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247화 (247/1,000)
  • 248화 거꾸로 흐르는 비 (1)

    나는 오래 전에 받았던 광고 메일을 열어 보았다.

    <안녕하세요. ‘어진 이 엔터테인먼트’ 기획실장 임우람입니다. 걸그룹 ‘니아(NIAR)’ 앨범 홍보 관련해서 문의드립니다. 중간 소배너라도 배정해 주시면 정말 감사드리겠…….>

    완전 초창기, 내가 막 인터넷 방송을 시작했을 당시에 온 광고 메일이다.

    회사 이름이 나랑 비슷해서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니아라.”

    나는 턱을 한번 쓸었다.

    이쪽에서 온 메일은 이것이 다가 아니다.

    <안녕하세요. 신인 걸그룹 ‘니아’의 총괄 매니저 임우람입니다.>

    안녕하세요. 새로운 대박 프로그램 런칭을 우선 축하드립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저희 매니지먼트 측에서도 비슷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는데 한번 살펴주십사...(중략)...

    ‘연예인 게임단’ (가제)

    한창 ‘고인물의 골목 게이머’ 예능을 찍고 있을 때 받았던 제안이다.

    “…보는 눈 있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찌감치 아이돌과 게임이라는 두 콘텐츠를 결합시킬 생각을 했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나에게 몇 번이고 러브콜을 보내온 정성도 있다.

    미래를 읽는 감각이 상당히 탁월한 업체 같았다.

    “물론 그들 중 하나랑은 좀 악연으로 얽혀 있긴 하지만…….”

    나는 눈을 감고 지난 번 프로리그를 떠올렸다.

    결승전에서 만난 프로팀 ‘천지패황’

    거기서 첫 번째 주자로 나왔던 박보연이라는 선수가 있었다.

    ‘박보연, 02년생, 현실 직업은 연예기획사 연습생, 키는 162cm, 몸무게는 49kg, 혈액형 O형, 시력 양쪽 다 2.0, 가정환경 부1 모1 군대 간 오빠 1, 별자리는 물병자리, 좋아하는 음식은 작고 아기자기한 군것질거리, 추구하는 삶은 미니멀 라이프….’

    귀여운 외모와 뛰어난 게임 실력으로 앞으로 금세 유명해질 그녀이다.

    나 역시도 한때 잠깐 팬이었던 적이 있어서 잘 알고 있었다.

    메인보컬이자 리더를 맡고 있는 박보연.

    그 외에 박소담, 배수지, 윤두나로 구성되어 있는 4인조 걸그룹 ‘니아’

    내가 알고 있는 미래에서 그녀들은 ‘대기만성’이라는 단어 그 자체의 삶을 살았다.

    고생고생 끝에 데뷔는 했지만 대중들에게 알려지기까지 무수히 많은 고난을 겪어야만 했다.

    길고 힘들고 가난한 무명 시절을 버티고 또 버텨서 결국 마지막에서야 대성하게 되는 걸그룹.

    그 전까지는 ‘듣보잡’ ‘무명돌’ ‘생계형 아이돌’ 등의 평가를 들었던 이들.

    그러다가 천천히 노력과 실력, 인성을 인정받아 장차 탑의 위치에 서게 될 여자들.

    “기왕이면 이런 데를 밀어 주는 게 낫겠다.”

    미래를 놓고 보면 MS타운 엔터보다는 어진 이 엔터와 손을 잡는 게 이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니아코인 탑승합니다!’

    어차피 정정당당하게 성공할 사람들이라면 그것을 조금 앞당겨 줘도 상관없겠지?

    *       *       *

    1호선 백운역 근처에 자리한 어진 이 엔터의 기숙사.

    검은색 벤이 작고 허름한 빌라 앞에 멈춰 섰다.

    이윽고 차 문이 열리고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여자 세 명이 내렸다.

    그리고 그 뒤로 맨얼굴을 드러낸 여자 하나가 따라 내린다.

    박보연.

    작은 키에 귀여운 얼굴. 성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려 보인다.

    마치 중학교를 갓 졸업한 듯한 외모랄까.

    그러자 다른 세 명의 멤버가 박보연을 나무랐다.

    “야! 너는 연예인이라는 자각이 없냐?”

    “아무리 집 앞이라고 해도 그렇지, 누가 알아보면 어쩌려고?”

    “빨리 마스크 써!”

    박소담, 배수지, 윤두나가 한마디씩 했다.

    하지만 박보연은 피곤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됐어. 우리를 누가 알아봐. 아무도 몰라. 빨리 올라가기나 해.”

    실제로.

    쓰레기를 버리러 현관문을 나서던 아줌마 하나가 그녀들에게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은 채 슬쩍 스쳐 지나간다.

    박소담, 배수지, 윤두나는 다소 맥 빠진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다가 자기들도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벗어 버렸다.

    “에이, 답답해. 마스크 괜히 쓰고 다녔네. 이웃도 못 알아보는데.”

    “크크크. 야, 우리보다 매니저 오빠가 더 유명하겠다. 맨날 방송국 문턱 닳도록 왔다갔다해서.”

    “아 피곤해. 빨리 올라가서 쉬자. 제일 먼저 씻을 사람 손!”

    “어? 나! 나! 내가 먼저 씻을게! 너가 씻고 나면 변기랑 휴지 다 젖잖아!”

    그녀들은 우르르 올라가 숙소로 들어갔다.

    네 명이 살기에는 조금 좁은 투룸 빌라.

    방 하나에 2층 침대와 큰 책상이 하나씩 있다.

    그녀들은 자기들 침대에 옷을 훌훌 벗어 걸쳐 놓고는 두 명씩 화장실로 들어갔다.

    일단 서로 몸에 물을 뿌려 준 뒤 한 명이 물로 몸을 씻는 동안 하나는 비누칠, 끝나면 서로 교대한다.

    다소 짠한 샤워 풍경이었지만 시간과 물을 아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그녀들 역시도 이런 생활이 익숙한지 딱히 불만은 없어 보였다.

    “으, 시원하다. 행사 공연 끝나고 씻는 게 최고지. 맥주 없나?”

    “어!? 냉장고에 내 뚱땡이 바나나우유 누가 먹었어!?”

    “아, 그거 유통기한 지났길래 버렸어. ...내 뱃속으로.”

    “으아, 전신이 다 쑤시네. 진짜 피곤하다.”

    그녀들은 샤워 후 제각기 스트레칭을 하며 노곤한 표정을 짓는다.

    일주일 전 쯤 케이블 예능에 출연해 4인 5각 달리기를 하루 종일 한 적이 있었다.

    그녀들은 워낙에 손발이 잘 맞아서 NG없이 척척 해냈지만 같이 출연한 개그우먼 그룹이 연달아 삑을 내는 바람에 몇 번이고 재촬영을 한 결과였다.

    제대로 피로를 풀 시간도 없어 전신 근육통이 장난 아니던 차에 오늘 지방 행사를 다녀오느라 피곤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괜찮다.

    오늘은 그 고생을 하며 녹화했던 예능 프로그램이 방송되는 날이니까!

    그녀들은 낡은 구형 TV앞으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야, 근데 우리는 진짜 합이 잘 맞지 않냐? 4인 5각 그거 쉬운 게 아니잖아.”

    “맨날 그렇게 안무 연습을 같이 하는데 합이 안 맞고 배기겠냐?”

    “확실히 그때 우리가 좀 빠르긴 빨랐지? 예쁘게 나와야 할 텐데.”

    “다른 아이돌 그룹보다 월등히 빨랐잖아. 크크, 방송 분량 챙겨 주겠지?”

    니아 멤버들은 곧 이어질 케이블 방송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게 뭐야?”

    네 명의 표정은 일제히 멍하게 바뀌었다.

    45분짜리 방송이 끝날 동안 그녀들이 화면에 나온 시간은 불과 4분 44초였다.

    녹화는 20시간을 넘게 했는데 화면에는 4분 44초만 나왔다.

    그것도 실수한 부분만 모아서, 주변 팀원들에게 민폐만 끼치는 역할로.

    실제로는 NG 한번 내지 않고 모든 것을 캐리해 왔건만 화면에는 허약한 피지컬과 덜렁거리는 실수투성이인 모습으로만 잡혔다.

    대신 NG만 엄청 내던 개그우먼 그룹을 알파걸로 만들어 띄워 주고 있었다.

    “야 이거 뭐야! 장난하나! 저 계집애 저거 달리기 하다 넘어져서 울어 가지고 내가 얼마나 달래 줬는데! 오히려 나를 달래는 것처럼 해 놨네!”

    “이건 너무 심하다. 누가 보면 우리가 완전 개그우먼들한테 힘든 거 다 떠넘기는 민폐 걸그룹인 줄 알겠어. 소품도 우리가 다 날랐는데 저 사람들이 나른 것만 클로즈업했잖아?”

    “와, 나는 분명 ‘저분들보다야 우리가 낫죠. 체력만 놓고 보면요, 맨날 그렇게 춤 연습을 하는데…’ 라고 했는데 이걸 외모 대결로 몰고 가네…. 앞에 대사만 편집해서 내보내면 우리가 개그우먼들 외모 무시하는 것 같잖아!”

    “진짜 통편집도 이런 통편집이 없다. 차라리 통편집만 했으면 다행인데 완전 우리만 나쁜년들 만들어 놨어. 4인 5각 경기는 아예 나오지도 않았네. 이럴 거면 왜 시킨 거야?”

    니아 멤버들은 시무룩해졌다.

    아무리 이번 예능이 신인 개그우먼들 띄워 주는 코너라고는 하지만 자신들을 악역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너무했다.

    달린 댓글을 보자 가슴이 더욱 아프다.

    -저년들은 먼데 남의 외모 무시하냐?

    -니아? 니아가 뭐임ㅋㅋㅋ나니아 연대기임?

    -앞으로 너네는 ‘막해도니아’다 ㅋㅋㅋㅋ

    -마! 니아를 놔도!

    -이제부터 믿고 거르는 니아

    -웬 듣보들이 나와서 아이돌부심???

    .

    .

    악플보다 무서운 것이 무플이랬던가?

    그 말은 틀린 말이다.

    차라리 무플이 낫다.

    무플을 보면 슬프지만 악플을 보면 슬픔과 분노가 동시에 느껴지니까.

    “으아아아! 알지도 못하면서!”

    박보연은 베개를 주먹으로 팡팡 내리치며 고함쳤다.

    바로 그때.

    “…얘들아~ 행사료 들어왔다!”

    현관 쪽에서 쾌활한 외침이 들려왔다.

    임우람.

    수염이 덥수룩한 거한 하나가 양 손에 꽉 찬 마대자루를 들고 낑낑거리면서 들어오고 있었다.

    니아를 전담하는 매니저이자, 대표를 보좌하는 비서이자, 기획 등 실무를 도맡아 하는 만능 엔터테이너…라고 포장하지만.

    사실은 중소 매니지에서 고생고생하고 있는 직원이다.

    “오빠 오셨어요?”

    박보연과 멤버들은 우르르 일어나 임우람을 마중 나온다.

    마치 먹이를 가져온 어미 새를 반기는 새끼 새들처럼.

    한데?

    그녀들의 표정이 아리송해진다.

    “…오빠. 행사료 입금됐다면서요? 그것들은 뭐예요?”

    니아 멤버들이 묻자, 임우람은 손에 든 마대들을 끙 하고 현관 앞에 내려놓았다.

    “뭐긴. 오늘 뛰었던 행사 행사료지.”

    ???

    니아 멤버들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마대자루를 펼치자 안에 씨알 굵은 오이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뭐야. 오이 축제 행사라고 설마 행사료도 오이로 준 거예요?”

    “…응. 돈이 없대.”

    “미친! 돈이 없으면 연예인을 왜 불러!”

    “너무 화내지 마. 그래도 이거 다 팔면 우리 행사료보다 더 나온댔어. 요즘 오이값이 원체 비싸잖냐.”

    “아니, 무슨 가상화폐도 아니고…오이 코인이에요?”

    니아 멤버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야심차게 출연했던 방송에서는 통편집, 달리는 댓글이라고는 악마의 편집에 의한 악플들, 거기에 개고생하며 뛰었던 지방 행사의 대가로 받은 것은 오이다.

    임우람은 축 쳐져 있는 멤버들을 격려했다.

    “자, 얘들아. 너무 기죽지 말고 파이팅 하자. 일단 주변에 이 오이 살 사람 있는지 수소문 좀 해 봐라.”

    “아 장난해요!? 저번에 고추 축제 갔을 때도 행사료 대신 고추랑 고추장 들어와서 그거 파느라 죽는 줄 알았다구요! 내 친구들이 나 농사짓는 줄 안단 말이야!”

    박보연이 빽 소리치자 임우람이 머리를 긁적였다.

    “에이, 보연아. 그래도 이번에 큰 거 하나 나가잖아. 진정해.”

    임우람의 위로를 들은 박보연은 씩씩거리던 것을 겨우 진정했다.

    그가 말하는 ‘큰 것’이란 바로 아이돌 E스포츠 선수권 대회를 뜻한다.

    지금까지 그녀들이 경험했던 무대 중에 가장 크고 화려한 곳이었다.

    전직 프로게이머였던 박보연에 대한 배려로 겨우 겨우 배정받은 자리.

    그마저도 원래 그녀들의 자리도 아니었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어야 할 걸그룹이 음주운전과 뺑소니로 구속되는 바람에 급하게 남는 티오에 비집고 들어간 것이다.

    “우리 팬 좌석이 몇 개랬지?”

    “10개래.”

    “…우와, 완전 짜다. 소금소금~”

    “어쩔 수 없지. 팬덤 규모에 비례해서 배정하니까.”

    하지만 니아 멤버들은 이런 기회를 얻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해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녀들은 게임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

    전직 프로게이머였던 박보연이 있기는 했지만 그녀는 변칙 메타로 잠시 흥했을 뿐 기본기 자체는 그리 탄탄하지 못하다.

    제대로 된 프로게이머가 와서 코치를 해 주지 않는다면 성적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박보연은 임우람을 돌아보았다.

    “오빠. 우리 팀 코치해 줄 분 찾았어요?”

    그러자 임우람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요즘 연예기획사에서 프로게이머나 랭커들을 공격적으로 빼 가고 있어서…좀 어렵다. 한 기획사가 랭커 10명을 스카웃하는 경우도 있대.”

    말 그대로다.

    아이대 대비를 위해 모든 연예기획사가 눈에 불을 켜고 프로게이머들을 컨택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잘 나간다 싶은 프로게이머들은 엄청난 계약금을 받고 연예기획사의 아이돌 전담 코치로 들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다들 몸값이 너무 올라버려서 재정 규모가 열악한 어진 이 엔터로서는 어중간한 랭킹의 랭커조차도 컨택할 돈이 없다.

    “…….”

    “…….”

    “…….”

    “…….”

    니아 멤버들 사이에 침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코치가 없으면 대회에 나가도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 어렵다.

    가뜩이나 인지도도 없는데 대회 성적까지 나쁘면 방송 분량은 거의 챙길 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때.

    “아니야! 우리끼리도 할 수 있어!”

    박보연이 앙증맞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멤버들을 격려했다.

    “비록 순식간에 은퇴 당했지만 그래도 나 전직 프로게이머야! 너희들 정도는 충분히 코치할 수 있다고!”

    그러자 박소담, 배수지, 윤두나는 반신반의 하는 표정으로 박보연을 쳐다본다.

    박보연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한 달이나 남았잖아. 부딪쳐보자. 내가 그때까지 너희들을 훈련시켜 줄게!”

    그녀는 말을 마친 뒤 재빨리 가방을 쌌다.

    그리고는 멤버들을 향해 외쳤다.

    “당장 캡슐방으로 가자! 처음에는 일단 몬스터랑 싸워 보면서 배우는 게 최고야!”

    다행스럽게도 다들 캐릭터 생성 정도는 해 둔지라 접속만 하면 된다.

    니아 멤버들은 주섬주섬 짐을 꾸려 숙소 근처의 캡슐방으로 향했다.

    “어? 얘들아 같이 가!”

    행사료로 들어온 오이를 냉장고에 정리하고 있던 임우람 역시 그런 그녀들을 허겁지겁 따라나선다.

    무명 걸그룹 니아의 아이돌 E스포츠 선수권 대회 연습이 시작되었다.

    …변변찮은 코치 하나 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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