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4)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나는 유다희가 맨 처음 부탁했을 때처럼 유세희의 부탁 역시 흔쾌히 들어주었다.
유세희가 나에게 요구하는 PVP란 무엇인가?
그것은 플레이어 VS 플레이어’의 약자로 PvE(Player VS environment)와는 대조되는 개념.
…그냥 쉽게 말해 맞짱 함 뜨자는 것이다.
난치병에 걸린 병약 미소녀의 소원치고는 조금 과격하긴 하지만…평소에 게임을 무척 좋아하는 아이였다니 뭐 아주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유다희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마침 트렁크에 휴대용 캡슐 두 개가 있긴 있는데….”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지체 없이 일어났다.
“여기로 가져오지 뭐. 잠깐 하는 거야 문제없겠지.”
“괘, 괜찮으시겠어요? 저는 아무래도 걱정이…….”
“괜찮아. 오늘은 시간도 널널하고. 별로 안 바빠.”
나는 말을 마친 뒤 후다닥 일어났다.
하지만 유다희는 그런 내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물거린다.
“아니…그게 걱정된다는 게 아니라….”
아무래도 그녀는 조금 다른 것을 걱정하는 것 같았지만…그때의 나는 그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 * *
“접속.”
[음성 인식으로 보안 해제]
.
.
[동기화 중입니다……]
.
.
[동기화 완료!]
나는 게임에 접속했다.
물론 마동왕 모드이다.
게임에 접속하자 나를 아는 몇몇 플레이어들이 스크린샷과 사인을 요청해 온다.
나는 친절하게 팬 서비스를 한 뒤 약속장소로 이동했다.
내가 유세희를 만나러 온 곳은 거대한 던전 ‘악마의 기름틀’이었다.
<악마의 기름틀> -등급: B
가위다리 모양으로 벌어진 커다란 바위 위 머리 부분에 움푹한 구덩이가 있었고 그 위에는 거대한 쇠공이 매달려 있다.
특이하게도, 이 던전은 시간이 지나면 위의 거대한 쇠공이 내려와 구덩이를 꽉 눌러 채운다.
구덩이 안에는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식물형 몬스터들이 서식하는데 이것들을 잡으면 꽤나 경험치를 짭짤하게 준다.
하지만 경험치에 취해 사냥을 계속하다가 구덩이를 나갈 타이밍을 놓치게 된다면 위에서 천천히 내려온 쇠공에 짓눌려 죽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쇠공에 짓눌려 죽게 될 경우 구덩이 맨 아래쪽에 뚫려 있는 작은 구멍으로 나올 수 있다.
고소한 기름과 섞인 한 줌 핏물이 되어서 말이다.
말 그대로 ‘악마’들이 쓰던 ‘기름틀’인 것이다.
“이곳을 대전 장소로 정한 건가? 뭘 좀 아네.”
나는 유세희의 센스에 감탄했다.
이 살벌한 던전은 몇 년 뒤 PVP를 즐기는 수많은 용자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유명해진다.
쇠공이 내려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5분.
그중 쇠공이 구덩이의 윗부분을 완벽히 틀어막을 때까지는 4분 44초가 걸린다.
그러니 4분 44초 안에 승부를 내지 못하면 이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16초간 엄청난 폐쇄감에 시달리다가 짓눌려 죽어야 하는 것이다.
빠른 시간 안에 승부를 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정 이길 수 없을 것 같으면 악착같이 상대방을 물고 늘어져 동귀어진을 할 수 있다는 점.
이 두 가지 요소는 PVP를 즐기는 이들에게 짜릿한 긴장감을 주었고 결국 이곳은 훗날 PVP의 명소로 이름 높아 지게 된다.
한데 그것을 유세희가 벌써 알고 맵을 선정할 때 참고하다니.
‘…정말 PVP를 좋아하나 보네.’
나는 감탄을 하며 악마의 기름틀을 올랐다.
어찌나 큰지 몇 분은 쉬지 않고 걸어야 겨우 기름을 짜는 구덩이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자, 구덩이 건너편에 서 있는 유세희가 보인다.
“아! 마왕 아저씨! 여기요!”
녀석은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아마 목소리 방향으로 나의 위치를 짐작한 듯싶었다.
“자, 시작할까?”
나는 거두절미하고 바로 구덩이 안으로 뛰어내렸다.
우리가 뛰어내리는 순간, 집계가 시작됐다.
쿠구구구구구…
쇠공이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꽤나 높은 곳에 있었기에 그리 심각하지는 않다.
나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유세희를 바라보았다.
이 작은 소녀와 PVP를 하다니.
‘어디까지 봐줘야 하는 거지?’
나는 조심조심 움직였다.
까딱 힘조절을 잘못하면 눈앞의 병약 미소녀에게 끔찍한 짓을 해 버릴 수도 있으니까.
내가 막 전신의 힘을 빼고 있을 때.
“조심…!”
구덩이 밖에서 유다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뭘 저렇게까지 다급하게 외친담? 내가 어련히 알아서 살살 할 텐데….
하지만, 바로 이어진 유다희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해야 했다.
“…하세요!”
존댓말?
설마 그럼 방금의 경고는 나를 위한…?
퍽!
하지만 내 생각은 중간에 끊어졌다.
HP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황급히 고개를 들자.
“PVP중에 어딜 보세요.”
유세희가 생글생글 웃고 있는 것이 보인다.
퍽퍽퍽퍽퍽퍽!
그녀는 놀라운 순발력과 힘으로 나를 후드려 패기 시작했다.
“어? 어? 어? 억! 어억!”
나는 두 팔로 가드를 세운 채 정신없이 뒤로 물러나야 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
방금 전까지 눈앞에 있던 유세희가 사라졌다.
휘잉!
가랑이 사이를 지나는 찬바람이 느껴진다.
동시에, 뒤로 돌아온 유세희가 내 뒤통수에 그대로 오버헤드 킥을 날렸다.
뻐억!
눈알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HP가 절반가량 증발했다.
‘뭐 이렇게 세!?’
나는 그제야 유세희의 템트리를 살폈다.
세상에.
나는 경악해야 했다.
유세희는 프로에 버금가는 엄청난 스펙의 아이템들로 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딜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방어력이나 체력, 민첩성 등 각종 스탯들은 프로들과 비교해 봐도 거의 꿇리는 것이 없다.
‘유다희와 유창이 사냥을 해서 얻은 아이템을 다 어디로 가져가나 했더니만…….’
아마 언니 오빠가 가져온 게임 아이템들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동안 유다희와 유창이 그렇게 레이드를 도는데도 왜 뛰어난 장비가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전부 동생에게 줬었던 모양.
하지만 유세희의 전투력은 단순히 템빨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마왕님, 조심하세요! 걔 무지 세요!”
유다희가 구덩이 밖에서 외쳤다.
그녀는 오히려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세희는 아까부터 나를 향해 폭풍처럼 공격을 퍼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다간 진짜 죽게 생겼다.
병약 미소녀를 위로하러 와서 친선대련을 했다가 죽으면…이런 개망신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나는 적당한 힘을 가해 반격했다.
하지만.
터엉-
나의 공격은 유세희의 가드에 의해 틀어 막혔다.
데미지가 들어오는 순간 반사적으로 몸을 빼 충격량을 줄인 것이다.
천부적인 재능, 나는 태어나서 게임을 이렇게 잘하는 애를 오늘 처음 봤다.
‘잠재력으로만 따지면 투신 마태강 급…아니, 그 이상도 바라보겠는데!?’
나는 오싹 돋는 소름을 느끼며 뒤로 물러났다.
팔다리가 전율로 인해 옅게 떨리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천재를 만나 보게 되다니!
쿠드드드득…!
나는 유세희의 진가를 시험해 보기에 위해 지진과 와류의 힘을 일으켰다.
“오오오오! 진짜 마왕님이다! 멋져! 대단해!”
유세희는 나를 향해 끌려오면서도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쾅!
내 주먹을 맞은 유세희는 저 멀리 뒤로 날아갔다.
하지만 맞는 순간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틀어 충격량을 줄였기에 이번에도 피해는 미미했다.
“…야, 솔직히. 너 눈 보이는 거 아니냐?”
“헤헤. 그럴 리가요.”
유세희는 회색 눈동자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쾅! 콰쾅! 퍼퍼퍽!
그 뒤로 나와 유세희는 몇 번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도저히 맹인의 플레이라고는 믿겨지지가 않는다.
예전 구 온라인 게임들의 프로리그에서도 가끔 유명 프로게이머가 맹인 팬의 부탁을 받아 친선대련에 임하는 실제사례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맹인 팬들이 보인 의외의 실력에 모두가 놀랐던 적이 있다.
이번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에 속했다.
놀랍게도, 나는 전력의 20% 이상을 다하고 나서야 그녀와 비등하게 상대할 수 있었다.
유세희는 상당히 강력한 탱커였고 게임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몰입력 또한 난다긴다하는 프로 선수들에 비해 꿇리지 않았고 게임에 대한 이해도와 흥미 역시도 남다른 수준.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왜 학교에서 인기가 많은지 알겠네.’
학교에 얼마 나가지도 않았는데 계속 반장선거에서 당선되는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게임을 잘하는데 또래 친구들에게 인기가 없을 리가.
결국 HP가 간당간당해진 유세희, 나는 그녀에게 포션을 건네며 말했다.
“대단하다. 나를 이 정도까지 몰아세운 상대는 프로리그에서도 없었어. ……당장 데뷔해도 되겠는데?”
“에이, 괜히 비행기 태우지 마세요, 아저씨.”
“빈말 아냐. 너 잘해. 내가 조만간 스카웃하러 온다.”
내 말을 들은 유세희의 표정이 확 밝아진다.
하지만, 나는 그 뒤에 단서를 붙였다.
“단. 네가 수술을 받아서 건강해지면 말이야.”
“…에엥.”
실망한 표정을 짓는 유세희,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빛나는 재능을 가졌지만, 그것을 개화시키려면 혹독한 연습이 필요해. 일반적인 프로게이머들은 하루에 10시간 이상은 꾸준히 플레이하지. 더 지독한 사람은 17시간 이상씩 하기도 해.”
“…아저씨도 그러세요?”
“당연하지. 한때는 20시간씩 게임했어. 너는 그럴 체력이 되니?”
내 질문을 들은 유세희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쳐 주었다.
“프로들의 연습량은 살인적이야. 수술을 받고 나서 건강해진 몸이 아니면 절대 감당 못할걸?”
“…정말 그렇겠네요.”
“맞아. 정말 그렇지. 그래서 말인데…….”
나는 눈을 빛내며 유세희를 바라보았다.
“너 만약 수술 받고 건강해지면, 그땐 정말로 아저씨 따라서 프로리그에서 한번 뛰어 볼래?”
내 말을 들은 유세희의 고개가 다시 번쩍 들렸다.
무작정 수술을 받고 건강해지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욕망과 그것의 실현 방법을 제시하고 그것의 수단으로서 수술을 받으라고 하는 것.
마냥 애기 대하듯 고압적으로 명령하고 찍어 누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대등한 인격체로 대하자 유세희는 금방 마음을 열었다.
“저 수술 받을래요! 빨리 게임하고 싶어요!”
유세희가 외치는 것을 들은 유다희의 얼굴도 환해졌다.
동시에 나의 얼굴 역시도 환해질 수밖에 없다.
현존하는 한국 랭커들, 아니 이 이후에도 계속 탄생할 랭커들 중에 지금 눈앞의 이 작은 소녀만큼의 재능을 가진 이가 몇이나 될까?
나는 감히 확신할 수 있다.
현존하는 모든 게이머들 중 가장 잠재력이 뛰어난 이는 바로 이 유세희라고.
…그렇다면 차후 이 아이를 어느 구단에서 프로로 데뷔시킬지가 문제로 남는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국K-1이지만…….
‘남 좋은 일 시켜 줄 수는 없지.’
유세희가 화려하게 데뷔할 경우 국K-1의 구단주들만 좋은 일 아닌가?
나는 곧 고인물의 이름으로 창립할 구단을 떠올렸다.
“세희야.”
“네?”
“너 혹시 고인물이라고 아니?”
내가 묻자, 유세희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네, 가끔 TV에서 봤어요.”
“어떤 것 같니?”
“몰라요? 나올 때마다 채널 돌려 버려서.”
“…채널 왜 돌리는데?”
“변태잖아요. 더러워.”
“…….”
“울 언니가 저 주려고 아이템 구하러 다닐 때 맨날 방해하던 사람이라서 더 싫어요.”
“…….”
“저번에는 수술 앞두고 언니가 저 병원비 구하려고 퀴즈쇼 나갔었는데 그때 그 변태를 만나서 탈락하는 바람에…….”
나는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우리 구단으로 모셔 오기는 좀 힘드려나?
“자, 과거는 잊어버리고. 일단 수술부터 받자. 그리고 프로 데뷔 알아보자고.”
“좋아요! 꺄악! 빨리 로그아웃하고 수술동의서 써야지!”
유세희가 발랄하게 외쳤다.
그 말을 들은 유다희는 옆에서 눈물짓는다.
훈훈한 분위기.
그렇게 모든 것이 잘 풀려 가고 있을 때.
“……!”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こちらだ.]
[処理して.]
[俺なら 逃さない.]
일본어.
그리고 명백한 적의(敵意).
‘……설마.’
나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하필 이런 타이밍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