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거꾸로 흐르는 비 (3)
슈우우우우……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수증기 속.
나는 긴칼비늘 킹코브라의 머리를 밟고 우뚝 섰다.
팔랑-
손에 든 텔레포트 스크롤은 그냥 내버렸다.
어차피 한번 찢은 이상 재사용은 못 하니까.
‘뭐, 귀환용 스크롤이 하나 더 있으니까 상관없지.’
나는 천공섬에 도착한 즉시 워프 포인트를 스크롤에 등록해 뒀었다.
한번 갔던 장소는 좌표를 기억하는 한 언제든 되돌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이 텔레포트 스크롤.
귀하기도 귀할 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비싼 가격 때문에 펑펑 쓸 수가 없다는 게 함정이지만… 어쨌든 그 효과만은 확실하다.
한편.
윤솔과 드레이크는 천공섬에서 로그아웃을 했기에 다시 접속만 하면 된다.
추후 천공섬 공략을 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오직 나만 이번 아이돌 E스포츠 선수권 대회 일로 잠시 지상에 강림(?)한 것이다.
한편.
“…누구세요?”
얼떨떨한 표정으로 묻는 니아 멤버들.
작은 키에 귀여운 얼굴.
나는 맨 앞에 있는 여자의 얼굴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왜 못 알아보겠는가?
‘박보연, 02년생, 걸그룹 니아의 리더이자 메인보컬, 키는 162cm, 몸무게는 49kg, 혈액형 O형, 시력 양쪽 다 2.0, 가정환경 부1 모1 군대 간 오빠 1, 별자리는 물병자리, 좋아하는 음식은 작고 아기자기한 군것질거리, 추구하는 삶은 미니멀 라이프….’
프로팀 천지패황과 격돌할 때 나와 붙었던 전직 프로게이머이다.
‘물론 그때는 10초 만에 이겨 버렸지만 말이야.’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박보연은 단순히 시간을 끌기 위해 나온 주자였기에 피지컬 자체는 그리 뛰어난 수준이 아니었다.
한국 랭킹 20위권에 들어갈 뻔한 적도 잠깐 있었지만 그것은 그때의 상태에서 계속 정진했을 때의 이야기.
지금의 기량은 그냥 게임 좀 하는 일반인 수준이리라.
“…….”
회상을 마친 나는 니아의 다른 멤버들도 쭉 둘러보았다.
‘박소담. 전직 비서 출신. 니아의 랩 담당. 평소에는 조용하고 나긋나긋한 성격이지만 정말 화가 나면 과격한 행동도 서슴지 않고 하며 할 말 못할 말 다 해버리는 스타일. 음악, 미술, 체육, 수학, 과학, 역사, 외국어 등등 못 하는 것이 없는 팔방미인 만능 캐릭터. 다만 게임은 잘 하지 못하는 편.’
‘배수지. 전직 광고 PD출신. 니아의 보컬 담당. 팀 내에서는 분위기 메이커 포지션을 맡고 있음. 덜렁덜렁거리지만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 의외로 고집이 세서 한번 하기로 한 것은 끝까지 완수하는 경향이 있음. 의리가 있어서 동성 친구들 간에 인기 많음. 게임에 대한 재능은 상당한 편.’
‘윤두나. 전직 먹방 BJ출신. 니아의 안무 담당. 춤이나 운동에 대한 재능이 엄청난 멤버. 니아 멤버들 중 가장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시선을 가지고 있음. 다만 가끔 너무 필요 이상으로 엄격, 근엄, 진지해지는 바람에 선비라고 놀림 받기도 함. 융통성이 없고 매사에 너무 진지해서 재미없는 성격이지만 마음이 따듯해서 그걸 알아주는 팬들에게 인기가 많음. 게임에 대한 재능은 배수지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뛰어난 편.’
박보연, 박소담, 배수지, 윤두나로 이루어져 있는 걸그룹 니아.
니아는 처음에 고생을 꽤나 오래 하지만 나중에 박보연의 버스킹 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물론 다른 멤버들의 실력이나 노력도 큰 몫을 했지만 박보연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은 분명 사실이었다.
시간이 흐른 뒤.
걸그룹이 성공한 이후에도 불화가 생기지 않고 멤버들끼리 사이좋게 장수하는 것은 이례적인 사례이다.
니아는 이에 해당되었다.
오래오래 롱런하는 정상 급 걸그룹.
‘…그렇다면 일찌감치 투자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나는 전략적으로 판단했다.
어차피 뜰 아이돌이라면 미리 도와줘서 나쁠 것 없다.
또한 임우람 매니저의 선견지명 역시도 높이 살 만했다.
막 인터넷 방송을 시작한 나에게 광고를 맡기거나 프로그램 출연을 의뢰하거나 하는 등의 노력을 보였기 때문이다.
전에 전속 스트리머 계약을 할 때 컨택할 업체를 선별하는 기준을 ‘누가 먼저 전화했는지’에 둘 만큼, 나는 컨택 순서에 민감한 편이었다.
잘 나갈 때 친절한 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잘 나가지 못할 때 받았던 친절한 대우는 특별하고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니아라는 걸그룹에 더 관심이 가는가 보다.
“나를 초반에 알아본 공적을 높이 사지.”
반말. 자뻑.
나의 오만한 대사를 들은 니아 멤버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오직 임우람 매니저만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 고인물 씨? 와 주신 겁니까?”
“…아아.”
나는 차갑고 도도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니아 멤버들은 안색이 안 좋다.
“뭐야 저 알몸 변태는.”
“대사도 오글거려. 중2병인가 봐.”
“뱀 괴물을 죽여 준 건 고마운 일이지만…….”
박소담과 배수지, 윤두나는 저마다 한마디씩 중얼거린다.
그때.
“아앗! 고인물!? 아마추어 리그의 황제!?”
누가 전직 프로게이머 아니랄까 봐, 박보연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박보연이 놀라는 것을 보자 다른 멤버들 역시도 긴장했다.
“저 사람이 누군데 그렇게 놀라?”
“뭐야, 뭐야, 대단한 사람이야?”
“복장만 놓고 보면 여러모로 대단해 보이기는 하는데….”
박소담과 배수지, 윤두나가 중얼거린다.
나는 그들의 앞으로 펄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놓으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긴칼비늘 킹코브라’를 잡을 때에는 보이는 등급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 놈이 지금까지 죽여 온 플레이어들의 수에 따라 레벨이 상승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지.”
“…백전노장 특징 때문이라고 하셨었죠!”
“맞아.”
나는 임우람 매니저가 쓰고 있는 투구에 노오란 스마일 스티커 하나를 붙여주었다.
‘착한 아이 스티커’다.
나는 몸을 돌려 계속 걸어갔다.
내 발걸음이 향한 쪽은 긴칼비늘 킹코브라의 시체가 있는 방향이었다.
나는 길게 늘어진 뱀의 몸뚱이를 탁탁 치며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또한, 긴칼비늘 킹코브라를 사냥할 때는 그렇게 무작정 육탄으로 부딪치면 안 돼.”
“아앗! 그건 왜죠?”
임우람 매니저가 찰진 리액션과 함께 학구열 뜨거운 질문을 던진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긴칼비늘 킹코브라의 전기톱날 같은 비늘은 꽤 넓은 범위에 강력한 물리 데미지를 가하기 때문이야. 공격력 하나만큼은 C+등급 이상이기 때문에 원거리에서 잡는 것이 현명하다.”
“아하! 그렇구나!”
“만약 원딜이 없어서 근접전이 불가피하다면 항상 놈의 뒤를 잡고 있어야 한다.”
“뒤를 잡으라 하심은…?”
“긴칼비늘 킹코브라의 비늘은 정면이나 측면에서 때렸을 경우 단단해서 잘 부러지지 않지만 후면에서 역으로 때렸을 경우에는 너무도 쉽게 벗겨져 버리지. 그래서 뒤를 잡고 공격하라는 것이다.”
“오호! 생선 비늘을 벗길 때처럼 역으로 긁어 내야 하는군요!”
“그렇다. 하지만 비늘을 벗겨 낼 수 있다고 해서 아무 곳의 비늘이나 긁어 내서는 안 돼.”
“우웃? 그건 어째서인가요!?”
“놈에게 데미지를 입힐 수 있는 부위는 뼈와 뼈가 이어진 관절 부분이다. 이 관절 부분의 비늘을 벗겨 낸 뒤 공격해야 살도 취하고 뼈도 취할 수 있기 때문이지. 다른 부위는 질겨서 비늘을 벗겨 냈다고 해도 데미지를 박아 넣기가 쉽지 않다.”
“오왓! 급소를 노려야 한다는 뜻이군요!”
“맞아.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다른 공략 패턴이 있다. 이 뱀은 특이하게도 이빨에 강력한 독이 있긴 하지만 정작 자기 독에 대한 내성이 없지. 그래서 놈의 이빨을 뽑아서 놈의 몸에 박아 넣으면 독 데미지를 입힐 수 있다. 혹은 입을 쩍 벌렸을 때 부드러운 입 안에 상처를 내는 것도 한 방법이지. 아니면 비교적 가까운 필드의 다른 보스 몬스터와 싸움을 붙여서 어부지리를 취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또….”
폭포수처럼 이어지는 공략.
처음에는 눈을 반짝거리며 듣던 니아 멤버들은 점점 지쳐 가고 있었다.
분명 하나 하나가 좋은 공략법이었지만 그 좋은 공략법이 끊이질 않고 계속 계속 계속 계속 흘러나오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슨 놈의 필드보스를 잡는 공략이 825가지나 된단 말인가!
니아 멤버들은 일제히 같은 생각을 했다.
‘…투 머치 토커다!’
* * *
게임에서 벗어나 다시 현실.
나는 지금 작은 회사의 사무실 중앙에 앉아 있다.
내 앞에는 임우람 매니저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마주앉아 있었다.
그는 게임에서 볼 때와 비슷한 외모였다. 덥수룩한 수염에 커다란 덩치. 수더분한 미소.
“먼 길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인물 님.”
“…차 타면 금방인데요 뭐.”
“그런데 갑자기 왜 존댓말을 쓰세요?”
“현실에서도 반말하면 좀 그렇잖아요. 게임과 현실은 구분해야죠.”
“앗, 그렇군요!”
임우람 매니저는 머쓱한 표정으로 웃는다.
그는 이제 막 서른이나 되었을까?
따지고 보면 나보다 훨씬 어리지만 일단 나의 표면적인 나이보다는 더 많으니 마냥 반말을 할 수는 없다.
나는 고개를 돌려 사무실 한 구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미묘한 표정의 니아 멤버들이 서 있었다.
나는 그녀들에게 말했다.
“방금 계약서에 도장 찍었으니 나는 이제부터 너희들의 코치다. …아참, 말은 깔게?”
“…네에에.”
니아 멤버들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들의 시선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자. 너희들도 알 거야. 다른 회사들은 지금 빵빵한 아이템들 사 모으고 있고 랭커들 동원해서 열렙 중이지.”
“…….”
“뒷배경이 약한 너희들이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몇 가지 없어.”
내 말에 니아 멤버들은 눈을 반짝 빛냈다.
길이 없는 줄 알았는데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그녀들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어렸다.
…하지만.
이어진 내 말에 그녀들의 안색은 싹 바뀌어 버렸다.
나는 그녀들에게 두 가지 길을 제시했다.
“너희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지. 첫 번째.”
동시에. 나는 내 몸을 감싸고 있던 담요를 확 걷어 버렸다.
“벗거나.”
벗는다는 말에 니아 멤버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벗어서 떴다’라는 말은 연예인들에게 있어 여러모로 오명이다.
흔히 실력이 부족한 것을 에로시티즘으로 때웠다는 뜻으로 통하는 말.
정말 자기 분야에 깊이 천착하는 아티스트라면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는 위험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펄럭-
나는 손을 뻗어 옆에 있던 임우람 매니저의 옷을 벗겨 버렸다.
“꺄앗!?”
임우람 매니저는 두 손으로 몸을 가리며 저항했지만 별 수 없었다.
덥수룩한 수염이 흩날리며, 그의 옷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정없이 벗겨졌다.
…뭐 그래 봤자 코트였지만.
???
한편, 그 모습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니아 멤버들.
나는 그녀들의 앞에서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혹은 벗기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