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한 배를 가르고 나온 사이 (3)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혐오하는 게 ‘아 쉬발 꿈’ 엔딩이다.
언제나 치열하게, 피부에 와 닿고 있는 현실을 살고 있는 나와는 거리가 먼 엔딩.
그리고 나를 지켜봐 주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그런 일 따위는 절대로 없게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여기까지 와서 이딴 불쾌한 몬스터에게 당해 버릴 수는 없다.
나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내 옆에는 윤솔과 드레이크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
나는 윤솔과 드레이크를 보며 생각했다.
악몽아귀는 플레이어의 기억을 뒤져 가장 어두운 기억을 끄집어내 그것을 인스턴트 던전으로 만들어 구현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악몽 던전에는 그 사람의 기억 속 가장 기분 나쁜 장소와 가장 기분 나쁜 인간들이 몬스터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동료.
어두운 기억 속에서 무엇이 꿈인지 현실인지도 모르고 방황할 때 바른 길로 이끌어줄 수 있는 친구의 존재이다.
나는 드레이크와 윤솔 덕분에 어두운 기억 속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그들의 기억 속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 * *
나는 윤솔이 혼자 진입해 있는 악몽 던전으로 진입했다.
쿠르르륵…
던전에 진입하자마자 불길한 소리가 들려온다.
“…이건?”
나는 윤솔의 기억 속에 들어오자마자 조금 놀라야만 했다.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땅.
모든 것이 다 불타 재만 남은 평지다.
무한하게 펼쳐진 검은 재들은 그 끝을 알 수도 없었다.
“…엄청 살벌한 기억이네.”
아마 이 필드는 윤솔의 기억이 다소 왜곡되고 과장되어 구현된 모습일 것이다.
내 머릿속에 존재하던 일진과 사채업자들의 덩치가 엄청나게 거대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 곳 역시도 그럴 가능성이 컸다.
풀썩… 풀썩…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시커먼 잿가루가 둥둥 떠오른다.
얼마간 걷자, 이내 새로운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시커먼 대지 위에 등대처럼 생긴 탑이 보인다.
쿠르르르르륵… 지글지글지글…
탑은 현재 활활 불타고 있었다.
검은 대지 위에 덩그러니 솟은 탑.
나는 서둘러 불타고 있는 탑으로 향했다.
“솔아!”
지진의 힘으로 문을 한 번에 부숴 버린 뒤 안으로 들어가자.
“…욱!”
지독하게 뜨거운 불길이 나를 덮쳐 왔다.
화르륵!
나는 숨을 참고 씨어데블의 점액을 흩뿌렸다.
불길은 내 피부에 닿아 지글거리는 소리를 낸다.
그때.
나는 특이한 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안 뜨겁네?”
그렇다.
탑을 집어삼키고 있는 화마(火魔)는 전혀 뜨겁지 않았다.
뜨거울 것처럼 보여서 꺼려지지만 막상 피부에 닿으면 별다른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꿈속이라서 그런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치이이이익…!
곳곳에서 자욱한 매연이 뿜어져 나온다.
점액으로도 연기는 막을 수가 없다. 미간이 불에 닿은 오징어처럼 절로 찌푸려졌다.
탑 밖에서 볼 때는 몰랐지만 막상 안에 들어와 보니 알겠다.
스티로폼, 합판, 슬레이트, 컨테이너.
탑은 화재에 아주 약한 물질들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거…불은 막아도 유독가스는 못 막겠는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촤악-
나는 불길을 가르고 탑의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벽과 바닥, 천장은 엄청난 속도로 쪼그라들고 있었다.
탑은 흐물거리면서도 초고온으로 불타며 검은 매연을 내뿜는다.
그때.
“……!”
나는 계단 중간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솔아! 솔아아!]
위를 바라보며 애타게 절규하는 20대의 젊은 여성.
윤솔과 거의 똑같은 얼굴이었기에 잠시 햇갈릴 뻔 했지만, 윤솔을 소리쳐 부르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윤솔이 아니었다.
“어머님!”
그녀는 윤솔의 어머니였다.
나는 어머니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어머니는 밑으로 내려가 계세요!”
[제, 제 딸이 아직 위에 있어요! 누구신진 모르겠지만 제발 같이…!]
어머니는 절대로 내려갈 의사가 없어 보인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계속해서 계단 위로 뛰어가려 할 뿐.
별 수 없었다.
“끙!”
나는 어머니를 번쩍 안아들고는 잽싸게 탑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어머니가 다시 탑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입구를 무너트려 막아 버렸다.
“어차피 나올 때는 아무데나 부수고 나오면 되니까.”
나는 황급히 뒤돌아 다시 달렸다.
자욱한 매연과 불길을 뚫고 달팽이 무늬처럼 빙글빙글 꼬인 계단을 달려 올라간다.
이윽고.
나는 검은 가스가 가득 차 있는 꼭대기 층에 당도했다.
“…으아아앙!”
그곳에는 윤솔이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그녀는 20대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하는 행동은 마치 일곱 살 난 아이 같았다.
“솔아! 나가자!”
나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윤솔은 자리에 주저앉은 채 나오려 하지 않았다.
“이것도 가지고 나갈 거야!”
그녀가 껴안고 있는 것은 커다란 피아노였다.
나는 기가 막혀 소리쳤다.
“아니 지금 불이 났는데 무슨 피아노야!”
“싫어! 이거 두고는 안 나가! 아빠가 사 준 거란 말야!”
윤솔은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운다.
마치 어린아이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나는 한숨을 쉬었다.
‘피아노를 부숴서라도 끌고 나가야 하나?’
내가 극단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탁-
윤솔의 어깨를 짚는 손이 있었다.
“……응?”
윤솔이 고개를 돌리자 그 뒤에 윤솔이 보인다.
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윤솔. 그녀가 20대의 윤솔을 마주보고 있었다.
[피아노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
일곱 살 윤솔이 재차 말했다.
[바다로 나간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 준 선물이라서 소중히 여기는 거지?]
“…….”
[하지만 이러면 남아 있는 엄마도 힘들어져. 너도 알고 있잖아. 울 엄마 너 구하려다가 연기를 많이 마셨어. 평생 합병증 때문에 아프실지도 몰라.]
누가 어른이고 누가 아이인지 모르겠다.
20대 윤솔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녀의 손이 피아노에서 떨어지는 즉시, 나는 그녀를 들쳐 업고 벽을 부쉈다.
콰쾅!
벽에 뚫린 커다란 구멍. 나는 뛰어내리기 직전 뒤를 돌아보았다.
화르륵! 뿌직! 뿌지지직! 쾅!
요란한 폭음.
치솟는 불길과 휘몰아치는 연기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보이지 않더라도 들려오는 건 있다.
♩♫♩♩♬♪♩♭♩-
저 너머에서 누군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윤솔인가?’
내가 눈을 가늘게 떴을 때.
출렁-
불길과 연기가 한번 크게 출렁거렸다.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서 실루엣이 희미하게 드러나 보인다.
“……!”
나는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큰 키의 남자 하나가 일곱 살 난 윤솔과 함께 피아노 의자에 앉아 연주를 하고 있다.
드레이크인가 싶었지만 그보다 키가 더 컸다.
그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나와 그의 시선이 마주친 것 같다고.
그리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
피아노 연주 소리가 잠시 멎었다.
[……잘 부탁하네.]
귀에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소 탁하고 낮은, 내 또래의 젊은 남자 목소리가.
“…….”
나는 불길과 매연 너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리고 윤솔을 등에 업은 채 탑 아래로 뛰어내렸다.
♩♫♩♩♬♪♩♭♩-
등 뒤로는 피아노 연주 소리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치는 즐거운 박자로.
* * *
“……헉!?”
윤솔이 눈을 떴다.
“정신이 좀 드냐?”
나는 빙긋 웃으며 윤솔을 일으켜 주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울먹거렸다.
“…아버지를 만났어.”
아, 불길 속에서 만났던 그 의문의 남자가 윤솔의 아버님이었던 건가.
짐작은 했지만 막상 들으니 재차 놀랍다.
윤솔은 계속 울먹였다.
“너무 어릴 때 헤어져서 얼굴은 기억 안 나지만…분명 아버지였어.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원양어선을 타셨는데…결국 못 돌아오셨거든.”
그녀의 말을 들으니 새삼 이 ‘악몽아귀’라는 몬스터가 더 황당하고 짜증나게 느껴진다.
사람 기억을 비틀어서 가장 잊고 싶은 기억을 추려내어 던전을 만든다니.
대체 어떤 미친 개발자 놈이 이딴 생각을 한 것일까?
이쯤 되면 진짜 이게 게임인지 현실인지 소름이 돋을 정도다.
‘괜히 민원이 들어오는 게 아니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악몽아귀는 훗날 밸런스 패치 때 삭제될 몬스터다.
나는 윤솔과 잠시 던전 클리어 소감을 나누었다.
윤솔은 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것과 홀몸으로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에 대한 감사함을 드러냈다.
더불어 어머니가 화재 당시 매연을 많이 마신 것 때문에 늘 아프셨는데 이번에 내 덕분에 수술을 받을 수 있어서 고맙다는 것 또한.
나 역시도 사채업자들에게 추궁을 당할 때 윤솔이 도와준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윤솔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어진아. 너 사채 썼었어?”
“…응? 아니. 안 썼는데?”
‘이번 생에서는’ 이라는 말은 생략하기로 했다.
윤솔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악몽아귀의 악몽은 직접 겪은 경험이 구현되는 거라고 하지 않았어? 근데 왜 사채업자들이….”
“아아, 그거? 그냥 뭐. 어렸을 때 삼촌네 집에 얹혀살았는데 그때 봤던 기억이 무의식 중에 남았나봐. 내가 직접 겪은 건 아니고…….”
“아아, 무의식! 맞아. 그럴 수 있겠다.”
윤솔은 자기도 힘든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등을 토닥거리며 위로했다.
문득,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 삼촌이라는 분 참 안타깝더라.”
“…뭐, 한심한 인생이지.”
“아냐. 그렇다기보다는…그냥 좋은 분 같았어. 너무 순수하고 착해서 세상에 상처 입으신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나는 윤솔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내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말을 계속했다.
“그냥 보고 있으니 짠해서 보듬어 주고 싶던데. 내가 그런 사람에게 좀 약해서….”
“……얘 큰일 날 애네. 야, 요즘은 그러면 호구 소리 들어.”
“헤헤 맞아. 그래도 나는 착한 남자가 좋더라. 조금 바보 같아도 내가 야무지게 챙겨주면서 데리고 살면 되니까….”
전혀 의외의 평가였다.
‘이것이 옛날 옛적 바보온달을 데리고 살았던 평강공주의 마인드인가?’
내 회귀 전의 모습이 여자에게 좋게(?) 평가된 적은 처음이었기에 기분이 굉장히 미묘했다.
하지만, 그런 미묘한 기분을 곱씹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아직 악몽 던전은 하나가 더 남았다.
드레이크!
우리 앞에 쓰러져 있는 그의 악몽이 아직 최종보스처럼 남아 버티고 있지 않은가!
‘…드레이크가 퇴역 군인 출신이랬지?’
예전에 그와 함께 해저의 어둠 속을 기약 없이 걸었던 적이 있다.
우리는 그때 서로의 신변에 대해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었고 그래서 나는 그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바다.
산전수전 다 겪은 특수부대 퇴역군인에게 남아 있는 가장 끔찍한 기억.
우리는 지금부터 그것이 만들어 낸 인스턴트 던전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