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아이돌 벗기기 (2)
“어머나. 이게 누구야?”
이연지는 나를 보며 썩은 미소를 날렸다.
그녀의 노골적인 비웃음은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를 절묘하게 관통해 나에게 닿고 있었다.
“어디 코치로 가셨나 했더니 여기 계셨네. 그때 기세 좋게 문 박차고 나가더니… 온 곳이 고작 여기?”
그녀는 실실 웃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먹고 있는 도시락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윽. 그 개밥은 뭐야?”
이연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뭐 상표도 없는 도시락을 먹고 앉았어, 배탈 나게. 요즘은 도시락 잘 되어 있어서 배달시켜도 그것보다 훨씬 더 잘 나와.”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 하나를 내게 툭 던졌다.
요즘 한창 핫한 젊은 요리사 백창열의 얼굴이 상표에 박혀 있는 도시락이다.
희망소비자 가격은 7,400원.
“팬들 주고 남은 건데 그거라도 먹던가. 호호호.”
이연지는 가식적인 웃음을 지은 채 자리를 홱 떠나가 버렸다.
한편.
“…….”
박보연은 차게 식어 버린 도시락들을 내려다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뭐, 여기서 기분이 더 최악일 수 있나?”
“…없죠.”
“그럼 앞으로 좋아질 일만 남았군 그래.”
내가 박보연의 어깨를 탁 짚는 순간.
번쩍!
그녀 역시도 고개를 들었다.
힘든 일을 겪었을 때 주저앉아 우는 사람이 있고 오기와 독기로 이를 가는 사람이 있다.
굳이 따지자면, 박보연은 후자에 가까웠다.
“지금부터 보여 주자고. 잃을 게 없는 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네, 사부!”
내 말에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는 박보연이다.
그래, 이래야 힘들게 가르친 보람이 있지.
* * *
[자! 지금부터! 경기! 시작합니드아아아아!]
전용진 캐스터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아이들 E스포츠 선수권 대회의 서막이 올랐다.
위이이잉-
총 100명의 아이돌이 고지대에 위치한 평원에 소환되었다.
오늘의 맵은 이전에 공지한 대로 ‘칼의 고원’
산이 중간에 푹 깎여 나가 만들어진 평지에 수많은 칼과 창, 도끼, 화살들이 박혀 있다.
하나같이 지독하게 낡고 녹슬어 버린 무기들.
원래라면 성불하지 못한 패잔병들이 그 사이를 떠돌아야 하지만 지금은 대회를 위해 몬스터들이 싹 정리된 상태.
쿵! 쿵! 쿵! 쿵!
그곳에 수많은 아이돌들이 떨어졌다.
[사랑해요 형! 우윳빛깔 BTS!]
[얘들아 삼촌이 응원한다! 특히 연지!]
[블랙아웃 한주민 파이팅! 꺄아아아아!]
[크레파스 누나들 힘내요오!]
팬들이 마지막으로 외치는 소리.
하지만 이제 팬들의 응원은 더 이상 아이돌들에게 닿지 않는다.
게임에 들어온 순간 아이돌을 지켜주던 팬덤의 힘은 전부 사라졌다.
이제는 아이돌이 아니라 한 사람의 게이머로서 ‘살아남아야’ 한다.
칼의 고원 서쪽.
제일 먼저 치고 나온 이는 요즘 한창 잘 나가는 아이돌 그룹 ‘블랙아웃’의 한주민이었다.
그는 삼촌팬 출신에서 바로 아이돌로 데뷔한, 통칭 ‘성덕’이다.
성공한 덕후를 뜻하는 신조어다.
“나의 여신님들을 노리는 놈들은 일찌감치 제거해 주마!”
한주민은 한 자루 창을 사용하는 창술사.
그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다른 아이돌들을 박살내며 돌진했다.
한주민은 원래 게임을 즐겨 하기로 유명했고 그 때문에 캐릭터의 레벨은 꽤 높은 축이었다.
거기에 소속사 글로번이 밀어 준 덕에 템빨 역시 상당한 수준.
심지어 본인의 센스와 피지컬 역시 준 프로급이다.
퍼펑!
한주민이 휘두른 창에 다섯 명이 넘는 아이돌들이 나가 떨어졌다.
까강! 까가강!
플레이어들이 나가 떨어지자 대지에 박힌 무기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린다.
곳곳에서 불똥이 살벌하게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때.
한주민은 전장의 한복판에서 강적을 마주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동쪽 전장 끝에서부터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일곱 명의 여전사.
이연지, 전혜민, 노고운, 이은혜, 서서연, 서지아, 김누리.
바로 걸그룹 크레파스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이연지가 생긋 웃으며 한주민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한주민의 두 눈이 핑크빛 하트로 변해 버렸다.
“아아, 나의 여신님들을 전장에서 보게 되다니.”
그렇다. 한주민은 크레파스의 삼촌팬 출신이었던 것이다.
“이왕 만나게 된 거 정정당당하게 겨뤄 봐요!”
이연지는 씩 웃으며 칼을 빼들었다.
그때.
“연지야, 혼자서는 힘들 것 같은데.”
“으흠, 으흠. 조금 도와줄까?”
옆에서 전혜민과 노고운이 넌지시 물어온다.
블랙아웃은 유명 아이돌 그룹이고 거기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한주민과 싸운다는 것은 카메라에 집중적으로 잡힌다는 것을 의미한다.
방송 분량을 생각하면 당연히 욕심이 날 수밖에.
하지만 이연지는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얘들아, 주제파악 빨리 하고 측면 엄호나 해.”
“…알았어.”
이연지의 싸늘한 대답을 들은 전혜민과 노고운은 조용히 뒤로 빠졌다.
크레파스 멤버들 전체가 아예 이연지를 서포트 한다는 느낌으로 병풍처럼 펼쳐졌다.
멤버들 중 가장 행사가 많고 방송 출연 및 CF의뢰가 잦은 이연지였기에 다들 암암리에 그녀의 기에 눌려 있는 것이다.
펑! 펑펑!
크레파스의 다른 멤버들은 달려드는 타 그룹 아이돌들을 밀어 낸다.
MS타운 엔터에서 해 준 현질을 워낙 많이 받은 그녀들이었기에 전투력도 막강하기 그지없었다.
시간이 흘러간다.
100명의 각축전이었던 전장은 점점 몇몇 강자들의 패권다툼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남쪽 전장에서 올라온 아이돌 그룹 ‘빨간원단’과 동쪽 전장에서 올라온 ‘크레파스’가 맞붙었다.
한편 ‘크레파스’의 리더 이연지와 서쪽 전장에서 올라온 ‘블랙아웃’의 리더 한주민이 또다시 격렬하게 맞선다.
“아무리 나의 여신이라지만 봐줄 수는 없지!”
한주민은 커다란 창을 놀리며 이연지를 압박해 들어갔다.
바로 그때.
“히이잉~”
이연지는 창에 맞기 직전 울먹이는 표정으로 애교를 부렸다.
“허억!?”
한주민은 창을 쥔 것도 잊고 손을 가슴으로 가져갔다.
이것이 바로 심쿵이라는 것인가!
하지만 그 심쿵의 대가는 무거웠다.
“죄송합니다, 선배니임~”
이연지는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곧바로 칼을 횡으로 그어 버렸다.
…하지만.
퍼억!
그녀의 칼은 한주민의 단단한 갑옷에 맞고 튕겨져 나온다.
한주민은 이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안하지만 내 갑옷은 무려 B+등급이나 된다고. 아마 아이돌 중에 이걸 뚫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걸?”
B+등급이면 거의 프로게이머들이 장비하는 아이템 수준이다.
아마추어 대회에서 이 정도나 되는 고등급 아이템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쩌적-
이내 들려온 작은 소리가 한주민의 안색을 확 바꿔 놓았다.
놀랍게도, 한주민의 갑옷에 금이 가 있었던 것이다.
이연지는 그것을 보며 생긋 웃었다.
“죄송해요 선배님. 제 칼도 B+등급이에요.”
“…!”
한주민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이미 이연지에게 한번 곁을 내준 이상 벗어날 수 없었다.
특성 ‘부식’
방어구 아이템에 한해서 지속적인 도트 데미지를 가하는 스킬.
이연지와 싸우면 싸울수록 한주민의 갑옷은 점점 내구도가 다해 간다.
거기에 이연지는 온갖 비싼 아이템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로 인한 압도적인 특성치는 한주민의 것을 상회하고 있는 것이다!
“크윽! 이게 MS타운의 힘인가….”
한주민은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MS타운 엔터는 대체 이 대회를 위해 얼마를 쏟아 부은 걸까?
이연지 말고 다른 멤버들의 아이템 역시 실로 짱짱하기 그지없다.
다소 딸리는 컨트롤과 피지컬을 템빨로 완벽하게 커버하고 있지 않은가.
거기에 리더인 이연지가 가지고 있는 ‘남의 방어구를 부식시키는 능력’까지!
이번 아이대의 주인공이 누군지 확연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훗. 이 정도 쯤이야.’
이연지는 고소를 머금었다.
게임 캡슐 밖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안 들어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밖은 지금 난리가 났을 것이다.
크레파스를 외치며 열광하는 팬들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귀에 들리는 듯했다.
아마 호칭으로 인한 패시브 특성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은 크레파스 멤버들이 정말로 게임을 잘한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이걸로 게임도 잘 하는 아이돌이라는 이미지도 생기겠네. 좋아 좋아. 게임도 뭐 어려울 줄 알았는데 별 거 없네~’
뭐든지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이연지였다.
“아이 참. 엉겁결에 이기기는 했는데 이 다음은 어쩌징?”
그녀는 눈앞에 주저앉아 있는 한주민을 내려다보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실로 가식적인 표정이었지만 카메라에는 ‘게임은 잘하지만 심성이 여려 적조차 잘 죽이지 못하는 마음 착한 소녀’의 표정이 잡히고 있었다.
바로 그때.
전장으로 한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보이그룹 ‘블랙아웃’ 소속의 이태민이었다.
그는 같은 그룹 멤버인 한주민을 소리쳐 불렀다.
“형! 주민이 형!”
“…?”
그러자 승부를 포기한 채 주저앉아 있던 한주민이 고개를 들었다.
“어, 태민아. 형 졌어.”
“아니 그게 아니라! 저쪽 좀 봐!”
이태민은 북쪽을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
한주민은 고개를 들어 이태민이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게 되었다.
칼의 고원 북쪽 전장.
쾅! 콰콰쾅!
아이돌들이 홍해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으악! 이게 뭐야! 내 아이템! 이게 왜 벗겨져!?”
“꺄악! 내 방어구가 떨궈졌어! 말도 안 돼!”
“내 칼! 내 칼 어디 갔어!? 경매장에서 비싸게 주고 구한 건데!”
“뭐야 이거? 버그야? 내 머리띠가 왜 다시 착용이 안 된다는 건데!?”
혼돈의 도가니.
지금 전장에 있는 아이돌 중 순수하게 본인의 실력으로 이 자리에 서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대부분은 소속사에서 빵빵한 자금력을 앞세워 현질을 해 줬고 그 덕택에 여기에 서 있는 아이돌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소속사에서 현질로 구비해 준 아이템을 잃어버리자 아이돌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마치 겁먹은 초식동물처럼, 그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뒤로 도망치기만 할 뿐.
그리고.
쿵-
칼의 고원 북쪽, 가장 높은 전장 위에 모습을 드러낸 긴 그림자들이 있었다.
펄럭-
저 높이 솟은 용자의 무덤 아래 휘날리는 네 개의 붉은 망토.
수많은 초식동물들을 물어 죽이며 여기까지 온 강력한 육식동물 넷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걸그룹 ‘니아’의 등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