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262화 (262/1,000)
  • 263화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3)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나는 유다희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병원 들려서 아이와 놀아 주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도 아니고, 천공섬 레이드 전에 잠깐 휴식 겸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전에.

    나는 내 팬클럽 측에 연락해 골수 기부자 등록 전문 단체와 접선했다.

    생각보다 내 영상을 보는 팬들의 직업군은 다양했고 마침 예전 마동왕 팬미팅 정모 때 모였던 이들 중에 이런 쪽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골수 기증을 하겠다는 이들은 많았다.

    팬클럽 회장 유다희의 사연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검사에 나섰다.

    요즘은 기술이 좋아져서 복잡한 과정이나 긴 절차 없이도 간단하게 환자와의 적합성을 검사할 수 있다.

    면봉으로 구강점막을 채취하는 간단한 검사만으로 수많은 샘플을 채취할 수 있는 세상이다.

    세상은 좁고 몇 다리 건너면 모두가 아는 사이라고 했다.

    놀랍게도 내 게임 방송의 열혈 시청자들 중에는 비영리단체인 ‘아시안 골수 기증후원회’ 관계자들도 몇 있었기에 일이 꽤나 수월하게 진척되었다.

    유다희의 막내동생은 비교적 쉽게 맞는 골수를 찾을 수 있었고 팬클럽 차원에서도 상당한 후원금이 모였다.

    물론 전적으로 나의 허락과 진행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 과정을 거치느라 천공섬 레이드가 조금 늦어졌지만 개인적으로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다.

    레이드를 함께하기로 한 윤솔 역시도 요즘 방송 일이 바빠 시간을 내려면 조금 걸린다고 했고 드레이크는 혼자서 섬을 탐험하면 되니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했다.

    나는 휴가를 즐긴다는 마음으로 마음을 좀 느긋하게 먹었다.

    그리고 난치병에 걸린 소녀에게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오늘.

    나는 유다희의 동생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 본격적으로 찾아온 것이다.

    덜컹-

    택시 문을 열고 병원 앞에 내리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엄재영 감독이었다.

    “여보세요?”

    [마왕아, 요즘 뭐 골수 이식 쪽으로 알아본다며?]

    “골수 기부하시게요? 이미 적합한 기부자님이 나타났는데. 늦으셨네요.”

    [아니, 그게 아니고. 모금이나 기부자 찾는 과정 같은 거 다 네가 지휘한 거라고 들어서.]

    “맞는데 왜요.”

    내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되묻자, 엄재영 감독은 마침 잘됐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다름이 아니고. 내가 친한 기자들한테 이 이야기 좀 해둘까 해서. 난치병 걸린 소녀를 찾아간 프로게이머! 미담 주제로 딱이지 않냐? 네 이미지 만드는 데 좋을 것 같다. 이런 선행 아주 좋아, 자주 하자고.]

    “아, 뭐예요! 이거 때문에 선행한 것 같잖아요.”

    [행여나 그렇게 비치지 않게 신경 써서 기사 나갈 거야, 자식아. 형의 선물이다.]

    “…별로 안 고맙거든요. 사람이 순수해야지 말이야.”

    [자식, 이렇게 계산적인 사람도 옆에 하나 있어야 인생이 풍요로운 거야 인마. 또 기사도 나고 막 그래야 후원금도 더 많이 모일 것 아니냐고. 결국 그 애를 위해서도 이게 최선….]

    “어휴, 알았어요. 저 이제 병원 들어갑니다.”

    [어? 아, 면회가 오늘이었나? 알았다, 애기 응원 잘 해 주고! 인마 그리고 연습실 좀 자주 나와라, 애들이 너 보고 싶어 한…앗! 여보! 그거 무거워! 들지 마! 내가 할게!]

    엄재영 감독은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아마 아내를 도우러 간 모양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핸드폰의 통화 종료 표시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마왕님! 여기에요!”

    주차장 바리케이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병원 주차장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유다희가 보인다.

    평소와 달리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수수한 차림.

    몸매가 죄다 가려지는 펑퍼짐한 옷에 튀지 않는 차.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한 번씩 돌아보게 만드는 미모와 비율은 여전하다.

    “일찍 왔네?”

    “오늘 막내가 ICU에서 나오는 날이라서요. 애가 한시라도 빨리 나오고 싶다고 성화라서…….”

    나는 유다희와 대화를 나누며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병원 로비에 있던 사람들은 유다희의 미모에 놀라 한번, 내 가면과 음성변조기에 놀라 다시 한 번 이쪽을 돌아본다.

    하지만 남의 시선이야 뭐 이미 알몸으로 다닐 때부터 익숙해진 몸이다.

    유다희 역시 남의 시선에는 익숙할 것이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별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엘리베이터로 직행했다.

    언제 맡아 봐도 병원 냄새는 참 이질적이다.

    아무리 맡아도 적응되지 않는 이 묘한 공기.

    싸구려 방향제 냄새와 의약품 냄새, 환자들의 분비물에서 나는 희미한 악취, 그리고 손 소독제 냄새가 뒤엉켜 뭉근하게 흐른다.

    이것이 바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나는 냄새일지도 모르겠다.

    엘리베이터를 오르며, 나는 유다희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남매가 다 희자 돌림이구나.”

    “네. 유다희, 유창희, 유세희. 이렇게 3남매죠.”

    유창의 본명이 유창희였다는 것은 조금 놀라운 일이다.

    회귀하기 전까지만 해도 녀석에게 지독하게도 시달렸는데 지금껏 제대로 된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니 참.

    나는 유다희에게 슬쩍 물었다.

    “둘째 동생은 오늘 같이 안 왔어?”

    그러자 유다희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 그게. 창이는 오늘 바쁜 일이…….”

    “바쁜 일? 동생이 이렇게 아픈데?”

    “으음, 그게 왜 그렇냐면…수금이…아니…미수금이…아니, 빚 정산…아니 그게…….”

    안 들어도 알겠다.

    ‘사채 이자 수금 갔구만?’

    녀석이 어떤 방식으로 일을 하는지는 당해 봐서 잘 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으음. 친구한테 돈 빌려 준 것 받으러 갔나 보군.”

    “…….”

    유다희는 안절부절 못하던 끝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거짓말을 한 게 마음에 걸리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뭐 엄밀히 말하면 저희 빚은 아니죠.”

    음? 이게 무슨 소리인가?

    자기 빚이 아니면 그걸 왜 수금하러 간단 말인가?

    ‘그럼 내가 회귀하기 전에 빚진 대상이 유창이 아니었다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유창과 유다희 너머에 원흉이 하나 더 도사리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궁금하다는 기색으로 고개를 돌리자, 유다희는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그…막내 병원비를 지금껏 대신 내 주신 분이 있는데…‘큰형님’이라고…그분이 못 받은 빚을 대신…….”

    “큰형님? 큰오빠가 아니라?”

    “아아. 그게 사실 저희 아빠가 큰형님으로 부르던 사람이라 저도 그냥 그렇게 부르는…나이는 부모님 연배보다도 많으신…….”

    그때쯤 해서.

    드르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텅 빈 공간에 갑자기 수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어 왔기에 우리는 잠시 대화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 무지 많네.’

    엘리베이터는 목적지인 9층에 도착할 때까지 한 번도 만원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결국 우리는 대화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엘리베이터가 9층에 도착하는 즉시 유다희가 앞으로 뛰어나갔기 때문이다.

    “세희야!”

    그녀가 향한 곳은 간호사가 밀고 있는 휠체어가 있는 곳이었다.

    “언니!”

    휠체어 위에 앉아있던 소녀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유세희.

    과연 유다희의 동생답게 그녀와 쏙 빼닮았다.

    13살 아이답게 귀엽게 생긴 얼굴이었지만 그 밑으로 보이는 병원복과 휠체어는 보는 이의 마음을 안쓰럽게 만든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유세희의 두 눈동자는 거진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합병증 때문에 시력이 극도로 떨어진 탓이다.

    유다희가 나를 소개하자 유세희는 뛸 듯이(실제로 뛰지는 못했지만) 좋아하며 나에게 팔을 뻗었다.

    나는 잠시 음성변조기를 뺄까 고민했다.

    아무런 고저도 없는 기계음이 자칫 아이한테 무섭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옆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유다희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애초에 유세희는 나를 별로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저 감동한 표정으로 내 가면을 더듬을 뿐이다.

    “우와! 아저씨 진짜 마왕님 맞아요? 막 대역이고 이런 것 아니죠?”

    “그럴 리가 있니.”

    “저 진짜 팬이에요! 보지는 못해도 아저씨 경기 다 들었어요!”

    유세희는 싱글벙글 웃으며 자기가 생각하기에 가장 인상 깊은 경기들을 줄줄이 열거했다.

    “박보연 선수를 열풍으로 날려 버려서 잡았을 때부터 깜짝 놀랐어요.”

    “아, 그 작아지던 친구 말이니. 요즘은 니아라는 걸그룹에서 잘 나가고 있더라.”

    “맞아요. 그리고 그 뒤에 류요원 선수를 매타작으로 잡는 것도 신기했어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니까요! 병문안 온 제 친구들도 다들 그렇다고 했어요!”

    유세희는 아이답게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쉬지 않고 조잘거렸다.

    나는 눈앞에 있는 이 소녀의 병실을 둘러보았다.

    곳곳에 보이는 것은 쥬스, 과일, 그리고 종이학이나 종이별이 잔뜩 든 꾸러미와 유리병 들이다.

    나는 그것들을 집어 들며 말했다.

    “학교에서 인기가 많나 보구나?”

    “아휴, 얘는 학교 다니는 내내 반장만 했다니까요? 학교도 얼마 안 나갔으면서 참 대단해~”

    그러자 옆에서 유다희가 살짝 끼어들었다.

    그녀는 평소 이미지와는 달리 동생 자랑을 할 때에는 의외로 꽤 팔불출처럼 보인다.

    유다희는 동생 유세희의 통통한 볼을 쥐며 허리를 굽혔다.

    “자, 우리 세희. 소원대로 마왕님 만나게 해 줬으니 이제 수술 받을 거지?”

    그때. 반전이 일어났다.

    유세희의 표정이 싹 굳더니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다.

    그러자 유다희는 속상하다는 듯 말했다.

    “언니가 그랬지? 이 수술 받아야 너 다시 학교도 갈 수 있고….”

    “……싫어.”

    하지만 유세희의 태도는 완강했다.

    유다희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다시 조곤조곤 말했다.

    “세희야, 언니 화나게 할래?”

    “…….”

    “너 그때 분명 그랬잖아. 마왕님 만날 수 있으면 수술 받겠다고.”

    그러자 유세희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저 아저씨가 진짜 마왕님이 아닐 수도 있잖아.”

    그러자 유다희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일그러졌다.

    “너 지금 그게 무슨 버릇없는 소리야! 지금 언니랑 마왕님이 거짓말 한다는 거야!?”

    “마왕님은 몰라도 언니는 거짓말 잘하잖아!”

    유세희가 빽 소리치는 것을 들은 나는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틀린 말은 아니네 뭐.’

    한편 유다희는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채 나를 돌아본다.

    그리고는 유세희를 향해 이를 꽉 깨물고 웃었다.

    “은니그 은제 그즛믈흤쓰….”

    “거짓말 잘하잖아! 저번 수술도 하나도 안 아플 거라고 했잖아!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라고도 했잖아!”

    “아, 이번 건 진짜 마지막이라구!”

    “거짓말! 거짓말!”

    “이게 진짜 아프다고 봐주니까!? 너 창희오빠 나한테 맞는 거 봤어 못 봤어!?”

    “흥! 나는 눈 안 보이거든?”

    자매의 싸움을 보던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유다희를 말렸다.

    “진정해. 맞는 말이잖아.”

    “마왕님! 이게 뭐가 맞는 말이에요! 쳐맞는 말이지!”

    “자자, 진정해. 13살이잖아.”

    나는 유세희의 의견에 비교적 동의하는 편이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나로 변장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가면에 음성변조기만 달고 내 경기 몇 개 본 감상만 남기면 되니까.

    나는 허리를 굽혀 유세희의 눈높이에 맞춘 뒤 물었다.

    “그래. 내가 마동왕이라는 걸 어떻게 인증하면 될까?”

    그러자 유세희는 당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의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 나조차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요구였다.

    “PVP 한 번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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