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257화 (257/1,000)
  • 258화 아이돌 벗기기 (4)

    “꺄아아아악!”

    이연지는 자신의 하반신을 가린 채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광경을 바라보는 박보연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다.

    “…묻잖아. 이제 누가 변태냐고.”

    “이, 이익!”

    이연지는 붉게 달아오른 표정으로 박보연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박보연은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뭘 그리 부끄러워해? 어차피 네 몸은 그냥 살색의 픽셀이야.”

    “말이 되냐 이 변태야! 어쨌든 알몸은 알몸이잖아!”

    “게임이랑 현실 구분 좀 하자. 너처럼 구분 못 하는 애들 때문에 우리 같은 게이머들이 욕먹는 거야.”

    박보연은 언젠가 사부에게 들었던 대사를 읊어 주었다.

    그리고는 오연한 기색으로 말했다.

    “나는 여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게이머야. 벗고 다니는 건 게임을 잘한다는 증거.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지.”

    동시에, 박보연을 필두로 한 니아 멤버들이 전장에 본격적으로 난입했다.

    쫘아아아악-

    살색의 파도가 갈라진다.

    졸업식 후 학사모들이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수많은 아이템들이 허공으로 팔랑팔랑 나부끼고 있었다.

    “등짝! 등짝을 보자!”

    맨 앞에서 광전사처럼 날뛰고 있는 이는 바로 윤두나였다.

    제일 부끄러워하던 주제에 지금은 제일 신났다.

    한편. 그런 니아를 마주한 아이돌들은 정신없이 도망치기 바쁘다.

    아이템이 삭제되는 줄 알고 도망가거나, 알몸이 되기 싫어서 도망가거나, 아니면 그냥 순수하게 무서워서 도망가거나.

    하지만 개중에는 알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투지를 잃지 않는 용감한 이들도 있었다.

    니아와 마찬가지로 절박한 무명이거나 아니면 에라 잘됐다 하고 자신을 내려놓는 이들이다.

    그렇게 자신을 내려놓고 싸우는 이들에게는 아무래도 카메라가 한 번이라도 더 갈 수밖에 없다.

    잃을 게 많은 이들은 뒤로 빠지고 잃을 게 없는 이들이 중심에 선다.

    세상의 질서, 계급, 유명세가 모두 전복되고 새로운 질서가 창조되는 모습.

    알몸의 힘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한편.

    “…….”

    경기장 밖에는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아이돌들이 나체로 뒤엉켜 서로 엎치락뒤치락 싸우는 모습.

    수위가 높은 일본 예능에서도 볼 수 없는 극도로 희귀한 광경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이라거나 외설적이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몸이 모자이크에 가까운 도트, 픽셀로 처리되는 거야 그렇다고 쳐도…….

    니아.

    그녀들이 워낙 압도적인 기세로 전장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나체의 군주!”

    “알몸의 여왕!”

    “발키리나 아르테미스 같다. 멋져…….”

    고대 신화를 그린 유화 속에는 알몸의 여성들이 빈번하게 등장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외설스럽다고 하는 이들은 없다.

    이처럼 관중석의 분위기는 의외의 반응을 내놓고 있었다.

    과연, 팬덤의 여론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이 맞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거대한 흐름의 물꼬를 텄다.

    “…근데 약간 좀… 고인물스럽지 않아?”

    그것이 시작이었다.

    “맞다! 저 플레이를 어디서 봤나 했더니!”

    “고인물이다! 고인물!”

    “완전 고인물 여자 버전이잖아!”

    “여자 고인물들이 나타났다!”

    여론이 급격하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전에도 언급된 바 있지만, 이곳에 모인 팬들은 단순히 아이돌만 좋아하는 게 아니다.

    게임 자체도 좋아하는 진성 겜덕들의 수가 꽤 많았다.

    [나는 여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게이머야.]

    아까 박보연이 한 대사가 관중석에 메아리쳤다.

    이렇게 진지한 태도로 게임에 임하는 니아의 태도는 아무래도 관중들에게 호감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에 요즘 한창 인기 절정의 고인물 메타라니!

    …심지어.

    “어흠.”

    니아의 응원석에 선글라스를 낀 채 홀로 앉아 있는 이 몸의 존재감 어필까지!

    “어엇! 고인물? 진짜 고인물 선수다!”

    “고인물 님은 선수 아니셔! 그냥 스트리머셔!”

    “알 게 뭐야! 프로보다 잘 하면 선수지!”

    “니아와는 무슨 관계세요! 고인물 씨!”

    팬들 사이에 흥분의 물결이 서서히 번져 간다.

    하나둘씩 내게로 다가와 사진이나 사인을 요구하는 이들.

    ‘…아이돌 대회에 와서 내가 사인을 해 주게 되다니.’

    예전에 MS타운 엔터와 크레파스가 무시하던 인터넷 방송의 힘을 새삼 느낀다.

    나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피식 웃었다.

    인터넷 방송 생활을 좀 하다 보니 이제 얼추 눈이 생겼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형성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는 눈.

    아직은 그리 대단한 수준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뚜렷하게 느껴진다.

    아이돌 E스포츠 선수권 대회에 모여든 거대한 팬덤들 사이에 기묘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뭐든 간에 니아에게 좋은 쪽으로 말이다.

    *       *       *

    한편.

    전장에 있는 이들은 경기장 밖의 상황 따위는 아득히 잊어버린 채 무아지경으로 싸우고 있었다.

    스크린에 예쁘게 보이려고 가식적으로 웃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협력하거나… 이 모든 가면들은 이미 싸그리 벗겨진 지 오래다.

    크레파스 vs 니아

    전장의 중심에 있는 크레파스와 니아의 태도는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었다.

    옷이 군데군데 벗겨진 것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크레파스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내 보여 주고 있는 니아.

    전장의 분위기는 점점 기울어진다.

    아무리 템빨로 무장했다고 해도 눈앞에 마주한 변태 메타를 이기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심지어.

    텅-

    박보연의 주먹에 맞은 서서연이 비명을 질렀다.

    “꺄악! 맨 주먹인데 공격력이 왜 이렇게 센 거야!”

    그녀의 말대로였다.

    니아 멤버들은 분명 스파르타 전사처럼 붉은 망토 한 벌만 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리 공격력이 엄청나다.

    박소담은 특유의 유연함을 이용해 상대방의 관자놀이에 하이킥을 날린다.

    쾅!

    그럴 때마다 강철로 제작된 투구가 찰흙덩어리처럼 일그러졌다.

    배수지는 맨손 수도(手刀)로 상대방의 칼을 받아냈다.

    와그작-

    놀랍게도 금이 간 쪽은 칼이었다.

    윤두나의 주먹과 거대한 철퇴가 맞부딪쳤다.

    태앵!

    철퇴는 반탄력에 의해 뒤로 확 튕겨나갔다.

    “…세상에!”

    크레파스 멤버들은 경악해야 했다.

    니아 멤버들은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게 아니다.

    어마어마한 물리 공격력!

    그것이 니아 멤버들의 날렵하고 정교한 게임 컨트롤에 날개를 달아 주고 있었던 것이다.

    ‘훌러덩’

    ↳적을 공격하는 데 성공하거나 적에게 공격당했을 경우 일정 확률로 자신과 상대방의 아이템 하나를 랜덤하게 떨굽니다.

    ※떨굴 수 있는 아이템은 현재 착용하고 있는 장비의 경우에 한하며 벗겨진 아이템의 소유권은 여전히 본인에게 있되 24시간 동안은 재착용이 불가능합니다.

    ※본인이나 적의 아이템을 떨굴 때마다 공격력이 1씩 증가하며 이 힘은 24시간 동안 지속됩니다.

    그렇다.

    니아 멤버들이 패시브로 보유하고 있는 훌러덩 특성은 자신이나 상대방의 아이템이 떨어질 때마다 공격력을 1씩 증가시킨다.

    니아 멤버들은 애초에 처음 시작할 때 가볍지만 많이 껴입을 수 있는 아이템들을 수도 없이 껴입고 대회에 참가했고, 그것들을 서로 벗겨 주는 과정에서 물리 공격력을 일정 수위까지 높여 놓은 것이다.

    그 뒤로 수많은 적들의 옷을 벗겨오는 과정에서 패시브 물리 공격력이 극한까지 개화된 상태.

    어지간한 C+~B등급 이상 무기의 공격력을 맨몸뚱이로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익! 이거 사기잖아!”

    이연지는 박보연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크레파스 멤버들은 7명이나 된다.

    아직 아이템도 다 벗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몸 상태인 니아 멤버들 4명에게 완전히 위축되어 있었다.

    결국, 이연지는 비장의 수를 쓰고야 말았다.

    “오빠들! 저 좀 도와주세요!”

    그녀가 쳐다본 곳은 다른 보이그룹 아이돌들이 있는 곳이었다.

    “어? 우리?”

    이연지의 외침을 들은 아이돌들이 멍한 표정을 짓는다.

    도와달라니? 이런 적자생존의 전쟁터에서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이연지는 알고 있었다.

    “이 경기는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에요! 동맹도 배신도 자유롭다구요! 프로리그에서도 다구리가 심심찮게 벌어지잖아요!”

    그녀의 말은 맞는 말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는 것이 당연하다.

    “…….”

    “…….”

    “…….”

    몇몇 아이돌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혹은 걸그룹 크레파스와 좋은 관계로 남기 위해, 혹은 재미로.

    다양한 이유로 몰려드는 아이돌.

    그들은 니아를 집중공격하기 위해 한군데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이 흐름에 동참하지 않는 아이돌의 수도 많았다.

    “…엥? 여러 그룹이 한 그룹 몰매 주는 건 좀 비겁하지 않나?”

    “우리 팬들은 그런 거 싫어할 거야.”

    “저번 프로리그에서도 다구리가 있긴 있었지만, 그때도 팬들 여론이 되게 안 좋았던 것 같은데? 졸렬하다고 말야.”

    “프로들이야 성적에 목숨 거는 게 당연하니 그럴 수도 있다지만, 우리는 아이돌이잖아? 아무리 자유도 높은 경기라고는 해도 다구리는 이미지에 안 좋지.”

    어찌됐던 다수가 소수를 핍박하는 것이니 보기에 안 좋다.

    요즘 학교폭력 같은 화제로도 민감하니 10대의 지지를 받는 아이돌로서는 더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크레파스는 꽤나 많은 지지를 이끌어 냈다.

    크레파스 멤버 7인을 포함한 많은 수의 아이돌들이 니아를 둥글게 포위했다.

    정치질, 선동, 다구리.

    모든 게 생중계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는 별로 좋은 그림이 아니다.

    경기장 밖에 있는 팬들의 눈살은 찌푸려졌지만, 이연지는 그런 것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복수해 주겠어. 내 옷을 벗긴 걸.”

    그녀는 독 오른 표정으로 니아를 노려보았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당하고는 못 배기는 그 성격에 제대로 불이 붙었다.

    크레파스 측에 붙은 사람들은 언뜻 봐도 20명 이상으로 보인다.

    니아가 아무리 게임을 잘한다고 해도 5배가 넘게 차이나는 이 쪽수를 상대로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한편.

    그 광경을 전광판으로 지켜보고 있던 아이대 조연출이 우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혜란 PD님. 이러다 큰일 나는 거 아닌가요? 제재를 가하거나 하는 게 맞아 보이는데…”

    하지만 메인 PD인 이혜란은 오히려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그는 독 오른 크레파스 멤버들의 표정을 보며 씩 웃었다.

    “사람들은 우상의 탄생보다는 우상의 몰락에 열광하지. 한번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래도. MS쪽 애들이잖아요?”

    “알 게 뭐야. 뭐 받은 것 있어? 그걸 왜 네가 신경 써 줘.”

    이혜란 PD는 눈을 빛내며 카메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냥 좋은 장면만 건지면 돼. 가능하면 아이대 취지에 맞게 신인 하나 발굴해 띄우고 싶은데. 니아라….”

    이혜란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기서 쟤네가 뭐 하나 딱 해서 치고 나오면 그것만한 그림이 또 없을 텐데. 하 참, 그렇게만 되면 팍팍 밀어 줄 수 있는데 말이야.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좀 힘들겠지?”

    이혜란 PD는 아쉬운 기색으로 중얼거린다.

    누가 봐도 이제 니아에게는 가망이 없다.

    한번 크게 반짝하고 이대로 사라지는 길뿐이다.

    …하지만!

    정작 니아 멤버들은 태연한 표정으로 포위망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나 예상대로네.”

    “어떻게 이때쯤 해서 다구리가 들어올 거라고 딱 예상하셨을까?”

    “그러게. 진짜 지금까지 사부가 말했던 대로 다 됐잖아.”

    “진짜 굉장하다. 약간 신기 있는 거 아냐?”

    포위망을 가동한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니아는 아직 히든 카드를 제대로 뽑지도 않았다.

    훌러덩 특성은 추진력을 얻기 위한 무릎 꿇기에 불과하다.

    진짜는 바로 지금부터인 것이다.

    차차차착!

    니아 멤버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녀들은 너덜너덜해진 망토 네 개를 한 곳에 맞대었다.

    “……?”

    50명의 아이돌들은 니아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하나라도 살려면 포위망을 뚫고 멀리 도망가야 하는데 포위망의 중심으로 네 명이 다 찰싹 붙는 것은 뭘까?

    하지만.

    전장에 서 있는 모든 이들은 이내 입을 딱 벌린 채 경악해야 했다.

    니아 멤버들이 한 곳에 모이는 순간, 눈을 의심하게 만들 정도의 대이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D급 아이템인 ‘붉은 깻잎무침 망토’

    지금껏 단순히 훌러덩 특성으로 인한 탈의를 막기 위해, 혹은 훌러덩 특성의 공격력 스텍을 쌓는 것을 보조하기 위해 착용한 줄 알았던 똥쓰레기 귀속 아이템.

    하지만 놀랍게도…이것은 니아를 우승으로 이끌어 줄 ‘신의 한 수’였던 것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