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253화 (253/1,000)
  • 254화 거꾸로 흐르는 비 (7)

    선글라스와 바바리 코트로 중무장한 남자.

    그는 질투심에 눈이 먼 표정으로 달려들었다.

    “나도! 나도 만질 거야!”

    그러더니 무방비로 서 있던 박보연을 그냥 홱 스쳐 지나간다.

    그가 꽉 끌어안은 쪽은 바로 나였다.

    “호에에엥 고인물 형아 맞죠! 으아아아! 나 진짜 팬이잖아요~!”

    나는 끌어안긴 채 당황했다.

    “형아라뇨, 저보다 스무 살은 많으신 것 같은데…….”

    “몰라! 게임 잘하면 다 형이야!”

    나는 그를 진정시킨 뒤 포옹을 풀었다.

    소동 때문에 선글라스가 살짝 벗겨지자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그때 정모 주최자 님.’

    예전에 고인물 팬클럽 정모 당시에 나왔던 40대 아저씨다.

    그는 당시 마스크를 쓰고 있던 나를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꽤나 감격한 눈치였다.

    그러자 그를 시작으로 마트 곳곳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뭐여 뭐여, 연예인이여?”

    “어어? 나 저 사람 인터넷에서 봤는데?”

    “오메. 그 게임 잘 하는 총각이네. 우리 딸년이 아주 광팬인디.”

    “젊은이, 나도 거 사인 한 장만 받을 수 있남? 집에 가서 손주놈 주게. 아, 내 것까지 두 장…. 소장본이랑 전시본 따로 두려는 것은 아니구….”

    마트가 순식간에 시끌시끌해졌다.

    “…아 뭐야, 사부가 문제였네.”

    박보연은 안심 반 허탈함 반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괜히 겁먹었던 게 짜증나는 듯 또 작은 주먹을 들어 내 등을 팡팡 친다.

    거 쪼끄만 게 되게 공격적이네.

    *       *       *

    시간이 흘러 마트에서의 소동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다.

    날이 꽤나 어둑해진 시간, 나는 박보연의 집에 도착했다.

    “들어오셔서 저녁 드시고 가세요.”

    그녀는 나를 돌아보며 해맑게 웃는다.

    작은 투룸 빌라. 그녀의 집인가?

    평소에는 기숙사에서 살고 주말에는 집에 오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나저나 이 야심한 시각에 여자 혼자 사는 집에 가는 건 좀….’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저녁을 사 준다길래 밖에서 먹는 줄 알았는데 설마 집에서 먹는 것이었다니.

    ‘음, 이건 좀 그런데.’

    머릿속에 엄재영 감독의 도깨비 같은 얼굴이 그려진다.

    스캔들만은 절대로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던.

    “…? 뭐 하세요 사부?”

    내가 운전대를 잡은 채 끙끙거리자 조수석 밖으로 내린 박보연이 고개를 갸웃한다.

    나는 별 수 없이 차 문을 닫고 나왔다.

    “아, 이거 참. 곤란해 곤란해.”

    나는 고개를 흔들면서도 박보연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파파라치가 있나 없나 유심히 살피면서.

    이윽고.

    긴 복도를 지나 박보연이 사는 집의 현관문을 여는 순간.

    “보연이 왔니~”

    중년 남녀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박보연의 표정이 환하게 변했다.

    “엄마! 아빠!”

    거실로 뛰어 들어가는 그녀를 보며 나는 약간 멍해졌다.

    아,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었던 건가? …물론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거기에 나를 불렀다고?’

    상황은 더욱 미묘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아버님.”

    나는 거실로 들어가며 인사를 했다.

    하지만 박보연의 아버님은 나를 보며 헛기침을 할 뿐이다.

    “제가 왜 그쪽의 아버님인가요?”

    “…네?”

    “저는 아직 그쪽을 사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박보연의 얼굴이 갑자기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으아아아아빠! 무슨 소릴 하고 있어!”

    “으하하핫! 보연이 다 컸구나!”

    아무래도 아버님이 농담을 하셨던 모양.

    툭탁거리는 부녀지간 뒤 부엌에서 어머님이 나오셨다.

    “아휴, 우리 보연이 선생님이시죠? 이번에 대회 나간다고 들었는데 잘 좀 부탁드립니다. 변변찮아도 저녁식사나 한 끼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

    “아이고. 네네. 감사합니다.”

    “호호호. 우리 선생님 참 미남이시다. 그래, 어떤 과목을 가르치시는 거예요? 안무? 노래?”

    뭔가 게임이라고 대답하기 조금 미묘한 분위기라서 나는 그냥 웃어 보였다.

    “와하하하. 그냥 부르던 대로 아버님이라고 부르십쇼. 저도 선생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아아, 예 아버님.”

    다행히도 박보연의 아버님은 유쾌하신 분이셨다.

    나는 식탁에 앉았고 이내 식탁 위에 여러 가지 요리가 놓인다.

    찌개, 볶음, 무침, 조림, 튀김, 구이, 탕 등등…….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는 아니더라도 후들거릴 정도는 된다.

    “밥 먹고 같이 팬 분들 드릴 도시락 만들어야지? 다 같이 하면 재밌겠다.”

    “아휴, 아니야 엄마. 나 혼자 할게. 엄마 허리도 안 좋은데….”

    “우리 이쁜 딸 좋아해 주시는 고마운 분들인데 그럴 수야 있나. 엄마도 도울게.”

    어머님은 박보연을 돌아보며 웃으신다.

    아버님 역시 마찬가지다.

    “이 애비가 또 한때 요리사였잖냐. 10인분쯤은 껌이지.”

    “에이, 요리사가 아니라 취사병이었잖아요.”

    “비슷한 거야!”

    여전히 툭탁거리는 부녀지간이다.

    뭔가 재밌어 보여서 나도 요리를 돕기로 했다.

    “이렇게 훌륭한 집밥을 먹으니 너무 좋네요. 요즘 맨날 믹서기에 닭가슴살이랑 블루베리랑 케일이랑 청국장 같은 거 넣고 갈아먹다 보니.”

    내가 찌개를 입에 퍼 넣으며 말하자 순간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박보연과 그녀의 부모님은 나를 측은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아버님이 나를 한참 동안 쳐다보시다가 말씀하셨다.

    “아무래도 우리 선생님은 요리할 때 구경만 하시는 게….”

    “그런 입맛은 좀…누렁이….”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다.

    *       *       *

    어느덧 식사도 끝나고 요리도 끝났다.

    나를 포함한 일가족이 동원되어 만든 끝에 도시락 10인분은 금방 완성되었다.

    말이 10인분이지 20인분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빵빵한 도시락이었다.

    박보연은 덥다며 땀을 식히러 배란다로 나갔다.

    그사이, 그녀의 아버님은 나에게 넌지시 말을 건네 오신다.

    “우리 보연이 좀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아휴, 그럼요. 제가 잘 가르치겠습니다.”

    박보연이 자리에 없자, 아버님의 표정이 변했다.

    수심 깊은 표정.

    “제가 죄인이라 맨날 보연이 고생만 시키고 그래서, 참. 이렇게 도시락이라도 만드는 것 말고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네요.”

    ……?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아버님은 답답한 속내를 털어 놓으셨다.

    “저는 원래 중공업 쪽에 종사했는데,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요즘 경기가 좀 어렵지 않습니까? 정년도 못 채우고 일찍 퇴사했는데…퇴직금 조금 받은 거 아들 녀석 병원비에 넣고 나니까 보연이를 도와줄 수 있는 게 뭐 없더라구요.”

    아, 나는 그제야 생각해 냈다.

    박보연의 오빠는 군대에서 의문의 사고를 당해 현재 국군 수도병원에 입원해 있다.

    나라에서 치료비를 대 줄 수 없다고 했기 때문에 현재 소송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침중한 안색의 아버님을 위로했다.

    “힘내십쇼, 아버님. 진상이 곧 규명될 겁니다. 국가에서 치료비도 다 나올 거고요.”

    “…휴,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막막하니….”

    아버님의 탄식은 이어진다.

    나는 서둘러 말했다.

    “요, 요즘 군대 좋아져서. 그런 것 규명하는 데 그리 시간 오래 안 걸립니다. 제 친구도 비슷한 경우였는데 한 2년 정도 있으니 보상 나오더라고요.”

    물론 거짓말이다.

    나는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에 박보연의 오빠가 그때쯤 몸이 나아서 국가의 보상을 받는다는 것 역시도 알고 있다.

    내 말을 들은 아버님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지신다.

    “네. 그랬으면 좋겠어요. 참…보연이한테도 미안해서 참.”

    “그래도 밝고 씩씩해서 제 할 일은 다 하는 친구입니다.”

    그때.

    내 말을 들은 어머님이 부엌에서 나타나셨다.

    “우리 보연이가 마냥 또 밝은 것만은 아니에요.”

    “…네?”

    “저번에는 아주 펑펑 울면서 집에 들어와서는…연예인 못 하겠다고 우는데 제 속이 참.”

    “아니 왜요?”

    그러자 어머니는 속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셨다.

    “맨날 보연이가 허름한 빌라에 왔다갔다하니까. 또 애들이 젊고 예쁘잖아요? 맨날 모자랑 마스크랑 선글라스 쓰고 새벽에 나가서 밤에 돌아오고. 그것도 시커먼 벤에 타서. 그래서 동네 소문이 좀…그런 게 있었나 봐요.”

    아,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다.

    내가 말이 없자 어머니는 앞치마로 눈시울을 꾹 누르셨다.

    “아웃에 사는 주정뱅이가 갑자기 껴안으려고 하면서 ‘너는 얼마냐?’ 뭐 이런 말을 했대요. 그런 일이 심심찮게 일어난다나….”

    무명 걸그룹 입장에서는 너무 분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생각보다 연예인 지망생들이 자주 겪는 모욕.

    박보연의 부모님들은 걱정이 많으신가 보다.

    “…….”

    나는 마음 한켠이 약간 무거워졌다.

    내 기억 속에 정상 급 걸그룹으로 남아 있는 니아가 무명 시절 이렇게 설움이 많았구나 싶어 짠했다.

    드르륵-

    나는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갔다.

    박보연은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슬쩍 말을 걸었다.

    “…할 만하냐?”

    흔한 멘트다.

    박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머리황제수리를 잡으면서 멤버들끼리의 합도 엄청 좋아졌어요. 안무할 때 도움이 될 듯.”

    “그러냐.”

    대화는 잠시 끊겼다.

    나 역시도 밤바람을 맞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박보연이 먼저 대화를 이어 갔다.

    “아참. 천지패황 언니, 오빠들한테 전화해 봤어요.”

    “아직도 연락해?”

    “그럼요. 다들 아직도 잘해 줘요. 언제든 돌아오라고. 크크크.”

    “뭐라던데.”

    “류요원 선배가 MS타운 엔터랑 계약했다고 하네요. 계약금으로 1.5 받았다던데.”

    “크크크. 나보다 못하네. 나는 [email protected]로 제안 받았었는데.”

    내가 피식 웃자 박보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정말요? MS에서도 제안 받으셨어요?”

    “응. 근데 내가 깠어.”

    “아니 왜요!? 그 좋은 기회를! 왜 저희 같은 하바리랑…….”

    박보연은 진심으로 깜짝 놀란 듯하다.

    나는 그냥 어깨만 으쓱해 주었다.

    “크레파스인가? 걔네들 인성 별로더라고.”

    “아. 걔네들 좀 유명하긴 하죠. 특히 리더인 애 인성이….”

    박보연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감탄하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우와 근데 [email protected]는 진짜 대단하다. 그 정도면 거의 ‘그 사람’ 급이겠는데요?”

    “누구? 마동왕?”

    “어? 네! 어떻게 아셨어요?”

    “알지. 너를 10초 만에 리타이어 시킨 그 사람.”

    “아이 씨! 그 얘기는 왜 해요!”

    박보연은 마동왕 이야기가 나오자 인상을 팍 구겼다.

    나는 낄낄 웃었다.

    “나랑 유일하게 비긴 사람이라서 잘 기억하고 있지.”

    “…….”

    박보연은 입을 딱 벌렸다.

    그녀는 마동왕도 겪어 보고 고인물도 겪어 봤다.

    “둘 다 괴수라서 잘 상상이 안 돼요. 고질라 VS 용가리 같은 느낌인가….”

    …뭐 결국 둘 다 나지만 말이다.

    나는 문득 박보연에게 궁금한 것이 생겼다.

    “너는 근데 걸그룹 지망생이면서 프로게이머는 왜 한 거야?”

    “뭘 당연할 걸 물어보세요. 게임이 좋으니까 했죠.”

    “뭐가 좋은데?”

    내가 묻자, 박보연은 코 밑을 한번 쓱 문지른 뒤 당차게 말했다.

    “……게임은 꼴찌를 해도 보상을 주니까요.”

    그렇다.

    승자와 패자가 냉혹한 걸그룹 세계와 달리, 게임은 꼴찌를 해도 완주 보상을 준다.

    비록 1등의 보상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꾸준히 무언가를 얻어 갈 수 있게 보장해 주지 않는가?

    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랬었지.’

    회귀 전, 사회에 지치고 찌들었을 때.

    게임만이 나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게임은 중독이네, 해롭네 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 친구, 돈, 집, 차 등등을 다 가진 사람들이다.

    어느 정도 사회적 성공을 거두어 여유가 있는 사람들.

    그들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이들이 게임에 심적으로 기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이해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대부분, 일상생활을 해칠 정도로 게임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

    내가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읏챠!”

    박보연이 기지개를 켰다.

    그녀는 내 손목을 잡아끌며 베란다 문을 열었다.

    “이제 정말 내일, 아니 몇 시간 안 남았네요. 마지막까지 파이팅 해요, 우리!”

    “…파이팅은 너 혼자 해야지. 나는 할 것 다 했어.”

    “아 진짜! 분위기 좀 맞춰 줘요! 여기 아직 우리 집이야!”

    “알았다. 알았다.”

    나는 박보연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마침 박소담, 배수지, 윤두나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내일 올 10명의 팬들을 위한 손 편지와 사인지, 멤버들의 애장품, 희귀 사진, 굿즈 등등이 모두 준비되었단다.

    이제 아이돌 E스포츠 선수권 대회가 코앞이었다.

    출격 준비 완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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