버린 것은 물론이다.

    *       *       *

    야마타니 에리코.

    그녀는 음악에 조예가 깊은 30대의 여성이다.

    전공은 쿄큐나 샤미센.

    그녀는 현실에서의 조용하고 내성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게임 속에서는 상당한 파티광이었다.

    야마타니 에리코가 주로 출몰하는 지역은 남대륙 깊은 곳에 있는 ‘이디애무 섬’

    1년 365일 24시간 연중무휴로 파티가 벌어지는 흥겨운 땅이다.

    이곳 이디애무 섬에서는 몸이 절로 들썩거려지는 흥겨운 EDM이 늘 울려 퍼진다.

    곳곳에 있는 파티장과 놀이동산에서는 연일 불꽃놀이와 퍼레이드가 한창이었다.

    NPC들은 유쾌한 어조로 말을 걸었고 플레이어가 있거나 없거나 자기들끼리 즐겼다.

    곳곳에서 샴페인과 맥주가 흘렀고 환호와 웃음소리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이곳 이디애무 섬의 명물은 666롤러코스터였다.

    현실에서는 낼 수 없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움직이는 롤러코스터에 한번 타면 누구나 이 섬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야마타니 에리코 역시 이 롤러코스터에 타서 마음껏 환호성을 내지르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

    어찌나 롤러코스터를 좋아하는지 아무도 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혼자 기구에 탑승한 채 꺅꺅거리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마냥 소리만 지를 수가 없었다.

    뚝-

    둔탁한 소음이 짧게 한 번 난 직후, 머리통이 몸통과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롤러코스터에 남은 몸은 그대로 앞을 향해 가고 주인 잃은 머리통만 롤러코스터 레일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야마타니 에리코의 머리통은 마지막 순간 공포스러운 표정으로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것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본 것 때문이다.

    “큭큭큭큭.”

    썩은물.

    전신이 시커먼 악몽과도 같은 빌런.

    그가 롤러코스터 레일과 레일 사이에 얇고 가는 철조망을 묶고 있었던 것을 본 것이다.

    이 철조망에 목이 걸린 야마타니 에리코는 자연스럽게 머리통을 잃고 말았다.

    *       *       *

    한편.

    나는 피카레스크 마스크를 덮고 있는 검은 핏줄들을 걷어냈다.

    썩은물.

    이것이 내가 세 번째로 만들어낸 캐릭터이자 나의 어두운 자아를 거침없이 실현할 수 있는 빌런이었다.

    나는 원래 마동왕에 쓰려고 했던 ‘킬 체인’ 특성을 썩은물에게 주기로 했다.

    아직 방송 등에는 한 번도 공개한 적 없으니 상관없는 일이다.

    새롭게 진화한 도플갱어 캐릭터답게 고인물의 특성을 모두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동왕의 기술까지 카피했다는 콘셉트의 빌런.

    어차피 나는 진즉에 ‘썩은물=고인물’이라는 혐의를 벗은 지 오래이니 이제 와서 새삼 더 신경 쓸 것도 없다.

    “말하자면…고인물+마동왕이랄까?”

    거기에 도플갱어 특유의 엄청난 재생력까지 가미되었다.

    그야말로 최강의 빌런 탄생이다!

    진짜 썩은물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녀석의 악명을 최대한 이용해 볼 생각이었다.

    “나랑 놀 사람 여기여기 붙어라.”

    썩은물이 펄펄 끓기 시작했다.

    지독한 악취를 맡기 싫다면 모두 도망가는 것이 좋을 거야.

    나는 빚은 반드시 갚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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