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258화 (258/1,000)

259화 아이돌 벗기기 (5)

-<붉은 깻잎무침 망토> 망토 / D

남부의 특산물 붉은 깻잎에서 추출한 섬유로 만들어졌다.

한번 걸치면 살에 닿는 부드러운 촉감에 중독되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벗을 수 없다.

아주 얇아서 여러 장이 한데 겹쳐져 있으면 한 장씩 떼기가 무척 어렵다고 한다.

-방어력 +5

-민첩 +5

-귀속 (특수)

옵션도 특성도 뭐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잡템.

니아 멤버들이 스파르타 전사들처럼 이 붉은 망토를 입고 나왔을 때만 해도 그 누가 이 아이템에 신경을 썼겠는가?

기껏해야 ‘훌러덩’ 특성을 보조하기 위해 구색을 맞춘 잡템 정도로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망토는 니아가 준비한 비장의 무기였다.

니아 멤버들의 붉은 망토가 한 데 겹쳐지는 것을 본 나는 싱긋 웃었다.

“좋은 타이밍이네. 드디어 쓰는구나.”

전에도 말했지만, 너무 구하기 쉽고 너무 구려서 아무도 안 쓰는 이 망토에는 치명적인 버그가 있다.

지금 니아는 그 시스템 오류를 십분 활용하고 있었다.

찰싹! 찰싹! 찰싹! 찰싹!

니아 멤버들은 망토를 한데 겹친 뒤 그것을 비비기 시작했다.

슥슥슥슥-

알몸의 여자 네 명이 한데 모여 등을 비비는 것은 실로 황당한 광경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벌어진 결과는 더욱 더 엄청난 것이었다.

놀랍게도 니아 멤버 네 명의 몸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흔히들 죽이 잘 맞는 사이를 두고 ‘일심동체(一心同體)’ 같다고 표현하곤 한다만, 이 경우에는 정말로 일심동체이다.

박보연, 박소담, 배수지, 윤두나.

그녀들은 한 몸이 되어 버렸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몸이 서로 겹치게 되어 중첩된 것이다.

4명의 등이 한데 붙어 합쳐져 버렸으니 머리도 팔도 다리도 여러 개다.

신화 속에는 머리가 셋이요 팔이 여섯인 ‘삼두육비(三頭六臂)’라는 요괴가 있다지만, 현실은 더했다.

사두팔비(四頭八臂)!

니아 멤버들 네 명은 하나로 뭉쳐 불가해의 육체를 갖게 된 것이다.

마치 아수라와도 같은 모양새.

물론 아수라와는 달리 네 개의 얼굴이 모두 예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한편.

나는 그것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비기+겹치기 버그는 역시 아직 유효하군.”

비비기, 겹치기 버그란 무엇이냐?

이것은 과거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크타스래프트에 나오는 버그와 유사한 개념이다.

이 게임 속에서 ‘일꾼’은 일을 하는 도중에 충돌 무시 효과를 가지게 된다.

여러 마리의 일꾼을 드래그한 뒤, 미네랄 혹은 가스를 찍거나 하면 일꾼들이 마치 하나인 것처럼 겹쳐진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일꾼 비비기’ 버그였다.

이렇게 하나로 뭉친 일꾼을 이용해서 막혀 있는 지형을 뚫어 정찰 및 공격을 하거나 식민지를 건설하는 등 다양한 전략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비슷한 것으로는 겹치기 버그를 들 수 있겠다.

일명 ‘X탈 겹치기’

공식 게임사에서도 합법적인 전략 중 하나로 인정해 더더욱 유명해진 버그.

다수의 공중 유닛과 시야 밖에 존재하는 전혀 다른 유닛을 한 부대로 지정한 뒤 움직이면 유닛들이 한 점으로 겹쳐져 이동하게 되는 현상이다.

…놀랍게도,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도 이와 비슷한 버그가 존재한다.

전부 알몸인 상태에서 이 붉은 깻잎무침 망토를 입었을 경우에만 발현되는 특수한 버그.

내가 니아 멤버들에게 훌러덩 특성에 이어 가르친 창발적 플레이다.

뭐, 어차피 며칠 뒤면 긴급 패치로 사라질 테니 이 방송을 본 시청자들이 따라하고 싶어도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훈련시킨 보람이 있네.”

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경기장 중앙의 대형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네 개의 머리와 여덟 개의 팔, 여덟 개의 다리를 가진 요괴로 변한 니아 멤버들은 전장의 한복판에 신처럼 우뚝 서서 군림하고 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니아 멤버들의 모습은 전혀 외설적이라거나 징그러워 보이지 않았다.

다만 경이로울 뿐.

이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창발적인 플레이에 관객들은 물론 50명의 포위자들마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다.

“…거의 몬스터 아냐, 이 정도면?”

이연지는 황당하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니아 멤버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움직였다.

“이거나 받아랏!”

1초당 8개의 주먹이 휘둘러진다.

오라오라오라오라오라오라오라오라오라오라오라오라!

포위망을 이루고 있던 이들이 너무나도 쉽게 박살났다.

이연지는 기겁해서 외쳤다.

“어, 어차피 다리가 꼬일 거야! 저런 문어 같은 다리로는 빨리 못 움직여!”

그녀는 원딜들을 모집해 니아를 요격할 생각인가 보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니아 멤버들은 아까보다 훨씬 더 빨라져 있었다.

움직임이 4배나 빨라진 니아는 먼 거리에서 마법이나 화살을 준비하는 적들에게 눈 깜짝할 사이에 접근했다.

무다무다무다무다무다무다무다무다무다무다무다무다!

소낙비처럼 퍼부어진 주먹은 가뜩이나 방어력이 약한 원딜들을 한 큐에 보내 버렸다.

이연지는 그것을 보고는 다시 한 번 경악했다.

“어떻게 저 많은 다리로 저렇게 빨리 움직이지!? 중간에 꼬여서 넘어질 법도 한데!?”

그러자 박보연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다리가 8개니까 땅을 박차는 힘도 8배 아니겠어?”

“그딴 계산법이 말이 되냐!? 문어도 아니고, 다리가 꼬이는 게 당연하잖아!”

“우리는 원래 4인 5각을 잘했거든. 이동에는 아무런 문제없어.”

독불장군 이연지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크레파스와는 달리, 원래 멤버들 간의 사이가 좋고 합이 잘 맞았던 니아이다.

케이블 방송에서 괜히 4인 5각 우승컵을 거머쥐었던 것이 아닌 것이다!

펑! 펑! 퍼펑!

니아 멤버들은 팽이처럼 빙글빙글 회전하며 가로막는 모든 적들을 쓸어버린다.

그 폭풍에 휘말린 아이돌들은 빙글빙글 돌며 저 멀리 날아갔다.

남녀 가릴 것 없는 알몸 상태로.

그리고 그 폭풍은 크레파스 역시도 피해 가지 못했다.

훌러덩- 훌러덩- 훌러덩- 훌러덩- 훌러덩- 훌러덩-

지금까지 다구리를 일삼던 크레파스 멤버 6인 역시도 홀딱 벗겨진 채 폭풍에 휘말려 날아가 버렸다.

“…크윽!”

오로지 독과 악만 남은 이연지를 제외하고는.

홀랑- 홀랑- 홀라당-

결국 폭풍에 휘말린 이연지는 장착하고 있던 아이템들을 모조리 잃고 말았다.

그녀 역시 완전한 알몸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바닥에 납작 엎드려 바위를 잡고 버티는 모양새로.

아무리 알몸 가리기 필터가 적용되어 있다고 해도, 맨땅에 엎드려 홀랑 벗고 평형을 하고 있는 모습은 추할 수밖에 없다.

예쁘건 몸매가 좋건 간에 이 자세를 하고 있으면 개구리 같아 보이니 말이다.

“…용서 못 해!”

이연지의 눈에 핏발이 섰다.

순간, 게임을 중계하고 있던 전용진 캐스터가 드디어 입을 뗐다.

(그동안은 게임 내용이 중계하기가 조금 뭣한 방향으로만 흘러가 계속 ‘어…’, ‘아…’라는 말밖에는 못하고 있었다.)

[아, 이연지 선수! 지금 인벤토리에서 새로운 아이템을 꺼내 장착했습니다!]

[어엇? 그런데 저것은 대회 규정에 어긋난 건데요? 규정상 대회 시작 당시에 장착하고 있던 아이템이 아니면 경기 중간에 벗고 입을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아 심지어 인벤토리에 있던 ‘예비용 무기 아이템’으로 보이는데요. 저건 무조건 반칙이죠. 몰수패가 확실해 보입니다.]

중계진의 말대로, 이연지는 지금 반칙을 하고 있었다.

인벤토리에 보관하고 있던 양손 대검을 꺼내 든 것이다.

-<쌍두대검(雙頭大劍)> 양손무기 / B+

기형 대검의 한 종류.

검극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어서 마치 두 마리의 뱀이 길게 뒤엉켜 뻗어 있는 것 같다.

-물리 공격력 +1,250

특성이고 뭐고 없는, 그저 깡 공격력만 무식하게 높은 양손무기.

“이젠 게임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어, 이 굴욕은 용서 못한다구!”

이연지는 빽 소리쳤다.

하지만 그것을 본 박보연은 혀를 끌끌 찼다.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반칙을 하면 안 되지. 공정하게 살자, 우리.”

“닥쳐! 어차피 이건 게임이잖아!”

“게임이든 현실이든 다 똑같아. 인성 드러나는 건 말야.”

“아까랑 말이 다르잖아! 게임이랑 현실은 구분하라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박보연은 이제 제법 능글능글하게 이연지를 가지고 놀 줄 안다.

부들부들 떨던 이연지는 이내 괴성을 지르며 양손 대검을 휘둘렀다.

“으아아아아!”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는 이연지.

들고 있는 양손 대검만은 무시무시하다.

저것에 맞으면 아무리 니아라고 해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하지?”

“그냥 부딪칠까? 우리도 공격력 꽤 올랐잖아.”

“맨손으로는 조금 부담스러운데.”

박소담과 배수지, 윤두나는 짧은 회의 끝에 박보연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그러자 박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가 그랬잖아. 무기 없으면 짱돌이라도 들라고.”

그녀의 말에 니아 멤버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전장은 ‘칼의 고원’

수없이 많은 무기들이 주인을 잃은 채 대지에 거꾸로 꽂혀 있다.

탁- 탁- 탁- 탁-

강력한 힘이 깃든 여덟 개의 손이 각각 무기를 잡았다.

맵의 일부, 오브젝트로 취급되는 무기들이니 이걸 쓴다고 해서 반칙은 아니다.

“앞으로 크레파스를 쓰러트리는 데 단 1초의 시간도 허비하지 않겠다.”

박보연을 필두로 한 니아 멤버들.

그녀들은 네 개의 얼굴과 여덟 개의 팔, 그리고 여덟 개의 무기를 들어 이연지와 맞섰다.

콰-쾅!

허공에서 울려 퍼지는 요란한 굉음.

그리고 산산조각으로 박살나는 파편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흙구름 사이로 이내 한 개의 실루엣만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머리 하나, 팔 두 개, 다리 두 개…….

그것을 본 전용진 캐스터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외쳤다.

[아앗! 일어났습니다! 지금 최후의 생존자가 일어났어요! 그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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