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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256화 (256/1,000)
  • 257화 아이돌 벗기기 (3)

    아이돌 E스포츠 선수권 대회가 열리고 있는 고양 실내체육관.

    체육관 안과 밖은 모두 술렁이고 있었다.

    경기장의 안쪽 관중석과 바깥 쪽 외벽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을 본 관중들은 일제히 입을 모아 말했다.

    “…니아가 누구야?”

    맨 처음에는 아무도 그녀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시선이 간다.

    아니, 시선이 ‘갈 수밖에’ 없다.

    펄럭-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걸어오는 네 명의 여전사들.

    그녀들은 망토로 감싼 몸을 날쌔게 움직여 다른 아이돌들을 연달아 제압했다.

    엄청난 스피드와 공격력.

    그 때문에 그녀들을 맞상대하는 아이돌들은 전부 리타이어 되었다.

    칼의 고원 북쪽 전장을 제압한 그녀들은 빠른 속도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고 이내 전장의 중앙에서 크레파스와 맞붙게 된 것이다.

    “…뭐야?”

    이태민은 멍한 표정으로 북쪽을 바라보았다.

    탁! 탁! 탁! 탁!

    네 명의 여자가 언덕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했다.

    별로 특별할 것은 없는 모양새다.

    장갑도 신발도, 그 흔한 귀걸이 등의 액세서리도 없다.

    한쪽 손을 포함한 전신이 붉은 망토에 휘감겨 있어 마치 인도의 옷 사리(Sari)를 연상케 했다.

    망토의 품이 넉넉하여 그 안에 어떤 장비를 착용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상당히 수상해 보였다.

    “…으음.”

    이태민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니아 멤버들이 착용하고 있는 붉은 망토의 정체를 금방 알아보았다.

    -<붉은 깻잎무침 망토> 망토 / D

    남부의 특산물 붉은 깻잎에서 추출한 섬유로 만들어졌다.

    한번 걸치면 살에 닿는 부드러운 촉감에 중독되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벗을 수 없다.

    아주 얇아서 여러 장이 한데 겹쳐져 있으면 한 장씩 떼기가 무척 어렵다고 한다.

    -방어력 +5

    -민첩 +5

    -귀속 (특수)

    ‘저 망토는 그냥 몸을 가리기 위해서만 쓰이는 D급 아이템일 텐데? 귀속이라서 한번 착용하면 다 찢어져 사라질 때까지 벗을 수도 없는 똥템…저걸 끼고 대회에 나왔다고?’

    저 망토를 걸칠 인벤토리 칸에 다른 도움이 되는 장비를 하나 더 걸치는 게 무조건 이득일 텐데 왜 저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오빠가 빨리 끝내 줄게.”

    이태민은 칼을 들고 앞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스팍-

    맨 앞에 있던 작은 체구의 여자가 눈 깜짝할 사이에 이태민의 턱 밑으로 파고들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박보연.

    그녀는 맨손으로 이태민을 막아섰다.

    그리고.

    퍼펑-

    칼이 지나가고 난 궤적을 그대로 역으로 타올라 이태민의 복부를 가격했다.

    박보연의 앙증맞은 손바닥이 이태민의 배를 스치고 지나갔다.

    당연하게도, 이태민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하하! 맨손으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내 갑옷 방어력이 얼마나 되는 줄…억!?”

    하지만 이태민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박보연의 손이 배에 닿는 순간.

    훌러덩-

    자기의 몸을 견고하게 감싸고 있던 갑옷이 홀딱 벗겨져 버렸기 때문이다.

    탱- 탱그랑!

    갑옷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뭐, 뭐야 이게?”

    이태민은 갑옷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황급히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박보연은 맞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뒤로 확 빼 이태민의 사정거리에서 물러났다.

    놀랄 만큼 빠른 반사신경이었다.

    찌직-

    이태민의 칼이 박보연의 망토 끝자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찌 되었건 남의 아이템에 상해를 가했으니 데미지를 입힌 것으로 판정된다.

    그러자 한 번 더.

    훌러덩-

    이번에는 이태민이 장비하고 있던 칼이 벗겨졌다.

    “아니 이게 무슨!? 이 칼이 얼마짜린데!?”

    현질을 엄청나게 해서 산 칼이니만큼 잃어버리면 타격이 너무 크다.

    이태민은 황급히 인벤토리를 열어 보았다.

    하지만 다행이도 아이템에 대한 소유권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칼은 바닥에 떨어져 있지만 동시에 인벤토리 한 구석에서 얌전히 잠자고 있는 것으로 표시된다.

    이태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이다. 바로 다시 장비를…….”

    하지만.

    이태민은 그 칼을 다시 손에 쥘 수 없었다.

    ‘훌러덩’

    ↳적을 공격하는 데 성공하거나 적에게 공격당했을 경우 일정 확률로 자신과 상대방의 아이템 하나를 랜덤하게 떨굽니다.

    ※떨굴 수 있는 아이템은 현재 착용하고 있는 장비의 경우에 한하며 벗겨진 아이템의 소유권은 여전히 본인에게 있되 24시간 동안은 재착용이 불가능합니다.

    ※본인이나 적의 아이템을 떨굴 때마다 공격력이 1씩 증가하며 이 힘은 24시간 동안 지속됩니다.

    그렇다.

    훌러덩 특성에 당해 벗겨진 아이템은 24시간 동안 봉인 당한다.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 대회의 규정 상 대회 시작 전에 미리 등록해놓은 장비를 제외하면 중간에 새로운 장비로 교체할 수 없게 되어 있으니 이태민은 얄짤없이 갑옷과 칼 없이 경기를 계속 진행해야 한다.

    “…아, 이게 말이 되냐고! 개억지!”

    이태민은 계속 뒤로 물러났다.

    칼과 갑옷이 없으니 그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맨몸 맨주먹이었던 박보연에게는 아무런 위화감이 없다.

    상대방의 공격과 방어를 봉인했으니 남은 것은 그저 요리하는 것 뿐.

    그녀는 인정사정없었다.

    박보연은 손바닥으로 계속 이태민의 팔이나 다리 등을 툭툭 건드렸다.

    굳이 HP를 깎아 낼 필요도 없다.

    훌렁- 훌러덩-

    그럴 때마다 이태민의 아이템들이 하나씩 계속 벗겨져 나간다.

    어느새 바닥에 수북하게 쌓인 아이템들.

    그것은 단순히 이태민 하나만의 것이 아니다.

    북쪽 전장에 있던 모든 아이돌들이 니아의 손에 의해 수치사(?)를 당한 결과였다.

    “으악! 그, 그만! 항복! 항복! 내가 졌어!”

    마지막 하의 하나만 남게 된 이태민은 결국 두 손을 들고 항복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니아의 희생자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으윽, 이런 곳에서 팬 서비스라니.”

    이태민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주저앉았다.

    뭐 알몸이 되었다고 해도 기본적으로는 도트니까 상관은 없다만 미묘하게 수치심이 든다.

    한편, 박보연은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몸을 가리고 있던 망토는 역전의 용사가 입었던 그것처럼 너덜너덜해진 채 바람에 휘날린다.

    ‘…사부 밑에서 죽도록 구른 효과가 있었어!’

    박보연은 며칠 전의 일을 회상했다.

    *       *       *

    ‘자 이거 한 벌씩 입어라.’

    고인물이 니아 멤버들에게 나눠준 것은 붉은 망토였다.

    방어력 5짜리 귀속 아이템.

    한번 입으면 다 너덜너덜해져 찢어질 때까지 벗을 수 없는 망토.

    심지어 여러 장이 겹쳐져 있어 한 장씩 떼기도 무척 힘들었다.

    ‘…이걸 왜요? 저희들 이제 몸 안 가려도 되는데?’

    니아 멤버들은 그간의 훈련을 통해 모든 수치심을 버린 상태였다.

    전장에 나가는 데 남녀가 어디 있으며 노출도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다.

    옷이 홀딱 벗겨진 채 개똥밭에 굴러도 생존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걸그룹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당당한 게이머로서 실적을 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고인물은 고개를 저었다.

    ‘몸을 가리라고 주는 게 아냐. 적의 공격을 받아내라고 주는 거지.’

    ‘아!’

    니아 멤버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훌러덩 특성은 적에게 공격당했을 때도 발동된다.

    상대는 무기를 들고 있으니만큼 몸에 닿으면 아무래도 데미지가 클 수밖에 없으니 피하면서 망토 자락이라도 들이대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고인물은 이내 은밀한 어조로 속삭여왔다.

    ‘그리고 이 망토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는데…….’

    그것은 마치 악마처럼 깊고 달콤한 목소리.

    적어도 박보연을 비롯한 니아 멤버들에게만큼은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       *       *

    “좋아! 회상 끝!”

    새삼 고인물에게 감사하던 박보연은 다시 전장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옆에는 든든한 동료들인 박소담, 배수지, 윤두나가 서 있었다.

    펄럭-

    너덜너덜해진 망토가 북풍을 따라 길게 휘날린다.

    전장에 우뚝 서 있는 네 명의 전사.

    그녀들의 앞에는 지금까지 파죽지세로 전장을 지배해 왔던 크레파스 멤버 7인이 서 있었다.

    크레파스 VS 니아

    “…….”

    박보연은 눈앞에 있는 크레파스 멤버들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MS타운 엔터테인먼트의 막대한 자금력으로 고등급 아이템을 쓸어 모아 강해진 크레파스.

    거기에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탱커 중 하나인 류요원의 스타일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거기에 인원수도 니아보다 두 배 가까이 많다.

    어느 모로 봐도 니아가 불리한 상황.

    “…하지만 문제없어!”

    박보연은 당차게 외쳤다.

    소속사 지원. 팬덤의 규모. 현질. 템빨. 쩔…….

    그런 것 다 집어치우고 노템 대 노템으로 붙는다면?

    노템전에서만큼은 자신 있다.

    컨빨.

    스스로 쌓아 온 기량과 노력으로 솔직하게 부딪칠 수 있다면 그 누구에게라도 지지 않을 자신과 패기.

    거기에 잃을 게 없는 자 특유의 오기가 발동했다.

    어차피 이 넓은 경기장 안에 자신을 응원하는 팬 하나 없다.

    아무에게도 기대 받지 못한다는 생각은 오히려 니아 멤버들의 가슴에 독을 심어 주었다.

    그리고 가슴속 깊은 곳에 남아있던 일말의 수치심조차도 말려버렸다.

    …바로 그때.

    그런 니아 멤버들을 향해 조소를 날리는 이가 있었다.

    “…진짜 천박한 것 봐. 걸그룹 망신 혼자 다 시키네.”

    크레파스의 리더 이연지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빈정거렸다.

    “뭔 생각으로 그렇게 다 벗고 나왔는지는 모르겠는데. 꼭 그렇게 벗어야 뜬다고 생각해? 3류야? 자신 없어? 변태들 대상으로 어그로 끌어 보려는 모양인데 그런 얄팍한 싸구려 수작이 어디까지 통할 것 같….”

    하지만.

    이연지는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스팟-

    붉은 바람이 한번 부는가 싶더니.

    “꺄아아아아악!?”

    어느새 자신의 상의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황급히 두 손으로 몸을 가린 이연지의 뒤에서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박보연.

    어느새 이연지의 뒤를 잡은 그녀가 음산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자. 이제 누가 변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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