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한 배를 가르고 나온 사이 (5)
악몽이 던전이 된 것인지, 던전이 악몽이 된 것인지.
아무튼 길고 더러웠던 몽중행(夢中行)이 드디어 끝났다.
“…….”
“…….”
“…….”
나와 윤솔, 드레이크.
우리 셋은 꿈에서 깬 뒤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거 생각보다 꽤 어색하다.
‘…이 분위기 어쩔 거야.’
나는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뭔가 서로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본 듯한 느낌이랄까.
정서적인 유대감은 훨씬 더 끈끈해졌지만 어쨌건 지금 당장의 분위기 자체는 굉장히 머쓱한 것이었다.
“…하하. 하. 뭔가. 던전이란 게 생각보다 굉장히 엉망진창이었네요. 꿈은 정말 꿀 때나 꾸고 난 직후에는 되게 진짜 같아요. 시간이 좀 지나면 확실히 꿈인 걸 알겠는데….”
고맙게도 윤솔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나와 드레이크만 있었다면 서로 아무 말도 안 하고 계속 가만히 있기만 했을 것이다.
그녀 덕분에 대화의 물꼬가 좀 트였다.
“으음, 그러게. 나는 진짜 내가 했던 일들이 다 꿈인 줄 알았어. 꿈속에서 만난 일진들이 ‘형님 이 새끼 웃는데요?’ 할 때는 진짜 무섭더라…이런 게 내가 제일 혐오하는 엔딩이라서.”
“굉장히 불쾌한 악몽이더군. 심지어 너무 리얼해서 꿈과 현실이 뒤바뀌었다고 느껴졌을 정도였다. 우리야 그렇다고 쳐도, 정말 이겨 내기 어려울 정도의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이겠어.”
다들 악몽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온 소감을 한마디씩 한다.
“…….”
나는 고개를 돌려 드레이크를 잠시 바라보았다.
“…? 왜 그러나?”
“……아냐.”
드레이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굳이 더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때 분명 드레이크의 몸이….’
기억 회상 당시 드레이크의 몸, 특히 하반신은 만신창이였다. 절대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점이 내심 마음에 걸렸지만, 굳이 이야기를 더 길게 늘이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 * *
몇 분 뒤.
우리는 주변 정찰을 모두 끝마쳤다.
우리가 타고 있는 운석은 현재 아귀의 뱃속에 둥둥 떠 있다.
마치 이 운석에 한해서만큼은 시간도 공간도 멈춰 버린 듯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윤솔이 내게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먹은 것 토하게 하려면 뻔하지 뭐.”
구멍을 뚫어서 나올 수는 있겠지만 그러면 밖과 안의 기압 차 때문에 바로 망망공해에 내던져질 것이다.
악몽아귀가 삼킨 운석을 고대로 뱉어 내게끔 유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까득…
나는 엄지손가락 끝을 깨물었다.
촤악-
바실리스크의 혈액이 시커멓게 뿜어져 나온다.
나는 그것을 눈에 보이는 모든 뱃속 내장들의 표면에 발라놓았다.
위부터 시작해 간, 신장, 허파, 심장, 십이지장 등등이 시커멓게 물들어 간다.
쿠쿵!
바로 반응이 왔다.
그-에에에엑…
아귀의 뱃속 전체가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아주 곤죽을 만들어 주지.”
드레이크 역시도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맹독과 마나 번 성분이 함유되어 있는 마름쇠들이 아귀의 내장 사이사이와 육벽 주름 틈에 무수히 박혀들었다.
뽁! 뽁뽁! 꾸득… 뿍!
살점들이 꿈틀거릴 때마다 마름쇠가 그 안에서 날카로운 가시로 부드러운 점막을 푹푹 찔러 댄다.
그뿐이 아니다.
나와 드레이크는 아귀의 몸 안에서 그야말로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지진을 일으키거나, 와류를 만들어내거나, 화살로 벽을 득득 긁고 다니는 등, 온갖 진상을 다 피웠다.
물론 육벽에 구멍이 나지 않을 정도로만.
결국.
올 것이 왔다.
[게-에에에에에에에에엑!]
아귀의 뱃속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굉음!
철-썩!
가장 깊숙한 곳에서 거대한 파도가 일어나 운석을 때렸다.
“위액의 파도다! 큰 게 온다!”
나는 윤솔을 구덩이 안으로 피신시켰다. 다음은 드레이크였다.
마지막으로 내가 구덩이 속으로 들어와 샌드웜의 망토를 덮자.
콰쾅!
이내 장 안쪽에서 몰려온 위액이 운석을 앞으로 밀어 내보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격렬한 구토가 시작되었다.
* * *
[…웨에에에엑!]
아귀는 헬쓱한 표정으로 입을 쩍 벌렸다.
쑤욱!
방금 삼킨 운석이 허공으로 튀어 나왔다.
운석이 아귀의 뱃속을 벗어나는 순간, 아카식 레코드의 관리자가 실어 보낸 힘이 다시 발동한다.
파아아아앗-
운석은 다시 원래의 비행궤도를 찾아 날아가기 시작했다.
“우와! 살았다!”
윤솔은 만세를 불렀다.
아귀에게 삼켜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무서웠던 폭우와 벼락들이 이제는 자유를 축하하는 샴페인 폭죽과 빵빠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 자유를 만끽하기에는 이르다.
[오-오오오옵!]
악몽아귀는 그 상태에서 곧장 우리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자기가 토한 토사물을 다시 집어삼키려고 하다니 정말 가공스러운 식탐이다.
“저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드레이크는 암담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즉사’와 ‘방어구 관통’ 특성으로 무장하고 있는 그는 1:1이나 암살 등에 최적화된 궁수.
이런 초대형 몬스터를 상대로 한 경험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드레이크가 악몽아귀에게 가장 무서운 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 내가 지시하는 방향만 잘 노려 봐.”
나는 드레이크의 뒤에서 손가락으로 방향을 지시했다.
“6시 방향의 수염과 12시 방향의 촉수.”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드레이크의 화살이 날았다.
피핑!
드레이크의 화살이 날아 악몽아귀의 전신에 난 촉수 끝 풍선 부분을 때렸다.
과연 에임(Aim) 하나는 기가 막히다.
그러자.
뻐-엉!
마치 거대한 에드벌룬이 터지는 듯한 굉음이 났다.
휘청…
악몽아귀의 거대한 몸이 일순간 한쪽으로 확 쏠리는 것이 보였다.
[우-우우우우우!]
놈은 황급히 다른 쪽의 지느러미와 풍선 촉수들을 뻗어 균형을 잡는다.
그리고 언제 휘청거렸느냐는 듯 구름 위를 헤엄쳐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와 드레이크는 분명히 봤다.
“저놈…방금 휘청거렸지?”
나는 드레이크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악몽아귀는 부레가 여러 개로 나뉘어 몸 밖으로 돌출되게끔 진화했지. 촉수나 수염 끝에 난 가스 주머니로 허공에 떠 있는 거야. 부레옥잠 같은 느낌으로.”
“그래서 그 주머니를 터트리는 것이군.”
“맞아. 부레로 가스를 보내는 기관은 뱃속 깊은 곳에 있어. 악몽아귀는 각각의 촉수와 수염 끝으로 보내는 가스의 양을 조절해서 방향 전환을 하거나 위아래로 이동하지. 고로…….”
나는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가스가 새로 주입되는 부레를 노려서 그 부분만 터트려 준다면 놈의 스피드를 현저히 떨어트리는 것은 물론 방향도 제멋대로 틀어 버릴 수 있는 것이지.”
“과연.”
드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의 지시에 따라 또다시 쇠뇌를 들었다.
“이번에는 3시 방향의 촉수와 9시 방향의 촉수.”
“다음은 5시 방향 수염하고 7시 방향의 수염인가? 점점 부풀어 오르는 것 같은데.”
“이제 좀 볼 줄 아는군. 맞아. 그리고 그 다음은 11시 방향의 촉수랑 1시 방향 촉수야.”
내가 계속 오더를 내리자 드레이크는 슬슬 감을 잡는 듯하다.
펑! 퍼펑! 빠방!
풍선이 연신 터지며 가스가 퍼진다.
중간부터는 윤솔의 제안에 따라 화살에 불을 붙여 쏘기 시작하면서 악몽아귀는 점점 더 수세에 몰렸다.
[그-아아아아악!]
악몽아귀는 눈에 띄게 느려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고도가 상당히 낮아지기도 했다.
부레옥잠의 기낭(氣囊)과 같은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방향을 트는 핸들 역할도 했던 부레들이 거의 다 터져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부레 안에 들어있던 가스에 불까지 붙으면서 살점도 익어 간다.
주변 대기가 뜨거워져서 난기류가 발생해 방향을 잡는 것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모양이다.
이내.
벌러덩-
악몽아귀는 거대한 몸뚱이를 가누지 못하고 뒤집어졌다.
약해진 물고기가 물 위로 배를 까 뒤집는 것처럼, 악몽아귀 역시 구름 위로 배를 내밀고 발버둥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촉수나 수염 끝에 붙은 불은 계속 타오르고 멀쩡한 부레들도 터지거나 구멍이 났다.
가스가 계속해서 빠지면서 몸도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대로 잡아 버릴까?”
드레이크는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젓는다.
“우리는 부레 몇 개를 터트렸을 뿐이지 본체에는 거의 타격을 못 줬어. 그리고 저 자식, 의외로 HP가 높아서 화살로 잡는 건 무리야.”
“…그렇다면?”
“그냥 쫓아오지 못하게 하는 걸로 만족해야지 뭐.”
나는 입맛을 다셨다.
원래라면 무조건 확실하게 잡고 갔겠지만 운석이 악몽아귀로부터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기에 그것은 무리다.
깎단으로 도트 데미지를 걸어 두긴 했지만 원체 자연 회복력이 좋은 놈이기에 죽을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공략이 많이 밝혀진 몬스터도 아니었고.
“뭔가 아쉽다. 저렇게 큰 괴물을 기껏 무저항 상태로 만들었는데….”
윤솔은 내 팔을 잡은 채 말했다.
하지만 빨리 포기하는 것도 용기고 결단인 법이다. 레이드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드레이크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잡지 못할 가능성이 큰 몬스터에게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지.”
그렇게 해서, 우리는 전투불능 상태에 빠진 악몽아귀를 눈앞에서 놓아 보내게 되었다.
꽤나 아까운 일이다.
‘뭐 깎단에 맞은 이상 언젠가 죽기는 하겠지?’
나는 적금을 들어 놓는 심경으로 저 멀리 작아지는 악몽아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우리가 악몽아귀 레이드를 포기하는 순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콰콰쾅…!
하늘 위 먹구름 속에서 뿜어져 나온 굵은 벼락 한 줄기가 배를 까뒤집고 버둥거리는 악몽아귀의 배 정중앙에 떨어진 것이다.
뿌드드득!
벼락 줄기는 악몽아귀의 배를 꿰뚫는 것도 모자라 아예 머리와 꼬리를 제외한 몸뚱이 전체를 폭파시켜 버렸다.
[그에에에엑!]
머리만 남은 악몽아귀가 비명을 질러댔지만 그뿐이었다.
흩날리는 살점과 뼛조각, 내장 파편들은 이내 까맣게 익어 버렸다.
“…세상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윤솔과 드레이크는 너무 놀라 목소리도 못 낸다.
약간의 경험치를 얻기는 했지만 호칭도 특전도 아이템도 무엇 하나 얻지 못했다.
부레 몇 개를 망가트린 것으로는 기여도가 너무 낮았던 모양이다.
하지만…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를 그토록 고생하게 했던 악몽아귀를 한 방에 꿰뚫어 죽인 번개.
그것은 마치 거대한 작살처럼 생긴 것이었다.
번쩍! 꽈콰쾅!
무시무시한 번개가 적란운 속의 암흑천지를 일순간 백빛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우리는 보고 말았다.
빛무리 너머로 드러나는 것.
그 거대했던 악몽아귀를 한낱 송사리로 보이게 할 정도로 거대한 무엇인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