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261화 (261/1,000)
  • 262화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2)

    나는 저녁 시간이 약간 지났을 때쯤 해서 엄재영 감독의 집으로 향했다.

    용산구 이촌동에 있는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7시 무렵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대문이 자동으로 열리며 안의 파란 잔디밭이 드러났다.

    [어, 마왕이냐? 얼른 들어와!]

    엄재영 감독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작은 대나무밭과 연못 사이를 가로질러 현관으로 다가갔다.

    삐걱-

    문이 열리며 엄재영 감독이 파자마를 입은 채 나왔다.

    “어서 와, 감독 집은 처음이지?”

    맨날 유니폼 입은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풀어진 모습을 보니 또 새롭다.

    ‘명장’이라고 불릴 때의 날카로운 눈빛이 사라지자 그는 그냥 푸근한 옆집 아저씨였다.

    공(公)과 사(私)의 구분이 참 명확한 사람이다.

    ‘…근데 왜 나한테는 사(私)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엄재영 감독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저기 소파에 앉아 있어. 차 좀 내올 테니까. 아니면 가볍게 술 한 잔 할래? 좋은 위스키가….”

    “아녜요. 이따 저녁에 또 약속 있어요.”

    “뭐? 나 만나고 나서 또 어디 가? 양다리는 너무하잖아. 누군데?”

    나는 엄재영 감독의 질문에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여자요.”

    “뭐!? 야! 너 지금 조심해야 할 때야!”

    “맨날 조심해야 할 때래”

    “당연하지! 프로는 365일 24시간 연중무휴 조심해야 하는 거라고! 너 그러다 스캔들이라도 나면 어쩌냐, 지금 한창 잘 나갈 때에! 이게 다 형이 너 걱정해서 하는…….”

    “걱정 마요. 이렇게 가면에 음성변조기까지 하고 다니는데 별일 있겠어요?”

    내 말에 엄재영 감독의 기세가 약간 누그러들었다.

    “그래서. 누군데 그 여자?”

    “팬클럽 회장이에요. 뭐 후원금 관련 문제로 이야기할 게 있는가 봐요.”

    나는 진실과 거짓을 반씩 섞어 말했다.

    유다희가 오늘 저녁에 보자고 한 것은 사실이다.

    그녀가 내 팬클럽인 ‘마교’, 정확히는 ‘마동왕사랑교’를 이끄는 회장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후원금 문제로 보자고 했다는 것은 거짓.

    유다희가 나를 왜 만나려고 하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때.

    달그락-

    부엌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희선.

    엄재영 감독의 아내 분이다.

    나이는 이제 40대로 엄재영 감독보다 연상.

    하지만 실제로 보이는 나이는 남편보다 훨씬 더 젊어 보였다.

    그녀는 쟁반에 차를 담아내 오며 친절한 어조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남편에게 말씀 많이 들었어요. 게임을 그렇게 잘 하신다면서요? 팀 내에서 부동의 에이스시라고….”

    “아아, 아닙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또 틀린 말씀도 아니십니다.”

    “호호호. 듣던 대로 시원시원하시네요. 가식 없고 호탕하고. 덕분에 요 근래 남편 얼굴에 매일 웃음꽃이 만발해서 저까지도 득을 보고 있네요.”

    오희선은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안방으로 향했다.

    걷는 것을 보니 몸이 별로 좋지 않은 듯했다.

    “거, 누워 있으라니까 굳이 나와서는 차를 타고…참. 가만히 있으면 어련히 내가 알아서 하는데 말야.”

    “호호, 물은 끓일 줄 알고요?”

    유쾌하게 농담을 하며 안방으로 들어가는 아내를 엄재영 감독은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엄재영 감독은 엄청난 애처가다.

    내가 경기에서 이겼을 때도 나를 만난 것은 인생의 두 번째 행운이고 첫 번째는 아내와 결혼한 것이라고 외쳤을 정도니까.

    그래서 지금도 몸이 아픈 아내가 걱정되는 모양.

    “아내가 몸이 좀 약해. 매년 이 시즌이면 감기를 심하게 앓거든. 근데 요즘은 유난히 더 심하네.”

    엄재영 감독은 걱정스럽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

    나는 잠시 턱을 짚고 생각했다.

    내 눈은 오희선이 들어간 안방 문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앞으로의 미래를 안다.

    게임 관계자들의 사생활 역시도 내 주요 관심사 중 하나였으니까.

    ‘내 기억으로는…아마 오희선 씨가 곧 많이 아프실 거란 말이지.’

    근데 병명이 정확히 뭐였는지가 기억이 안 난다.

    ‘지금 괜히 설레발쳤다가는 의심을 사거나 불안감을 줄 수 있으니 미래 지식에 딱딱 맞춰서 움직여야겠다.’

    아직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 있으니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좋겠다.

    한편.

    쪼르륵-

    엄재영은 내 잔에 찻물을 따라주었다.

    “마셔 봐. 녹차다. 귀한 거야.”

    “구린내 나네요. 별점 세 개 드립니다.”

    “국K-1의 일본 팬들이 구단으로 보내 준 건데?”

    “…미슐랭 기준입니다.”

    내가 황급히 말을 바꾸자 엄재영 감독은 낄낄 웃었다.

    좀 친해지고 나니 이 사람, 은근 짓궂은 면모가 있다.

    이윽고, 그는 본격적으로 용건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곧 아챔이 열려. 너도 이때쯤 예상하고 있었지?”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챔’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몽골, 대만, 베트남, 필리핀, 인도,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위의 12개국이 모여서 최강자를 가리는 대회이다.

    3개국 1조로 조별예선을 치루는 리틀리그와 살아남은 4개국 중 1, 2, 3위를 가리는 빅리그로 나뉘는 것이 특징이다.

    1차 승점제 플레이 오프와 2차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리틀리그.

    그리고 빅리그는 토너먼트이다.

    역대급 규모로 열리는 제 1회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이니만큼 그 의의가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이번에 국가 대표로 출전하게 되는 팀은 이번 오뚝이배 프로리그의 우승자인 ‘국K-1’이었다.

    소속된 멤버들의 케스파 랭킹이나 개인전 실적을 고려한 조치, 거기에 나의 압도적인 퍼포먼스가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결과였다.

    엄재영 감독은 차를 한 잔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조심해.”

    “…뭘요?”

    “혐한세력 애들이 이번에 한국 대표팀을 암살하겠다고 난리야. 특히 일본 넷우익 쪽이 심상치 않다더라.”

    “…일본 녹차 마시면 그런 것도 알 수 있어요?”

    “그럴 리가. 요즘 막 협박 메일 보내고 뭐 난리도 아니니까 그렇지. 혹시나 해서 녹차도 검사해 봤는데 이상 없더라. 좋은 차야.”

    우리는 말을 마친 뒤 녹차를 한 모금씩 마셨다.

    이런 귀한 선물을 보내 주는 고마운 팬도 있는 반면 살해 협박을 하는 안티팬도 있다.

    그 때문에 괜히 다른 사람의 선의까지도 의심해 봐야 하니 이렇게 피곤할 수가 없었다.

    ‘정말 나라망신은 한두 놈이 다 시킨다니까.’

    굳이 일본에 한정짓는 것이 아니라 어디라도, 국적을 떠나 좋은 사람은 좋고 나쁜 사람은 나쁜 것 같다.

    엄재영 감독은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튼 조심해. 어디에서 언제 살수들이 올지 몰라. 다구리 맞고 죽어서 사망 패널티 몇 번 쌓이면 대회 나가서 성적 내기 어려울 것 아냐.”

    “…뭐, 그렇죠.”

    나는 피식 웃었다.

    뭐, 사실 내가 살수나 테러를 두려워할 급은 아니다.

    열이 오면 열이 죽고 백이 오면 백이 죽을 것이다.

    천 이상이 온다면 또 모르겠지만…애초에 내가 그런 움직임을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지.

    “…하지만 조심할게요.”

    “‘하지만’은 뭐냐? 어휴, 속 터져. 형이 너만 보면 웃다가도 울 것 같다.”

    “아챔에서 다시 웃게 만들어 드리면 되죠.”

    “하, 자식. 벌써 다시 웃음 나오려고 하네.”

    언제 인상을 찡그렸냐는 듯 배시시 웃으며 내 어깨를 팔꿈치로 툭 치는 엄재영 감독이다.

    *       *       *

    시간이 흘러 밤이 깊어 간다.

    엄재영 감독의 집을 나왔을 때가 10시 무렵이었다.

    나는 택시를 타고 마포로 향했다.

    꽉꽉 막히는 강변북로를 겨우 빠져나오자 시간은 어느덧 거의 11시에 가깝다.

    “30분 거리를 1시간 걸려 왔네. 이래서 서울은…….”

    으스스한 가면 때문에 택시 잡기도 더럽게 힘들었는데 오는 것도 더럽게 힘들다.

    뭐 아무튼, 약속 장소인 술집 뒤편의 벤치에 오자 낯익은 실루엣이 보인다.

    유다희, 그녀가 막 차 운전석에서 내리고 있었다.

    한데 차가 좀 이상하다.

    예전의 그 스포츠카는 어디가고 작은 중형차가 보인다.

    내 기억 속에도 있던 낡은 차였다.

    한때 재떨이를 열심히 비웠던.

    “무슨 일 있나?”

    나는 유다희를 향해 다가가며 물었다.

    “아, 안녕하세요.”

    유다희는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는 차 문을 닫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 차 바뀐 거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음. 그것도 포함해서 전반적으로.”

    “별 일 없어요. 저번에 그 슈퍼카는 지인 차 빌렸던 건데 지금은 반납한 상태고요.”

    “그런가.”

    나는 별 말 없이 유다희의 차로 들어가 조수석에 탔다.

    그녀 역시도 나를 따라 다시 운전석에 오른다.

    달칵-

    나는 습관적으로 차의 재떨이를 열고 길가에 있던 쓰레기통에 비웠다.

    “…….”

    유다희는 그런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나는 아차 싶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은 채 물었다.

    “팬 관리 일로 보자고 했었지. 정확히 무슨 말이야?”

    그러자 유다희는 잠시 주춤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게 저…다름이 아니라…….”

    손가락을 조물거리며 한참 동안이나 말끝을 늘이던 그녀.

    이내 유다희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말했다.

    “바쁘신 와중에 정말 죄송한 부탁인데…제 동생을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실까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동생이라면…유창 씨?”

    그러나 유다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걔 본명은 창희에요. 창희는 둘째고, 사실 막내가 하나 있어요.”

    처음 듣는 소리였다.

    하지만 뭐, 애초에 유다희와 유창이 남매 관계인 것도 회귀 이후에나 알았으니.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참 유다희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참 적다.

    가족 관계가 어떤지 재무 현황이 어떤지, 왜 어린 나이에 이런 사업에 연루되어 있는지 뭐 하나 뚜렷하게 아는 것이 없었다.

    “막내가 몇 살인데?”

    “이제 13살이요.”

    “한창 초등학교 다닐 나이겠네.”

    내가 묻자 유다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래라면 그랬겠지만…동생이 지금 좀 많이 아파서…….”

    “아프다고? 뭐 때문에?”

    “백혈병이에요. 급성 림프구 백혈병.”

    급성 림프구 백혈병은 어린 아이들에게 빈번히 발병하는 악질 질병이다.

    백혈구가 악성 세포로 변해 간, 비장, 림프계, 대뇌, 소뇌, 척수 등을 침범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말을 마친 유다희의 눈가가 붉어졌다.

    파르르 떨리는 몸.

    결국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죄송해요. 팬클럽 회장인데.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는 건데….”

    “…….”

    나는 팔짱을 낀 채 좌석에 몸을 기댔다.

    감정에 이끌려서 판단하면 안 된다.

    나는 상황을 냉정하게 짚기로 했다.

    “그래서 나를 부른 이유가 뭐야?”

    자칫 싸늘하게 들릴지도 모르는 대사.

    가뜩이나 고저가 없는 기계음으로 말하는 것이라 더욱 그렇게 들린다.

    하지만 내가 아는 유다희의 성격이라면 이런 드라이한 반응에 차라리 더 말을 편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주저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동생이 이번에 큰 수술을 받아야 해요. 진짜 중요한 수술인데… 성공률도 낮고….”

    “혹시 병원비에 관련된 거라면, 그 정도는 내가….”

    “아뇨 아뇨, 아녜요. 돈 문제가 아니라….”

    유다희는 붉어진 눈시울로 고개를 들었다.

    “동생이 수술 받는 것을 너무 무서워해서…이 수술을 받을 수 있게 설득을 해야 하는데….”

    설득이라.

    딱히 나의 전공은 아니다.

    나는 말을 논리적으로 잘 하는 스타일이 아니니까.

    가면 속으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문득 유다희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동생 말이, 평생의 소원이 있는데 그것만 들어주면 수술을 받겠다고 해서요.”

    평생의 소원? 그게 뭘까?

    무서운 수술을 앞둔 난치병 소녀.

    그런 아이가 마지막으로 품을 법한 소원이 뭔지 나로서는 짐작할 길이 없다.

    내가 말해 보라는 뜻으로 턱짓하자, 유다희는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왕님을 실제로 만나 보는 거래요.”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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