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246화 (246/1,000)
  • 247화 아이돌 E스포츠 선수권 대회 (4)

    이연지.

    걸그룹 크레파스의 리더.

    02년생으로 키는 165cm에 청순가련한 이미지로 삼촌팬들을 줄줄이 몰고 다니는 탑 급 아이돌이다.

    크레파스 멤버들 중 가장 개인 팬덤이 크고 외부 활동도 많이 다닌다.

    안무와 가창력 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실력파에다가 인성 또한 훌륭해서 종종 기부금을 냈다거나 봉사활동을 갔다거나 하는 미담들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

    뭐, 일단 여기까지가 대외적인 이미지.

    하지만 내가 직접 만나 본 이연지의 인성은 알려진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자본주의 미소, 방송용 청순함 뒤에 숨은 그녀의 본얼굴은 짜증과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이연지는 못미덥다는 표정으로 나를 곁눈질했다.

    “아, 아이대 코치로 오신 분이셨구나? 올라오는 길에 방송 몇 개 보긴 봤어요. 초딩들한테 인기 많으시던데.”

    “네 뭐…….”

    내가 머쓱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저희 가르쳐 주실 때는 옷 입고 하실 거죠?”

    “……네?”

    생각도 못한 질문에 멍해진다.

    내가 되묻자, 이연지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뇨, 방송 보니까 옷 벗고 다니시던데. 좀 더럽잖아요. 아무리 인기랑 돈이 좋기로서니 그렇게 벗는 건 좀…싸구려 같으니까.”

    말투가 묘하게 공격적이다.

    그녀는 말끝에 내게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대표님도 참…어디서 저런 남X을 데려오셨담….”

    나는 이연지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저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제가 게임을 할 때 옷을 벗고 플레이하는 건 여자 시청자들에게 돈 받으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아니었어요?”

    “네. 외설적인 것이랑은 진짜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내 해명을 들은 이연지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여전히 경계심 가득한 어조로 물었다.

    “그럼 굳이 벗는 이유가 뭔데요?”

    “그야 극한의 속도와 공격력을 얻기 위해서죠. 투구나 갑옷 같은 것을 걸치면 그만큼 느려질 수밖에 없거든요.”

    “뭐야.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요? 천으로 된 옷이 무게가 얼마나 한다고.”

    “그 0.1g의 무게 때문에 생사가 오가는 것이 레이드입니다. 그리고 제 스킬들 때문에 어차피 방어구는 착용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

    크라켄의 틈 특성이나 씨어데블의 마찰계수 특성은 알몸 상태로 써야 효과가 극대화되기 때문에 방어구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나는 자신감 있게 말했다.

    “적의 공격 따위는 단 한 대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자신감. 알몸 플레이는 그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완전무결함 그 자체를 말이죠.”

    조금 변태 같은 말이기는 하지만 다 사실이다.

    대부분의 게임은 고수가 될수록 커스터마이징과 장비 세팅을 괴상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변수들에 적응했을 뿐만 아니라 게임 속 모든 것들을 죄다 예측, 통제 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때가 바로 분기점이다.

    두터운 갑옷, 화려한 아티펙트, 멋진 커스터마이징.

    평범한 사람들은 ‘고수라면 응당 이래야지’ 하고 생각하겠지만, 그 모든 편견과 틀을 깨고 전혀 새로운 모습을 하게 될 때부터 고수들은 고수를 넘어 진정한 초인의 영역에 접어든다.

    오로지 자신의 몸 그 자체만으로 완전무결함에 도달한 경지.

    그 증표가 바로 ‘알몸’ 것이다.

    …하지만.

    이제 막 게임을 시작한 뉴비들이 그런 말을 이해해 줄 리도, 공감해 줄 리도 없다.

    이연지는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깔아 보기 시작했다.

    당연히 입에서 나오는 말도 짧다.

    “뭐야. 사이코 변태잖아 그냥. 나중에 우리까지 벗기려고 드는 것 아냐?”

    나는 이연지의 말에 발끈했다.

    알몸으로 게임을 하는 것은 극한의 효율성을 추구한 결과일 뿐만 아니라 나의 굳건한 신념이 반영된 행동이기도 하다.

    ‘옷 못 입는다고 욕하는 것은 괜찮아도 옷 안 입는다고 욕하는 것은 못 참아!’

    내가 막 항변하려고 할 때.

    “자자, 됐어요. 양쪽 말 다 일리가 있네. 들어 보니까.”

    추성현이 손바닥을 들어 나와 이연지의 말을 잘랐다.

    그가 개입하는 순간 이연지는 바로 고분고분해졌고 때문에 말싸움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추성현은 골치 아프다는 듯 손가락으로 미간 사이를 주물거렸다.

    “일단 내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연지의 이야기가 맞고….”

    추성현의 말을 들은 이연지가 그것 보라는 듯 나를 흘겨보았다.

    나는 어이가 없어 입을 반쯤 벌렸다.

    ‘객관적이긴 뭐가 객관적이야. 엄청 주관적이구만.’

    사람이 극도로 황당하면 오히려 침착해진다.

    나는 입을 다물고 추성현의 다음 대사를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대수롭지 않게 나를 돌아보았다.

    “크레파스 애들이 벗어야 뜨는 급도 아니고, 연지 말마따나 싸구려틱하게 가지 맙시다. 혹시라도 애들 벗길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시고…. 그쪽도 옷 제대로 입어 주세요.”

    “아니, 벗는 게 그 목적이 아니라니까요?”

    “어쨌든요. 외설적인 건 안 돼.”

    “아니! 외설적인 게 아니에요 이건! 일종의 밈이고 문화인데….”

    나는 억울함을 담아 소리쳤다.

    지금껏 내가 알몸으로 플레이하는 것을 본 시청자들 중 대부분은 병맛 감성을 즐기는 이들이었다.

    내 벗은 몸이 성적으로 끌려서 방송을 보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소리다.

    (…일부 사람들은 제외하고)

    ‘애초에 이건 현실이 아니라 게임이잖아!’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게임 속 알몸은 현실의 알몸과는 다르게 밋밋하며 또 그렇게 자세히 구현되어 있지도 않다.

    엄밀히 말하면 살색 도트들의 응집체에 불과한 것을 대체 왜 외설적으로 보느냔 말이다!

    하지만 추성현과 이연지는 단호했다.

    “아무튼 옷 입지 않으면 계약은 힘들어요.”

    그들의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미팅에 3시간을 늦거나, 인터넷 방송을 한다고 무시당하거나, 어리다고 반말 듣는 거나, 대기업 대 개인이라고 갑질 당하는 거나, 말하는 태도가 띠꺼운 거야 뭐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게임에 임하는 내 신념을 건드리는 것은 그냥 용납할 수가 없었다.

    ‘옷을 입느니 안 하고 말지.’

    나는 알몸 플레이를 기대하는 시청자들에게 이질감을 느끼게 만들고 싶지 않다.

    콘셉트는 굳건해야 하는 것이다.

    도중에 편의에 따라 바꾸고 수정하고 어겨 버린다면 컨셉질을 하는 의미가 없다.

    “그럴 바엔 코치 안 하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내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는 것을 본 추성현이 피식 웃는다.

    “벌써 급여 협상 들어가시는 거예요? 노련하시네. 섭섭지 않게 챙겨드릴 테니까 그냥 앉으세요. 우리 MS엔터입니다.”

    그는 내가 일어나는 게 급여 인상을 위한 쇼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신념을 돈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정답은 ‘YES’다.

    자본주의 사회 아닌가? 돈으로 하지 못하는 것은 거의 없다.

    신념 역시도 얼마든지 돈과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금액을 어느 정도 생각하시는데요? 우리는 2억 정도까지는 맞춰드릴 수 있습니다만?”

    추성현은 네까짓 게 어쩔 것이냐는 듯 빙긋 웃었다.

    2억이면 다른 프로구단 에이스들의 연봉이다.

    그것을 한 달, 아니 실제로 일하는 시간으로 따지자면 일주일 남짓한 시간 안에 버는 것이다.

    다른 연예기획사 코치로 간 프로게이머들의 두 배에 가까운 계약금.

    하지만.

    신념을 돈과 바꿀 수 있다는 것은 ‘등가교환’이라는 법칙을 전제로 한다.

    내 신념을 사려면 그에 걸맞는 액수를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2억으로 저에게 옷을 입힐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나는 코웃음 쳤다.

    그러자 추성현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든다.

    이내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젊어서 그런가 패기가 좋네요. 내가 아무리 대표라고 해도 2억 이상의 지출부터는 이사회의 의견을 거쳐야 하는데…. 그럼 얼마를 줘야 옷 입고 할래요?”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2억이 아니라 2조는 주셔야죠.”

    그러자 추성현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내가 농담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

    하지만 놀랍게도, 나는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잘 잡아 놓은 콘셉트는 나중에 더 큰 이익이 된다.

    지금의 작은 푼돈에 눈이 멀어 기껏 잡아 놓은 콘셉트를 번복한다는 것은 훗날 커다란 디메리트가 될 것이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해외 수많은 기업들이 사들인 ‘이미지’

    그것은 게임을 장시간 플레이한 고인물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 놓은 콘셉트 그 자체였다.

    항아리에 들어간 채 높은 산을 기어 올라가거나, 오리를 타고 도로를 질주하거나, 알몸으로 거대한 보스 몬스터를 거꾸러트리거나, 최단시간 안에 숨겨진 지뢰를 찾아낸다거나.

    언뜻 보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는 이 꾸준한 X신 짓들은 나중에 천문학적인 가치가 매겨진 ‘콘셉트 이미지’가 되어 세계로 수출된다.

    실제로.

    알몸으로 항아리 속에 들어가 엉금엉금 기어서 높은 고산지대를 정복한 한 컨셉러 하나가 중국 스포츠용품점 회사와 수백 억원 대 브랜드 계약을 맺은 사실은 특히 유명하지 않은가.

    이것이 불과 몇 년 안에 이루어질 일이다.

    그러니 굳이 옷을 입는 행동을 해서 이미지를 실추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을 보상하기 위한 대가라면 2조 원쯤은 받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또한 그게 전부가 아니다.

    ‘…드디어 생각났네.’

    나는 크레파스의 말로에 대해 떠올렸다.

    지금 크레파스라는 걸그룹에 대한 인기는 국내 최정상급이다.

    하지만 2년쯤 뒤, 추성현 대표는 뜬금없이 이 크레파스라는 걸그룹을 유럽에 보내 버린다.

    유럽으로 진출한 크레파스는 인지도를 바닥부터 쌓아 올려 가야 했다.

    무료로 행사를 다니고 직접 음반을 돌렸다.

    하지만 결과는 별로 신통치 않았다.

    유럽에서 오랜 시간 고전하는 동안 국내의 팬들도 전부 대체재를 찾아 떠나가 버렸다.

    그 와중에 크레파스 멤버들 간에 크고 작은 불화들이 생겼다.

    그들은 서로 찢어져 반목했다.

    몇몇 멤버들은 속도위반으로 결혼을 하기도 했다.

    음주운전이나 마약, 도박으로 인해 구설수에 오르는 멤버들도 있었다.

    그리고 대표인 추성현이 화룡점정을 했다.

    성추행 스캔들에 휘말린 것이다.

    이후 소속 연예인들의 불공정계약, 불법 정치자금 로비, 대규모 탈세 적발 등의 문제가 잇따라 터져 MS타운 엔터는 빠른 속도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나는 식은땀을 닦았다.

    왜 이것들이 이제야 생각났을까?

    ‘초반 이미지용으로 잠시 이용할까 했는데, 얽히면 큰일 나겠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일어나는 것은 꽤나 시간이 지난 뒤지만, 지금부터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럼 계약 문제는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쩝. 그래요 그럼.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요.”

    내가 거절 의사를 비치자 추성현은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내게서 관심을 거뒀다.

    미움도 급이 맞는 상대에게나 품는 감정이다.

    그는 마치 무생물을 대하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배웅했다.

    물론 이연지는 여전히 나를 벌레 보듯 보고 있었지만, 앞으로 볼 사이도 아니고 상관없겠지.

    나는 대표실 문을 열고 나와 복도를 걸었다.

    “아쉽네. 구단 창립 전에 코치 역할을 한번 해 보고 싶었는데.”

    혹시나 해서 다른 곳에서 온 메일들도 모두 문의를 해 보았지만 너무 늦었다.

    MS타운 엔터와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다른 대형 연예기획사들은 모두 코치를 구해 버린 것이다.

    이대로 아이돌 E스포츠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물 건너가는 걸까?

    …바로 그때!

    내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가만, 예전에 온 러브콜이 하나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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