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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237화 (237/1,000)
  • 238화 한 배를 가르고 나온 사이 (1)

    나와 윤솔은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왔다.

    콰쾅! 우르릉…

    바닥과 벽 곳곳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올 때와는 달리 빠른 판단력으로 길을 찾아 달려야 했다.

    “어진아! 이쪽!”

    길눈이 밝은 윤솔이 앞서 달린다.

    그녀가 바닥이나 벽에 그려 둔 백묵 자국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돌아올 때 난항을 겪었을 것이다.

    몇 분간을 전속력으로 달리자 상부 갑판으로 향하는 나무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막 계단을 딛고 위로 올라가려는 순간.

    …우지끈!

    썩은 널빤지가 갑자기 무너졌다.

    “꺄악!?”

    윤솔의 몸이 갑자기 쑥 꺼졌다.

    그녀는 엉덩이로 내 얼굴을 깔아뭉개고 말았다.

    “아아앗! 어진아! 미안! 계단이 갑자기……!”

    “…괜찮아. 얼른 올라가자.”

    나는 윤솔을 옆구리에 끼다시피 하며 무너진 계단을 올랐다.

    쿠쿵! 우지지직…

    비단 계단뿐만이 아니었다.

    갑판 위로 올라오니 난간과 망루, 갑판 전체가 미친 듯이 삐걱거리고 있는 게 보인다.

    배 전체가 바스라지고 있었다!

    쏴아아아…

    배는 그새 엄청난 폭풍에 휘말려든 상태였다.

    폭우와 우박, 태풍이 불어 배를 끝에서부터 천천히 으깨고 있다.

    점차 부스러기로 변해 사라져 가는 배.

    “돌아가자.”

    나는 윤솔을 등에 업고 밧줄다리를 타 우리가 원래 있던 운석으로 되돌아갔다.

    턱!

    먼저 운석으로 건너간 드레이크가 우리가 매달린 밧줄을 힘차게 잡아당겼다.

    나와 윤솔은 이내 운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콰쾅! 우지지지지지직! 뚜둑! 쿵! 푸스스스스…

    유령선.

    자그마치 500년 동안이나 하늘을 항해했던 배.

    해적 검은 수염의 배이자 거인 왕이 보낸 편지를 품고 있었던 이 유령선은 이내 몇 줌 부스러기로 변해 허공에 나부끼게 되었다.

    우리가 타고 있는 운석에 부딪치기 불과 몇 초 전이었다.

    “우와, 아찔하다.”

    윤솔은 저 뒤로 멀어지는 유령선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거대한 유령선이 검은 부스러기로 변해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지기까지의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엄청난 몰입감.

    과연 500년의 세월과 관록이 느껴지는 최후다.

    비록 그것이 한낱 설정에 불과하다고는 해도 말이다.

    “나 이 게임이 좋아질 것 같아.”

    윤솔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방금 전까지 했던 방 탈출과 석상 고르기 두뇌 게임이 마음에 쏙 들었던 모양.

    나는 추리에 관련된 전략은 질색이지만, 뭐 아무튼 윤솔이 흥미를 느껴서 다행이다.

    이 게임은 단순히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 말고도 여러 가지 콘텐츠들을 즐길 수 있다.

    스포츠를 할 수도 있고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공예를 할 수도 있고 약초 수집, 탐험 등 역시도 좋은 콘텐츠이다.

    ‘가만있자, 나중에 뷰티 쪽 아이템도 유행하게 될 텐데…….’

    나는 생각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는 캐릭터 커스터마이징 열풍이 불어올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게임 속 얼굴을 성형하거나 염색하기 위해 여러 가지 아이템으로 튜닝을 한다.

    뷰티 방송의 전문가 윤솔이라면 혹시 그런 흐름에도 적응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진! 폭풍이 점점 더 심해진다!”

    앞에서 전방을 살피고 있던 드레이크가 외쳤다.

    그의 말대로. 주변 기후는 점점 더 격렬하게 뒤틀리고 있었다.

    거대한 적란운의 안으로 들어온 뒤부터 폭우는 당연한 것이 되었다.

    때로는 볼링공에 필적할 정도로 크고 무거운 우박들이 떨어진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번개였다.

    번쩍! 콰콰콰쾅!

    그것들은 마치 괴수의 이빨처럼 몇 개씩 연달아 떨어져 내린다.

    때로는 위에서 떨어지고 때로는 아래에서 올라오기도 한다.

    한번 저 이빨 세례에 물리기라도 하면 답이 없을 것이다.

    딱! 따딱! 따닥!

    운석 전면부에서는 연신 얼음 조각들이 튀기고 있었다. 우박들이 와서 부딪쳐 깨지는 바람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렇게 깨진 얼음조각들은 운석 표면을 타고 빠르게 흘러가는 빗물에 실려 엄청난 속도로 이동한다.

    “구덩이로 들어와!”

    나는 드레이크와 윤솔을 불러 운석 중앙에 깊게 파인 구덩이로 들어왔다.

    이곳에는 바람 때문에 물도 얼음조각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눈 먼 번개가 들어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

    “…추, 춥다.”

    윤솔은 젖은 몸으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얼음조각들이 실린 빗물이 계속 쏟아져 들어오는데다가 엄청난 풍속의 바람까지 불고 있으니 추운 것이 당연하다.

    체감 온도는 예전 북대륙의 설산을 넘을 때보다 더욱 더 낮았다.

    나는 바들바들 떠는 윤솔을 향해 망토자락을 치켜들었다.

    “이리로 들어오도록 해.”

    내 망토는 샌드웜의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다.

    사막의 뜨거운 열기가 언제나 패시브로 감돌고 있었기에 이런 환경에 안성맞춤이다.

    “…….”

    처음에는 일일이 어색해하던 윤솔도 이내 게임 플레이에 적응한 듯싶다.

    그녀는 빨갛게 물든 얼굴로 총총총 다가와 내 망토자락 안으로 들어왔다.

    어린아이의 체형이었기에 공간도 그리 많이 차지하지 않았다.

    “…따듯하다.”

    윤솔은 내 망토자락에 돌돌 휘감겨 눈을 감는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기운.

    그녀는 가만히 망토 자락의 냄새를 맡아 본다.

    ……하지만.

    포근한 이불 냄새라도 날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오웩!”

    윤솔은 저도 모르게 헛구역질을 했다.

    “응? 냄새는 맡지 마. 샌드웜 가죽을 말린 거라 악취가 좀 있을걸?”

    “뭐, 뭐랄까…생선 말리는 냄새보다 조금 더 심한 느낌이네. 후각까지 이렇게 리얼하게 구현해 놨을 줄은 몰랐어.”

    윤솔은 내 망토를 보며 당황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분명 몸을 감쌌을 때 느껴지는 포근한 느낌만은 진짜다.

    굉장히 미묘한 기분.

    바로 그때.

    콰쾅!

    거대한 번개 한 줄기가 운석의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지금까지 떨어졌던 번개들과는 스케일이 다르다.

    훨씬 더 크고 굵은 번개였다.

    마치 지금까지는 번개 밑부분의 작은 끝자락들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번개의 상단 본체라는 느낌.

    동시에 하늘 전체에 메아리치는 듯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띠링!

    <히든 던전 ‘뇌옥(雷獄)’에 입장 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

    .

    “……!?”

    나는 고개를 들었다.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불길한 감각.

    ‘그러고 보니 아직 밸런스 패치 전이지!? 그렇다는 건 설마….’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눈앞에 있는 저 거대한 적란운 무리는 하나의 던전이다.

    구름 속에 있는 던전 ‘뇌옥’

    구름의 벽과 번개의 창살로 만들어진 감옥!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이 던전이 발견되었을 때 세상은 한번 시끄러워진다.

    밸런스 붕괴.

    이 던전에 들어갔던 랭커들이 전부 극심한 트라우마를 호소했던 것이다.

    결국 사람들이 전혀 찾지 않게 되고 밸런스가 너무 흉악하다는 평가를 받아 맵 자체가 사라졌던 비운의 던전.

    하지만 지금은 밸런스 패치가 적용되기 전이다.

    “……이런.”

    나는 전방을 유심히 살폈다.

    미친 듯이 떨어지는 우박과 번개, 그리고 격렬하게 뒤틀리는 대기.

    운석은 구름 속 태풍의 영역에 완전히 휘말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결국 보고 말았다.

    던전 ‘뇌옥’의 밸런스를 붕괴시킨 주범, 수많은 랭커들이 게임을 접게 만들었던 악몽 같은 몬스터를!

    “저, 저게 뭐냐!?”

    “세상에!”

    드레이크와 윤솔 역시도 내가 본 것을 보았다.

    우리가 타고 있는 운석의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

    그것은 한 마리의 커다란 물고기였다.

    가로로 쫙 찢어진 입을 타원형으로 벌리고 있는 납작한 형태의 물고기.

    마치 아귀처럼 생겼지만 머리와 턱에 돋아난 수많은 촉수 탓에 더욱 더 징그러워 보였다.

    촉수 끝에 붙어 있는 둥그런 혹에는 공기가 차 있는지 위로 둥둥 떠 있다.

    놈은 촉수 끝의 풍선으로 둥둥 뜬 상태로 거대한 지느러미들을 휘저어 구름 속을 유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악몽아귀> -등급: A+ / 특성: 물, 비행, 과식, 자체매력

    -서식지: 뇌옥(雷獄)

    -크기: ?m.

    -언젠가 한 어린아이가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엄마! 나 하늘에서 커다란 물고기가 구름을 삼키는 걸 봤어!’

    엄마는 아이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이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 이야기를 말했지만 믿어 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훗날 아이는 청년으로 성장하여 하늘에 사는 큰 물고기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열기구를 타고 거대한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그 후 아무도 그를 본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악몽아귀.

    아귀계열 몬스터의 정점(頂點)!

    구름 속의 낮은 압력 속에서도 살 수 있게끔 가볍게 진화한 몬스터.

    크기를 미처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육체를 지녔지만 그 넓은 체적은 기실 깃털보다도 가볍다.

    놈은 구름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며 이쪽으로 헤엄쳐 오고 있었다.

    우리가 타고 있는 운석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해 보인다.

    “망했다! 저놈이 다가오지 못하게 해야 해!”

    나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내가 이렇게까지 당황하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윤솔과 드레이크도 바짝 긴장했다.

    파팡!

    드레이크가 아귀를 향해 화살을 날려 보냈다.

    하지만 아귀의 크기가 너무 컸기에 화살 한두 방 맞는 것으로는 택도 없다.

    운석을 통째로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자연재해급 허공마수(虛空魔獸).

    접근 속도가 너무 빨라 미처 손을 쓸 수도 없었다.

    “안 돼! STAY! STAYYYYY!”

    나는 절규하듯 소리질렀다.

    하지만 놈의 등장을 미리 예견하지 못한 것은 분명한 실책이었고 그 대가는 치러야만 했다.

    쩌억…!

    나와 윤솔, 드레이크는 결국 운석을 덮친 거대한 아귀 입속으로 삼켜져 버렸다.

    …밤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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