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254화 (254/1,000)
  • 255화 아이돌 벗기기 (1)

    드디어 아이돌 E스포츠 선수권 대회의 날이 밝았다.

    고양 실내체육관 앞은 벌써 엄청난 인파로 가득 차 있다.

    입장 가능한 관람객의 수는 400명뿐이지만 벌써 수천 명이나 되는 이들이 체육관 주변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전부 다 좋아하는 아이돌을 응원하기 위해 모인 팬덤이다.

    “방탄청년단 파이팅!”

    “헬멧소년단 멋있어요!”

    “BTS 형아들 좋아요!”

    “삼촌팬 아이돌 되다 한주민 파이팅!”

    다양한 아이돌들이 연호된다.

    체육관 내부는 그 열기가 더욱 뜨거웠다.

    입장하자마자 보이는 엄청난 수의 현수막과 플랜카드.

    우르르 모여 외치는 응원가.

    10대부터 60대까지, 팬덤의 연령층은 다양하다.

    그야말로 아이돌로 하나 되는 축제의 장이다.

    특이점은 그 축제의 열기가 하나로 모이지 않고 딱딱 구분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서로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으아아아! 우리 ‘여자사람친구’가 최고다!”

    “흥! 무슨 소리! 우리 ‘사촌간볼빨기’가 제일 예뻐!”

    “아재들 좀 앉아서 떠들어요! 우리 ‘인피니트건틀릿’ 오빠들 얼굴 안 보이잖아요! 확 절반을 퇴장시켜 버릴까 보다.”

    “엄마! 나 오늘 XO오빠들 체육대회 왔어!”

    “딸! 엄마 오늘 TOH오빠들 봐야 하니까 못 들어간다~”

    수많은 아이돌 팬덤이 팽팽하게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코 팬 규모가 압도적인 이들이 있었으니.

    “크! 레! 파! 스! 흥해라!”

    “사랑해요, 누나들! 크.레.파.스.조.아!”

    “우윳빌깣 이연지! 예쁘다!”

    “크레파스 1위 가즈아-아!”

    걸그룹 크레파스를 응원하는 이들이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팬덤을 자랑하는 크레파스답게 오늘 좌석 수를 가장 많이 차지한 것도 바로 그녀들이다.

    이윽고 드라이아이스 연기와 함께 오늘의 주자인 아이돌들이 들어온다.

    우-와아아아아아!!!

    경기장 곳곳에 환호성이 메아리친다.

    아이돌들은 무대 위로 올라가 몸을 풀거나 관객석으로 가 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몇몇은 일찌감치 무대 위의 캡슐에 들어가 초대형 전광판에 뜬 자신의 게임 캐릭터로 팬들에게 인사하기도 했다.

    오늘의 무대는 아이돌들이 펼치는 게임 속 생존경쟁.

    프로리그의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 통칭 ‘배그’와도 비슷한 형식이다.

    총 100명의 아이돌들이 첨예한 생존경쟁을 펼치게 되고 살아남는 팀은 바로 우승의 영예를 거머쥐게 된다.

    최후의 생존자가 1명이라면 그 1명이 속한 팀이 우승하게 되며 생존자가 다수여도 그들이 모두 한 팀이라면 당연히 그 팀의 우승으로 인정된다.

    대회의 해설을 맡은 이들은 프로리그에서 봤던 얼굴들과 똑같았다.

    전용진 캐스터가 민망한 웃음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이야, 이거 어디 뎀 중계만 있다 하면 제가 나오네요. 지겹겠지만 참아 주십시오. 관객 여러분!]

    하지만 현재 전용진 캐스터의 인기는 최고다.

    그의 익숙한 목소리가 경기장 전체에 울리자 또다시 모든 팬들이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돌들이 입장할 때에 버금가는 환호였다.

    이곳에 온 이들은 단순한 아이돌 팬덤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돌 팬 + 게임 팬

    오늘 이곳에 모인 이들은 두 가지 분야 모두에 애정이 깊은 팬들이다.

    단순히 좋아하는 아이돌을 보러 모인 게 아니라 앞으로 그들이 펼쳐갈 게임 내용 역시 중요한 관심거리였다.

    이윽고.

    캐스터들은 자기들끼리 이번 대회에 관한 사전설명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네, 이번에는 총 100명의 선남선녀들이 모여서 치열한 생존 경쟁을 펼치게 되는데요. 오늘 우리 선수들이 경기를 할 곳은 어떤 곳인가요?]

    [이번 생존경쟁의 무대는 바로 ‘칼의 고원’입니다. 흔히 ‘용자의 무덤’으로 가는 길로 통하죠.]

    [아하! 용자의 무덤이라면 그 108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탑 형식의 거대 던전이죠?]

    [맞습니다. 칼의 고원은 용자의 무덤으로 가기 전에 펼쳐져 있는 넓은 오픈필드형 던전입니다.]

    [혹시 모르는 분들이 계실 수 있으니 경기 전에 맵의 설정을 조금 알아볼 수 있을까요?]

    [네, 그럼요. 칼의 고원은 고산지대에 위치해 있는 평원인데. 먼 옛날 이곳에서 수많은 종족들이 뒤엉켜 대규모 전투를 치렀다는군요. 악마, 거인, 천사, 정령, 용 등 여러 종족들이 한 곳에서 뒤엉켜 싸운 결과 이 땅에는 아무것도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하. 그런 설정이 있었군요. 어쩐지 이곳에만 가면 언데드 몬스터들이 출몰한다 싶었습니다.]

    [네네. 전부 다 종족전쟁에서 패한 뒤 성불하지 못하고 남은 패잔병들이죠. 그 때문에 대지 곳곳에 수많은 무기들이 꽂혀 있지 않습니까? 전부 낡고 녹슬어서 아이템으로의 가치는 별로 없지만 말이죠.]

    캐스터들은 열심히 맵 설명을 한다.

    그들의 말대로, 칼의 고원은 고산지대 중턱에 위치해 있는 넓은 평원이다.

    수많은 칼과 창, 화살들이 박혀 있는 대지 위로는 전장의 망령들이 배회한다.

    하지만 지금은 GM처리반들이 이곳에 서식하는 언데드 몬스터들을 전부 정리해 놓은 탓에 깨끗했다.

    텅 빈 고원에는 낡은 무기들만이 무수히 박혀 있을 뿐 그 어떤 생명체도 눈에 띄지 않는다.

    [맵 청소를 위해 고생해 주신 우리 GM처리반장 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전용진 캐스터는 창 밖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

    “…….”

    “…….”

    그들은 모두 검은 모자를 쓴 채 말이 없다.

    맨 앞에 앉아 있는 여자만이 고개를 까닥 숙여 전용진 캐스터의 인사를 받았을 뿐이었다.

    GM처리반장 남세나.

    그녀는 무료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전광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 아래에 있는 또래 여자들은 남자 아이돌 그룹에 열심히 환호하고 있건만 그녀는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한편.

    그 밑에서는 아이돌들이 직접 선물과 도시락들을 팬들에게 나눠 주고 있었다.

    “우와! 와 줘서 고마워! 악수!”

    “어머! 또 오셨네요! 여기 도시락 받으세요!”

    “응원해 주셔서 감사해요. 여기 이건 제 선물! 편지도 있어요.”

    연예인과 팬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팬들이 너무 많은 아이돌 그룹의 경우 매니저나 스텝들이 대신 도시락과 물 등을 나르기도 했다.

    그리고.

    니아 역시도 자신들의 팬을 찾아 움직였다.

    “영차!”

    박보연과 박소담, 배수지, 윤두나는 박스에 넣어 놓은 음료수와 물, 도시락, 편지, 핫팩 등을 집어 들었다.

    이것들도 모이니 꽤 무게가 나간다.

    니아 멤버들은 10명분의 도시락과 기타 역조공 물품들을 들고 자신들의 팬을 찾아 나섰다.

    “니아 팬카페 ‘이볼레인(EVOLRAIN)’ 님들!”

    “다들 어디 계세요!”

    “저희들 여기 있어요!”

    “도시락 받아가세요! 니아예요!”

    박보연을 비롯한 니아 멤버들은 도시락을 들고 열심히 관객석을 돌아다녔다.

    400명이나 되는 팬덤들 중 10명이니 규모가 작긴 작다.

    그래서 찾는 게 조금 어려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관객석을 뒤져 봐도 이볼레인 멤버 10명은 보이지 않았다.

    그 드넓은 관객석을 세 번이나 왔다갔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니아의 팬 ‘이볼레인’들은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리, 아무리 부르고 기다려도 말이다.

    “이볼레인 님들…….”

    박보연은 외치다 말고 어깨를 늘어트렸다.

    곳곳에서 힐끔힐끔 느껴지는 시선들.

    다른 아이돌들은 자신들의 팬들과 사진을 찍고 밥을 먹기에 바쁘다.

    하지만 니아 멤버들은 그러지 못했다.

    뚝-

    박보연은 자신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려 턱 밑으로 떨어지는 순간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이러다가 사진이라도 찍히면 곤란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박보연의 뒤로 박소담과 배수지, 윤두나가 다가왔다.

    “…….”

    “…….”

    “…….”

    그녀들 역시 주인 없는 도시락, 물병과 음료수, 핫팩, 사인이 들어간 사진과 앨범들이 담긴 상자를 들고 있었다.

    “…아냐. 우는 거 아냐, 각오했던 거잖아. 흔한 일인데 뭐.”

    박보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꼭 있다.

    이런 행사마다 인기 없는 무명 아이돌 그룹 팬덤에 응모한 뒤 막상 경기장에 입장해서는 다른 아이돌을 보러 튀는 탈주범들이.

    자기가 원래 응원하는 아이돌 팬덤에 뽑히기에는 경쟁률이 세니 상대적으로 경쟁률이 적은 무명 아이돌 그룹을 노리는 것이다.

    “…하지만. 열 명 전부는 너무했잖아….”

    박보연은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말했다.

    모자 챙 때문에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떨리는 목소리만으로도 감정은 느껴져 왔다.

    바로 그때.

    “…거 도시락 하나 더 없나?”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하나.

    “…!”

    니아 멤버들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10개의 도시락 중 하나를 우걱우걱 먹고 있는 남자가 하나 있었다.

    고인물. 바로 나다.

    “어, 좋은 재료로 정성껏 만들어서 그런가 맛있네. 그런데 양이 좀 아쉽다. 하나만 더 줘.”

    내가 씩 웃자.

    “…푸핫!”

    나를 바라보던 박보연 역시 실소를 터트렸다.

    그러자 박소담과 배수지, 윤두나 역시도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어휴 사부. 이거 팬들 주려고 보연이네 부모님이 만들어 주신 건데 사부가 드시면 어떻게 해요.”

    “아니, 세상에! 이거 양이 거의 3인분 가까이 되는데 이게 모자라요?”

    “1인당 1도시락이거든요오~ 파오후 사부. 여기 쥬스나 좀 드시던가요.”

    이때다 싶어 나를 비난하는 그녀들의 얼굴에 아주 약간이나마 미소가 돌아왔다.

    “으아앙 얘들아! 내가 나머지 9인분 다 먹을 수 있어!”

    옆에서 임우람 매니저가 펑펑 우는 표정으로 울부짖는 것은 다들 무시하고 있었다.

    뭐 아무튼.

    “…….”

    나는 박보연이 들고 있는 도시락 상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10석이라는 짜디짠 숫자를 얻어 대회에 참가한 니아의 멤버들.

    역조공으로 준비한 아홉 개의 도시락은 결국 이렇게 주인 없이 차디차게 식어 가야 할 운명을 맞이했다.

    어제 그 고생을 해 가며 만든 도시락.

    박보연의 일가족이 모두 모여 만들어준 정성이 저렇게 잉여 취급을 받아야 하다니.

    새삼 어제 박보연이 한 말이 가슴속에 맴돌았다.

    ‘게임은 꼴찌에게도 보상을 준다…였나?’

    과연 게임과 현실은 많이 다른 것 같다.

    내가 어젯밤을 회상하며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어머나. 이게 누구야?”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목소리가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이연지.

    걸그룹 크레파스의 리더!

    그녀가 나를 보며 비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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