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250화 (250/1,000)
  • 251화 거꾸로 흐르는 비 (4)

    All or Nothing.

    Dead or Alive.

    To be or Not to be.

    or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멋진 문장은 많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분위기가 조금 미묘하다.

    “벗거나 or 벗기거나.”

    그렇다.

    벗거나 혹은 벗기거나.

    그것이 니아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이다.

    “…….”

    “…….”

    “…….”

    “…….”

    내 말을 들은 니아 멤버들은 모두 말이 없다.

    개중 가장 게임 이해도가 높은 박보연이 겨우 겨우 한마디 했다.

    “…실례지만 변태신가요?”

    “설마.”

    보아하니 그녀들은 모두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심지어 임우람 매니저마저도.

    “저, 저희 애들 걸그룹입니다. 외설적인 이미지는 좀….”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MS엔터에 갔을 때와 같은 말이로군.

    “게임과 현실을 혼동하지 마세요.”

    “…….”

    내 말을 들은 임우람 매니저는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박보연을 향해 고개를 돌려 말했다.

    “당연히 게임에서만 벗는 거지. 누가 현실에서 벗으래? 너처럼 게임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 하는 애들 때문에 게이머들이 욕먹는 거야.”

    내가 일침을 넣자 박보연이 발끈한다.

    “아니! 게임이든 현실이든 왜 벗어요, 벗긴! 변태 같잖아요!”

    “그게 아니면 다른 쟁쟁한 기획사를 못 이기니까 그렇지.”

    내 대답을 들은 박보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니아 멤버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저희들끼리 소근거린다.

    “뭐야? 뭐야? 우리가 성적을 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거야?”

    “…으음, 보니까 게임 되게 잘 하는 사람 같은데. 믿어 볼 만하지 않을까?”

    “내 생각엔 이왕이면 벗는 것보다는 벗기는 게 좋을 것 같아.”

    박소담과 배수지, 윤두나는 저마다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박보연은 기가 막히다는 듯 두 팔을 허리에 올렸다.

    “아니, 다른 기획사 팀을 어떻게 이기게 해 주겠다는 거예요. 우리는 다 저렙이고 변변찮은 아이템도 없는데.”

    하지만, 나는 바보가 아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니아의 코치직을 수락했을 리가 있나.

    “자, 지금부터 ‘특성’에 대해 강의를 해 주겠다.”

    나는 니아 멤버들을 한 곳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앞으로의 공략을 털어놓았다.

    “A급 이상의 몬스터를 잡으면 특성 하나를 빼앗을 수 있어. 나는 너희들을 데리고 레이드를 돌면서 패시브 특성을 모을 거야. 아이템이 없어도 되게끔.”

    내 말을 들은 박보연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요즘 탑 티어 랭커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도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A급 이상 몬스터를 잡으면 호칭이라는 특전이 생긴다는 게…….”

    ‘그걸 이제 알았냐?’ 라고 되묻고 싶었지만 꾹 참기로 한다.

    나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그래서. 나는 지금부터 너희들이 유용한 특성을 얻을 수 있게끔 버스를 태워 줄 거야.”

    버스란 무엇이냐?

    버스(bus)란 정원 11명 이상의 합승 자동차를 의미한다.

    본래 승합마차를 뜻하는 옴니버스(omnibus)에서 나온 말이지만…게임 상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로 쓰인다.

    흔히 게임을 잘 하는 사람이 못 하는 사람 대신 열심히 뛰어서 끌어 주는 것을 ‘버스 태워 준다’라고 표현하곤 한다.

    실력이 부족하니 잘 하는 사람에게 얹혀서 버스에 타는 것처럼 간다는 뜻이다.

    그러니 내가 니아 멤버들을 데리고 사냥을 하는 것 역시도 버스를 태워 주는 것에 비유할 수 있으리라.

    “와아! 그러면 저희 대신 센 몬스터 잡아 주시는 거예요!?”

    니아 멤버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이렇게 예쁜 처자들이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호소해 오면 외면할 수 있는 남자가 몇이나 있을까?

    아마 거의 없겠지.

    하지만 나는 남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게이머다.

    그런 고로 냉정하게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아니. 나는 몬스터의 서식지로 안내만 해 줄 뿐. 잡는 건 직접 잡아야지.”

    “에에~”

    “‘에에’가 아냐. 어차피 파티에서 일정량 이상의 기여도를 쌓지 않으면 경험치도 아이템도 호칭도 받을 수 없어.”

    내 말은 사실이다.

    일반적인 게임이라면 버스에 탄 사람은 그냥 가만히 있어도 보상을 받겠지만…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서는 얄짤없는 일이다.

    칼 같이 데미지에 따라 차등적으로 보상을 주는 형식.

    물론 힐이나 버프, 어그로 역시도 카운팅된다.

    따라서 버스를 탔다고 해도 개개인이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성과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점에서 다른 대형기획사의 아이돌 팀 역시 성장의 한계가 뚜렷할 것이다.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싶다면 나를 잘 따라오라고.”

    나는 니아 멤버들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       *       *

    푸드덕!

    하늘을 가릴 듯 커다란 날개.

    날카롭게 찢어진 눈.

    억세고 강인한 부리.

    옹골차게 단련된 근육.

    칼날처럼 예리한 발톱.

    …그리고 훌러덩 벗겨진 머리.

    창공을 가르며 독수리 한 마리가 황무지 위로 내려앉았다.

    <대머리황제수리> -등급: A / 특성: 비행, 야수, 뺑소니, 훌러덩

    -서식지: 비행로(非行路), 거인국, 훌러덩 평원

    -크기: 8m.

    -어디에 살든 간에 늘 상위 포식자로 군림하는 맹금류형 몬스터.

    똑똑하고 잘 생겼으며 힘도 세고 사교성도 좋다.

    정수리 부분의 깃털이 약간 부족한 것이 유일한 흠이지만 그래도 위기 시 땅이나 수풀 속에 몸을 묻고 머리만 밖으로 내놓아 계란이나 타코야키인 척을 해서 적을 속일 수 있다.

    결국 대머리황제수리의 대머리는 보다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한 결과이자 고등동물의 상징인 것.

    …아무튼 그런 것이다.

    [까아아아아-악!]

    대머리황제수리는 요란한 괴성을 지르며 황무지 중앙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런 대머리황제수리를 맞이하는 여섯 명의 파티가 있다.

    나와 임우람 매니저.

    그리고 박보연, 박소담, 배수지, 윤두나다.

    참고로 나는 그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서 코치만 하고 있었다.

    “자, 내가 어그로를 끌어 줬으니 이제 너희들끼리 사냥을 해 봐.”

    나는 니아 멤버들에게 지령을 내렸다.

    대머리황제수리의 공격 패턴은 이미 입이 닳도록 설명해 놓은 상태.

    하지만 니아 멤버들은 전부 다 대머리황제수리가 내뿜는 피어에 질린 상태였다.

    “으아, 나는 새 무서워하는데. 길가의 비둘기도 피해 다닌다고요!”

    “게다가 가까이서 보니 엄청 크다…8미터가 이렇게 큰 거였어?”

    “저 눈 좀 봐. 어딜 보는지 모르겠어서 더 무서운 것 같애.”

    “…조류독감 옮기는 거 아니겠지?”

    하지만 아이돌 E스포츠 선수권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야 한다는 목표가 더욱 더 절실하다.

    니아 멤버들은 내가 알려 준 대로 대머리황제수리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까악! 까악!]

    대머리황제수리가 두 번 포효했다.

    나는 재빨리 외쳤다.

    “두 번 포효는 뭐다?”

    그러자 니아 멤버들이 일제히 대답한다.

    “전방에 부채꼴 모양으로 깃털 수리검!”

    그녀들은 잽싸게 좌우로 흩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대머리황제수리는 날개를 휘둘러 송곳 같은 깃털들을 전방으로 쏘아 보냈다.

    그 틈을 타 니아 멤버들은 대머리황제수리의 뒤로 내달렸고 저마다 칼이나 창 등의 무기를 들고 대머리황제수리의 등을 찔렀다.

    임우람 매니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푸푹!

    니아 멤버들의 공격이 제대로 먹혀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훌러덩!

    기괴한 효과음과 함께, 대머리황제수리가 자신의 고유 특성을 발현시켰다.

    ‘훌러덩’

    ↳적을 공격하는 데 성공하거나 적에게 공격당했을 경우 일정 확률로 자신과 상대방의 아이템 하나를 랜덤하게 떨굽니다.

    ※떨굴 수 있는 아이템은 현재 착용하고 있는 장비의 경우에 한하며 벗겨진 아이템의 소유권은 여전히 본인에게 있되 24시간 동안은 재착용이 불가능합니다.

    ※본인이나 적의 아이템을 떨굴 때마다 공격력이 1씩 증가하며 이 힘은 24시간 동안 지속됩니다.

    대머리황제수리의 훌러덩 특성이 발현되었다.

    딱히 아이템을 소유하지 않은 몬스터인지라 대머리황제수리는 아무런 아이템도 떨구지 않았다.

    다만 정수리에서 깃털이 한 주먹 정도 후두둑 빠졌을 뿐이다.

    대머리황제수리의 정수리가 조금 더 휑해지는 대신, 니아 멤버들의 몸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아앗! 내 갑옷!”

    “헉! 내 머리띠가!”

    “에엥! 내 반지!”

    “음? 내 고기 다지기용 쇠망치가….”

    박보연, 박소담, 배수지, 윤두나가 저마다 아이템 하나씩을 떨궜다.

    강제로 인벤토리에 잠들게 된  아이템은 이제 오브젝트로 취급된다.

    24시간 뒤 착용 권한이 돌아오기는 하지만 그동안은 그 누구도 사용할 수가 없다.

    임우람 매니저 역시 매끈매끈해진 자신의 턱을 가린 채 소녀처럼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내 수염이! 상남자의 심볼이!”

    …그게 아이템이었어?

    예전에 그 배추김치도 그렇고 저 턱수염도 그렇고, 이 게임에는 참 요상한 아이템이 많다.

    “자, 다음 공격 패턴이 온다. 이번에는 허공으로 날아서 떨어져 내리는 공격이야!”

    나는 대머리황제수리의 다음 패턴을 경고했다.

    내 말대로, 대머리황제수리는 하늘 높이 올라가 지상을 향해 다이브한다.

    날카로운 부리를 앞세운 채로.

    파팟!

    니아 멤버들은 내가 지시한 대로 대머리황제수리를 피해 죽어라 뛰었다.

    그리고 또다시 공격 후 잠시 휴식하는 대머리황제수리에게 경미한 데미지를 입혔다.

    훌러덩-

    또다시 대머리황제수리의 탈모가 심해졌다.

    동시에 니아 멤버들의 아이템도 하나씩 벗겨진다.

    “꺄아아악!”

    이번에는 좀 수위가 높았다.

    니아 멤버들의 상의가 벗겨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 게임은 19세 필터가 아주 잘 적용되어 있었다.

    본인이 노출을 원하지 않으면 자신의 몸을 그냥 실루엣만 갖춘 살색 덩어리로 보이게 할 수 있다.

    심지어 노출도를 최저로 설정하면 자신의 몸을 도트로 보이게 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아 멤버들은 손으로 몸을 가린 채 주춤거린다.

    아무래도 현실의 수치심을 게임에서도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모양.

    나는 그런 니아 멤버들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부끄러워하지 마라! 너희들은 지금 그냥 도트로 보인다! 이건 게임일 뿐이니 현실과 구분해!”

    “…그래도…그래도…너무 외설적이잖아요!”

    “뭐가 외설적이냐! 너희들의 상상력이 문제인 거야! 곧 다음 공격이 오니까 피할 준비나 해!”

    내 말대로였다.

    [까아아아악!]

    머리의 깃털이 벗겨진 것에 분노한 대머리황제수리가 다음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광역 공격이다.

    대머리황제수리가 하늘에 떠서 온 필드를 향해 깃털 송곳을 뿌리는 패턴.

    몇 초 뒤, 놈은 자신을 중심으로 반경 50미터의 원에 송곳 깃털을 빽빽하게 뿌릴 것이다.

    이것은 답이 없다.

    대머리황제수리가 하늘로 뜨는 순간 죽어라 달려 놈을 중심으로 반경 50미터 밖으로 달아나야 한다.

    “으아아, 달려!”

    “아앗! 나 달리기 느린데!”

    “저 새 엄청 빠르다구!”

    “일단 앞만 보고 달려!”

    “얘들아! 지금까지 수고했고 3초 뒤에 웃으면서 보자!”

    니아 멤버들과 임우람 매니저는 온 힘을 다해 호다닥 도망쳤다.

    50미터나 되는 거리를 3초 안에 달리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게임 세계 속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니아 멤버들은 이내 깜짝 놀라야 했다.

    퍼퍼퍼퍼퍼펑!

    자신들의 발 뒤꿈치를 스치며 떨어지는 깃털 소나기.

    놀랍게도 그녀들은 아슬아슬한 차이로 대머리황제수리의 광역 공격을 피한 것이다!

    “세상에! 우리가 이 공격을 피했어!?”

    “우와! 뭐지? 몸이 엄청 가벼워!”

    “갑옷을 벗어서 그래! 그 무게만큼 몸이 가벼워진 거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초보자용 가죽갑옷인데…그걸 벗었다고 몸이 이렇게나 가벼워졌다고!?”

    니아 멤버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들의 몸을 더듬어 보았다.

    그렇다.

    생각보다 아이템의 무게는 상당하다.

    게임을 처음 하는 이들부터 게임 좀 한다 하는 사람들까지 골고루 저지르는 실수가 있다.

    그것은 바로 ‘과잉방어’이다.

    모니터 속의 캐릭터가 맞는 것과 가상현실 속의 내가 맞는 것은 그 느낌이 다르다.

    작은 토끼를 상대로 한다고 해도 물릴까 봐 걱정이 드는 것이 사람이다.

    따라서 게이머들은 몬스터를 상대할 때 아이템을 바리바리 껴입는다.

    어느 한 곳이라도 빈 장비칸을 남겨두지 않고 완갑, 각반, 워커, 갑옷 상의, 하의, 투구, 엉덩이 보호대, 허리 보호대, 반지, 목걸이, 귀걸이, 머리띠 등등…모든 아이템으로 중무장한다.

    왜냐면 맞는 것이 무서우니까.

    아픈 것보다 맞는다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감이 앞서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고수들은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토끼를 상대할 때 물소의 돌진을 방어할 정도의 무장은 몸을 무겁게 하기만 할 뿐 불필요하다.

    그저 얇은 방어구면 족한 것이다.

    진짜 고인물들은 목표로 한 몬스터의 공격력에 딱 맞춰서 방어구를 세팅한다.

    ‘과잉’ 방어력을 무겁게 걸치고 다니기보다는 차라리 그 무게를 덜어 속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나는 니아 멤버들을 향해 엄격 근엄 진지하게 말했다.

    “대머리황제수리는 A등급 몬스터. 어차피 너희들은 깃털에만 스쳐도 사망이다. 그럴 바에는 어줍잖은 방어 따위는 필요 없어. 오로지 빠른 속도와 공격만이 있을 뿐!”

    내 말을 들은 니아 멤버들은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다.

    그때, 정신을 차린 박보연이 살색 도트로 보이는 빗장뼈와 복장갈비 사이의 대흉근을 두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그, 그래도. 이렇게 벗는 건 좀…….”

    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나는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희는 도트다. 그리고 설사 도트가 아니라 실사라고 해도, 나는 너희들의 알몸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자 다른 멤버들이 항의했다.

    “…에헤이, 그건 말도 안 되죠!”

    “한창 나이의 남자가 어떻게 여자 알몸을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안 들어요!”

    “진짜 그건 거짓말이다! 우리가 얼마나 섹시한데!”

    박소담, 배수지, 윤두나의 불신 가득한 말.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그녀들에게 반문한다.

    “여자? 이곳에 여자가 어디에 있지?”

    ……?

    니아 멤버들과 임우람 매니저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나는 단호한 어조로 쐐기를 박았다.

    “버스에는 남녀가 없다. 기사와 승객만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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