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234화 (234/1,000)

235화 하늘에 갇힌 자 (3)

<벨페골력 3522년 4월 4일>

누군가가 내 일기를 훔쳐보고 있다.

이 글씨만은 갈색으로 변색되지 않았다.

시뻘건 핏빛.

당장이라도 주르륵 흘러내릴 듯한 글씨.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적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귓가에 으스스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띠링!

<히든 퀘스트를 발견하셨습니다>

<히든 퀘스트 ‘500년 전에 부친 편지’>

<히든 퀘스트 발생 조건: ‘썩어버린 일기장’ 열람>

<히든 퀘스트 완료 조건: 제한 시간 내에 몬스터 전원 처치>

<※완료 시 유령선의 ‘파괴불가’ 상태가 해제됩니다>

동시에 나와 드레이크의 앞에 반투명한 숫자들이 떠올랐다.

<제한시간: 01:00>

1시간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이다.

쾅!

선장실의 썩어빠진 문을 걷어차 부수자 갑판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우-우우우우…

삭아 문드러진 널빤지들이 들리며 그 밑에서 무언가들이 기어 나온다.

뼈 위에 가죽만 덮여 있는 상태, 건어포처럼 꾸덕꾸덕 말라붙은 몸뚱이.

푹 파인 두 눈에는 악취 나는 어둠만이 가득 고였다.

흔해빠진 미이라형(形) 언데드다.

<사략 미이라> -등급: B / 특성: 맹독, 어둠, 언데드, 하수인

-서식지: 비행로(飛行路)

-크기: 2m.

-“내 부하의 비참한 말로를 보아라. 문드러진 피부. 입 밖으로 풍기는 내장 썩은 냄새. 그야말로 산송장이로다!”

-검은 수염 에드워드-

미이라(مومياء).

좀비와는 다르지만 이 역시 언데드 계열 몬스터이다.

같은 레벨의 좀비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강력하며 인공지능도 높다.

드레이크는 갑판 위로 드글드글 기어오르는 미이라 떼를 보며 턱을 쓸었다.

“흐음. 몬스터 웨이브인가? 오랜만이군.”

몬스터들이 파도를 이루어 몰려오는 것을 몬스터 웨이브라고 한다.

보통 몬스터 웨이브를 상대하는 퀘스트는 제한 시간이 걸려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가 딱 그것이다.

나 역시도 몸을 풀며 드레이크의 옆에 섰다.

“간만에 이렇게 노멀한 퀘스트를 받네.”

제한된 시간 안에 몬스터를 물리치는 것.

이 얼마나 전형적이고 뻔하면서도 재미난 요소인가!

유령선이 운석과 부딪쳐 교통사고를 내기 전에 여기 있는 미이라들을 모두 처리해야 한다.

“그동안 설정들이 하도 많이 나열돼서 머리 아팠는데, 간만에 시원하게 싸워 보겠군.”

“맞아. 이렇게 단순해야 사실 플레이할 맛이 나지.”

나와 드레이크는 서로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파앗-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었다.

우리 둘은 곧장 갑판으로 달려갔다.

“자, 몬스터 웨이브는 사실 내 전문이거든.”

나는 오래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내가 회귀 후 맨 처음으로 갔던 던전은 중앙대륙에 있는 ‘흔들귀의 미궁’이다.

그곳은 오니들의 서식지인데 나는 그 던전을 돌며 수많은 오니들을 한꺼번에 상대했었다.

지금 여기서 미이라들을 상대하는 방법 역시도 그와 같았다.

촤악-

나는 바닥에 슬라이딩을 하며 깎단을 휘둘러 미이라들의 몸에 생채기를 냈다.

바닥은 온통 썩은 나무라서 뾰족한 나무 부스러기가 많았지만 내 몸은 씨어데블의 점액으로 뒤덮여 있어 상관없다.

[게에에에엑!]

미이라들은 입을 쩍 벌리고 지독한 맹독 내장을 토해 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독쯤은 가볍게 무시했다.

내 몸에 심어져 있는 바실리스크의 심장은 그보다 더욱 더 지독한 혈액을 실시간으로 펌핑한다.

감히 미이라의 독 따위가 비벼 볼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씀!

“그래도 역겹긴 하네.”

독 데미지야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라지만 악취만큼은 참기가 힘들었다.

또한 피부에 와 닿는 뜨끈한 토사물의 느낌도 구렸다.

“네가 오늘 수고해라.”

나는 손가락에 낀 반지를 비벼 소환수를 끄집어냈다.

[쉬이이이익!]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쌍뿔칠흑이 노오란 눈을 빛내며 미이라들을 노려본다.

철퍽! 철퍽! 철퍼덕!

쌍뿔칠흑은 거대한 몸을 움직여 미이라들의 토사물을 전부 받아쳤다.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드레이크가 쌍뿔칠흑의 몸을 타고 올라간다.

“머리 좀 빌리자.”

드레이크는 쌍뿔칠흑의 머리 위에 서서 미이라들을 향해 속사를 날렸다.

퍽! 퍼억!

달려들던 미이라들의 머리에는 어김없이 강전이 박힌다.

드레이크의 사각으로 접근하는 미이라들은 쌍뿔칠흑의 꼬리 채찍에 맞아 전신이 으스러져야 했다.

“으음, 수월하긴 한데. 수가 좀 많네.”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원래 몬스터 웨이브를 상대할 때에는 지진 같은 자연재해 특성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동왕 메타로 전환해야 했지만…….

-띠링!

<이 배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파괴할 수 없습니다>

지진을 일으키려고 하면 특성 발현이 취소되어 버리니 마동왕 메타를 쓰는 것은 불가능했다.

미이라를 공격하기 위해 쓴 지진이 배를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하나 잡아야 한다는 소리인데…….”

나는 귀찮은 표정으로 눈앞의 미이라 하나를 찔러 죽였다.

데미지 계산을 해 보면 아슬아슬하게 1시간을 조금 넘길 것 같다.

이대로 가면 퀘스트 클리어를 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더 빨리 움직여야…어!?”

바로 그때.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끄응!”

난간에 묶인 밧줄을 타고 넘어오는 실루엣이 보인다.

윤솔. 그녀가 이쪽으로 건너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어!? 솔아! 여기로 오면 안 돼!”

나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가뜩이나 퀘스트 제한시간이 간당간당한 마당이다.

레벨 1인 윤솔을 보호해 주면서까지 싸울 여유는 전혀 없었다.

“아앗!?”

드레이크도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윤솔의 주변에는 미이라들이 벌떼같이 몰려든 상태.

그녀를 구하기엔 이미 늦었다.

“안 돼!”

나는 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외쳤다.

만약 여기서 윤솔이 죽는다면 나의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설령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는 지켜야 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갑판 위로 뛰었다.

하지만.

[킥킥킥킥-]

[게에엑, 그으윽!]

[갸아아아악!]

수많은 미이라들이 이미 나와 그녀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크윽!”

나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수많은 미이라들에 의해 끔찍한 죽음을 맞이할 윤솔의 모습을 예상하며.

…한데?

상황은 예상과는 전혀 딴판으로 진행된다.

윤솔은 눈을 감고는 천사 소녀의 기억을 더듬는 눈치다.

“…으음, 어디 보자,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윤솔은 등에 짊어지고 있던 하프를 꺼내 들었다.

-링딩동♪

그녀가 하프를 켜자.

[그웨에에엑!]

[갸아아아악!]

[히이이이익!]

달려들던 미이라들이 일제히 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렸다.

파아아앗!

윤솔의 몸 주변으로는 어느새 환한 반구형의 배리어가 펼쳐져 있었다.

그것에 닿은 미이라들은 모두 몸을 바들바들 떨며 얼어붙는다.

“……아!”

그동안 왜 저걸 주목하지 않았을까!?

나는 윤솔이 들고있는 하프의 정체를 그제야 알아보았다.

-<아기천사의 쿠잉(cooing)> 양손무기 / A

멸족(滅族)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결함을 잃지 않았던 한 아기 천사의 유품.

-공격력 +12

-귀속 (특수)

-융합 (특수)

-특성 ‘힐’ 사용 가능 (특수)

-특성 ‘신성불가침’ 사용 가능 (특수)

A등급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는 공격력을 가진 양손무기.

생긴 것마저도 조악해서 나조차 한동안 알아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저것은 분명 힐러 메타 플레이어에게는 더없이 좋은 히든 피스였다.

‘신성불가침’은 꽤나 강력한 물리, 속성 방어막을 치는 것도 모자라 어둠 특성을 가진 몬스터에게 무조건적인 상태이상을 걸어 버리는 사기 특성이다.

100%의 확률로 들어가는 1차 상태이상 ‘마비’

50%의 확률로 들어가는 2차 상태이상 ‘공포’

25%의 확률로 들어가는 3차 상태이상 ‘환각’

12%의 확률로 들어가는 4차 상태이상 ‘실명’

6%의 확률로 들어가는 5차 상태이상 ‘과부하’

3%확률로 들어가는 6차 상태이상 ‘영구저하’

.

.

‘그리고 1% 확률로 들어가는 7차 상태이상까지….’

나는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윤솔에게 다가갔다.

왜 저것을 진작 알아보지 못했을까 자책하면서.

한편 윤솔은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나를 보며 횡설수설했다.

“아앗! 어진아, 내가 방해했다면 미안해. 나는 그냥 네가 걱정돼서….”

“아냐 아냐, 방해는 무슨. 엄청난 도움이 됐어. 하프를 켤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그게…이 소녀의 기억 속에 하프를 연주해서 나쁜 괴물들을 쫓아 보냈던 동영상이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나는 고개를 돌려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운석과 배를 잇는 밧줄이 태풍에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윤솔은 방금 이런 곳을 건너온 것이다. 바로 나를 위해.

그리고 그녀는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엄청난 전력이 되어 주고 있었다.

-링딩동♪ 링딩동♫ 링디리디리링딩동♬

하프를 켤 때마다 영롱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갸아아아아아악!]

미이라들은 흥이 다 깨져 버린 듯 발버둥 쳤다.

윤솔을 감싸고 있는 황금색 배리어에 닿은 미이라들은 전신이 빳빳하게 굳는다.

눈에 띄게 느려진 미이라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1차 상태이상에 걸린 미이라들은 곧이어 2차, 3차, 4차, 5차, 6차 상태이상에 줄줄이 걸려들었다.

단순히 마비만 걸리고 끝나면 다행이지만, 대부분의 미이라들이 그 이상 가는 상태이상에 중첩되어 노출되고 있었다.

레이드 난이도가 순식간에 몇 배로 쉬워졌다.

나와 드레이크는 바닥에 쓰러진 미이라들을 뒤로하고 아직 멀쩡한 미이라들을 먼저 잡았다.

어차피 바닥에서 발버둥치는 놈들은 너무나도 쉽게 죽일 수 있다.

“뭐야!? 이거 너무 쉬운데! 하프 한번 켠 것으로 이렇게 난이도가 낮아지다니!”

드레이크는 껄껄 웃으며 활시위를 당긴다.

윤솔도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에 흐뭇한 표정으로 하프를 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직 나만은 알고 있었다.

여기 있는 이 미이라들이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후두둑- 후둑-

배가 두텁게 쌓인 먹구름 장벽을 넘자, 이내 갑판에 거센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

그동안 흐느적거리며 움직이던 미이라들의 움직임이 갑자기 뚝 멎는다.

“…으음?”

“앗? 뭐죠?”

드레이크와 윤솔도 사냥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쏴아아아아아…

하나둘씩 떨어지던 빗방울은 이내 엄청난 폭우가 되었다.

그것은 유령선 전체를 사납게 두들기고 있다.

꿀꺽… 꿀꺽… 꿀꺽…

쏟아지는 빗방울이 미이라들의 전신을 차갑게 적신다.

한계까지 말라 비틀어져있던 미이라들의 살이 탱탱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뿌드득- 뿌득- 꾸드득-

동시에.

우리들의 귓가에 알림음이 들려왔다.

-띠링!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바람에 바짝 말라 있던 피부가 물을 머금습니다>

<미이라들이 생전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

.

그동안 싸워왔던 미이라들의 외형이 변한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변태.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가각… 가가가각……

갑판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오싹한 소리.

빗속에서 변태하고 있는 미이라들 너머로 무언가 거대한 것이 기어오고 있었다.

“…….”

“…….”

“…….”

우리 모두가 숨죽이고 있는 갑판 위로 음산한 알림음이 재차 흘렀다.

.

.

<미이라들이 몸을 낮춥니다>

<‘목마른 주인’이 몸을 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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