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248화 (248/1,000)

249화 거꾸로 흐르는 비 (2)

“비록 순식간에 은퇴 당했지만 그래도 나 전직 프로게이머야! 너희들 정도는 충분히 코치할 수 있다고!”

박보연 박소담, 배수지, 윤두나를 쭉 훑어 보며 말했다.

그녀들은 현재 초보자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중앙대륙에 있었다.

시작의 마을 ‘유토러스’와 튜토리얼의 탑이 우뚝 서 있는 초보자 존.

그곳에서 나온 박소담, 배수지, 윤두나는 뽈뽈뽈 걸어와 박보연의 앞에 섰다.

이 중에 박보연의 레벨이 제일 높았고 나머지는 대부분 비슷비슷하다.

“먼저 너희들이 어떤 전투 방식에 가장 적합한지 봐야겠어. 다들 직업이 뭐야?”

박보연이 묻자 박소담, 배수지, 윤두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직업이라면 궁수, 마법사, 전사 뭐 이런 거 말하는 것 맞지?”

“우리는 게임 직업 딱히 없는데? 그림 그리고 사진 찍고 춤추는 것 밖에 안 해서….”

“무직이네 무직.”

애초에 다들 레벨 10을 겨우 넘는 처지들이다.

“…에휴. 얘네들을 데리고 무슨 대회를 나가겠다고.”

박보연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도 마냥 한숨만 쉴 처지는 아니었다.

박보연은 지난 번 프로리그에서 패배한 뒤 바로 은퇴했다.

그간 변칙 플레이에만 기대 왔던 자신은 프로게이머로서 롱런하기 위한 자질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그보다는 본업인 아이돌에만 더욱 집중하자고 판단하여 팀 천지패황에서 은퇴해 여기까지 왔다.

그 뒤로는 행사나 방송 출연, 연습 등의 이유로 게임을 거의 하지 못했기에 기량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레벨 역시도 다른 랭커들에게 따라잡혀 추월당한 지 오래였고 말이다.

“…할 수 있을까.”

때문에 박보연은 약간 의기소침해졌다.

소속사의 빵빵한 자금으로 좋은 아이템을 사들이고 지금도 상위 랭커들에게 쩔을 받고 있을 다른 아이돌들을 이길 수 있을까?

그것도 뉴비나 다름없는 친구 세 명을 데리고?

“…그래도. 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니까!”

박보연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그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 그녀의 성격이다.

그때, 저 멀리서 임우람 매니저가 식량 자루와 포션 병을 들고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얘들아! 나도 같이 가!”

하지만 그 역시도 딱히 레벨이 높거나 하지는 않았다.

소모품을 잔뜩 챙겨온 것을 보니 현실에서도 게임에서도 천생 매니저이다.

*       *       *

임우람과 니아 멤버들은 마을을 벗어났다.

“직접 부딪쳐 보면서 배우는 게 최고지.”

박보연이 멤버들을 이끌고 간 곳은 ‘숨죽이는 평원’이었다.

“이곳의 몬스터들은 비교적 눈에 잘 띄는 곳에 있어서 기습을 당할 염려가 없어. 공략 난이도도 그리 높지 않은 편이고.”

평원을 돌아다니는 것은 늑대나 삵, 두 발로 뛰는 새, 커다란 달팽이, 벌, 지네 등이다.

대부분 레벨이 낮은 몬스터들이었기에 잡아 봐야 성장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지만, 일단 부족한 전투 경험을 쌓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툭탁툭탁-

니아 멤버들은 열심히 평원의 몬스터들을 잡기 시작했다.

“꺄악! 이 달팽이 봐! 왜 이렇게 커! 징그러워!”

“그나저나 늑대랑 달팽이의 위험 등급이 똑같네? 게임 속 생태계는 현실의 생태계와 완전 다르구나.”

“앗! 갑옷 나왔다! 입어 봐야지, 디자인은 별로지만.”

박소담, 배수지, 윤두나는 저마다 열심히 사냥을 해 경험치를 쌓고 있었다.

하지만 몬스터를 잡는 것과 PVP는 많이 다르다.

박보연은 사냥을 통해 레벨을 올린 뒤 플레이어끼리의 싸움에 대비한 훈련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은 어디까지나 생각일 뿐.

박보연 역시도 그렇게 뛰어난 전문성을 가진 이가 아니었기에 앞길은 막막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니아 멤버들은 모두 암담한 심경이다.

뭐라도 해야 했기에 뭐라도 하고 있지만, 이것이 정말 맞는 길인가 싶다.

애초에 아이돌 안무 대회라거나 체조 대회, 육상 대회 같은 것이었다면 열심히 운동을 해서 나가겠지만…게임 대회라니!

박보연을 제외하고 다들 문외한인 영역이었기에 뭘 준비하고 대비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

그렇게 다들 답답해하고 있을 때.

[쉬익!]

어디선가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헉!?”

뒤를 돌아본 박보연은 헛바람을 집어삼켜야만 했다.

저 멀리 떨어진 멤버들을 향해 긴 그림자를 드리운 존재.

박소담, 배수지, 윤두나의 뒤로 무언가 커다란 것이 불쑥 솟아나 있었다.

<긴칼비늘 킹코브라> -등급: C+ / 특성: 변온, 독, 백전노장

-크기: 13m.

-서식지: 숨죽이는 평원, 자살 숲, 패륜아의 둥지

-이 변덕스러운 파충류는 자신의 영역을 부모보다도 소중히 한다고 알려져 있다.

땅에 그림자를 드리울 정도로 거대한 뱀.

그것은 징그럽게 갈라진 비늘의 틈 사이로 노오란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숨죽이는 평원의 지배자 긴칼비늘 킹코브라가 울부짖었다.

박보연은 기겁했다.

“우왓!? 저 녀석 되게 만나기 힘든 놈인데 왜 이곳에…!?”

하지만 지금 녀석을 만날 확률을 따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하필이면 이 시점에 필드보스를 만날 줄이야.

‘지금 사망 패널티를 받으면 더 치명적이야!’

박보연은 이를 악물고 멤버들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그녀에게 딱히 별다른 구원책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무기는 이것 하나뿐이다.

-<미니멀 라이프 링> 반지 / B

애인을 너무 귀여워한 나머지 주머니 속에 쏙 넣고 다니고 싶어 한 마법사가 있었다.

그는 아주 오랜 시간을 연구한 결과, 상대방을 아주 작게 만들면서도 본래의 신체능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마법을 개발했다.

물론 애인과는 헤어졌기에 그 마법을 실제로 써먹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회피율 +30%

-이동속도 +10%

-최대 HP +5%

-특성 ‘주머니쏙’ 사용 가능 (특수)

몸을 작게 만드는 능력.

단지 이것만으로는 위기에 처한 동료들을 구할 수 없다.

“모두 피해!”

박보연이 다급하게 외치자 다른 멤버들 역시 재빨리 뒤로 빠졌다.

하지만 보스 몬스터가 괜히 보스 몬스터가 아니다.

쫘악-

긴칼비늘 킹코브라의 배 근육이 부채처럼 펴지며 안쪽의 갈빗대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마치 포옹을 하는 것처럼 니아 멤버들을 껴안는다.

퇴로가 순식간에 확 좁아졌다.

“이익!”

박보연은 이를 악물고 돌진했다.

퍽!

그녀가 몸으로 들이받자 긴칼비늘 킹코브라는 그 큰 몸을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한데?

[…쉬이이익!]

놀랍게도 긴칼비늘 킹코브라는 물러나는 와중에도 몸을 틀어 박보연의 뒤에 숨은 다른 멤버들을 공격해 온다.

긴 꼬리가 채찍처럼 휘둘러져 박보연의 뒤를 향했다.

“어엇! 이 자식 어딜!”

박보연은 깜짝 놀라 긴칼비늘 킹코브라의 공격을 차단했다.

하지만 긴칼비늘 킹코브라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머리와 꼬리로 니아 멤버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 이 자식 왜 이렇게 세지?”

박보연은 긴칼비늘 킹코브라의 난폭함과 힘에 두 번 놀랐다.

이런 공격력과 속도라면 위험하다.

임우람이 재빨리 힐 마법으로 니아 멤버들을 회복시켜 주었지만 그뿐이었다.

“보연아 위험해!”

배수지가 소리쳤다.

뒤의 멤버들에게 신경 쓰느라 전방 주시를 제대로 하지 못한 사이, 긴칼비늘 킹코브라가 박보연을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이 자식의 공격력 정도라면 막을 수 있어!”

박보연은 완갑을 들어 긴칼비늘 킹코브라의 입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우직-

완갑은 조금 버티는가 싶더니 이내 산산조각으로 박살나 버렸다.

“헉!?”

박보연은 파괴된 아이템을 버리고 잽싸게 뒤로 물러났지만 긴칼비늘 킹코브라는 그런 박보연을 바로 따라온다.

실로 가공스러운 반사 신경이었다.

‘이 녀석은 분명 C+등급일 텐데 왜 이렇게 센 거지?’

박보연은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알기로 긴칼비늘 킹코브라는 이렇게까지 빠르고 강한 몬스터가 아니다.

심지어 AI까지 똑똑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있지 않은가?

저 스피드에 저 공격력이면 절대로 C+등급 판정을 받을 수가 없다.

‘최소 B…어쩌면 +가 붙을지도…….’

박보연이 불길한 상상을 하고 있을 즈음.

[키이이이이익!]

긴칼비늘 킹코브라가 최후의 공격을 감행하려고 한다.

놈이 입을 쩍 벌리는 순간 박보연은 이상한 점을 눈치 챘다.

‘…저건!?’

긴칼비늘 킹코브라가 쩍 벌린 입 속에는 플레이어들의 시체가 보인다.

빵빵하게 부풀어 있는 배를 보니 한 두 명이 당한 것 같지가 않다.

그녀는 긴칼비늘 킹코브라의 입 속을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그것은 불가능했다.

“보연아! 도망가야 돼!”

윤두나가 박보연의 앞을 가로막고 그녀를 등으로 밀었다.

박소담과 배수지 역시 그녀의 몸을 뒤로 잡아당긴다.

임우람이 뒤에서 쩔쩔매고 있는 소리도 들려왔다.

“으아아아! 어떻게 하지! 못 피하겠어! 다들 조심해!”

그도 그럴 것이, 긴칼비늘 킹코브라가 저 거대한 몸으로 돌진해 오면 피해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니아 멤버들과 임우람 매니저의 운명은 마치 죽음의 신이 내려다보고 있는 심판대에 오른 모양새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선고가 내려지려 한다.

[쉬이이이익!]

긴칼비늘 킹코브라가 그 거대한 머리통을 지면으로 내리꽂았다.

한 번에 모두를 집어삼키려는 움직임!

“……!”

박보연은 두 눈을 꾹 감았다.

혹시나 자기가 죽어도 뒤에 있는 동료들만은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그러나.

곧이어 눈앞에 펼쳐진 것은 전혀 의외의 결과였다.

콰-쾅!

긴칼비늘 킹코브라의 머리가 그대로 지면에 부딪쳤다.

동시에.

뿌직-

요란한 소리와 함께 니아 멤버들의 얼굴에 피가 튀었다.

긴칼비늘 킹코브라는 공격 자세 그대로 머리를 땅에 찧었고 그대로 목뼈가 부러져 죽어버린 것이다.

“……?”

박보연을 비롯한 니아 멤버들 모두는 벙 찐 표정으로 그 광경을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공격하는 거 아니었어?”

“그대로 죽어 버렸는데?”

“…무슨 상황이야 이게?”

다들 얼떨떨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다.

죽음 직전의 위기에서 너무 황당하게 빠져나왔다.

설마 적이 이런 식으로 자살을 할 줄이야.

…하지만.

“!”

박보연만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 챘다.

그토록 영리하던 긴칼비늘 킹코브라가 갑자기 바보가 된 것도 아니고, 실수로 맨땅에 머리를 부딪쳐 죽을 리가 없다.

쉬이이이…….

긴칼비늘 킹코브라의 머리는 지금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

피어오르는 수증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가 하나.

“…제대로 도착했나 보네.”

연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의문의 남자.

니아 멤버들이 위기에 처한 순간, 그는 긴칼비늘 킹코브라의 머리통 위에 별똥별처럼 떨어져 내렸다.

별에서 온 그대(?).

그는 눈앞에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니아 멤버들을 향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긴칼비늘 킹코브라는 ‘백전노장’ 특성이 있어서 보이는 등급을 그대로 믿으면 안 돼. 같은 긴칼비늘 킹코브라들 중에서도 수많은 뉴비들을 죽여 온 특정 개체는 어지간한 상위 등급의 몬스터보다도 강하지. 맞설 생각을 하기 전에 놈의 실제 등급을 체크해 보는 것이 먼저다.”

그 말을 들은 박보연은 입을 딱 벌렸다.

이 남자의 지식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다.

복장 때문에 놀란 것이다.

알몸.

그는 너무도 당당히 알몸으로 서 있었다.

손에는 투박하게 생긴 송곳이 들려 있고 그 반대쪽 손에는 찢어진 텔레포트 스크롤이 나풀거린다.

“…누구세요?”

니아 멤버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묻자, 알몸의 사내는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너희들이 쪽지 보냈잖아.”

고인물 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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