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233화 (233/1,000)
  • 234화 하늘에 갇힌 자 (2)

    다른 세계로 내던져진 것 같은 압도적인 어둠.

    그리고 먹구름 장막 저 너머에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

    콰쾅! 우르릉…

    천둥이 치면 나타났고 천둥이 멎으면 사라진다.

    하지만 그것은 천둥의 유무와 상관없이 그 자리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배.

    거대한 배의 그림자가 운석의 옆에 나란히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바이킹 선?”

    드레이크가 입을 딱 벌린 채 중얼거렸다.

    거의 운석의 크기에 필적할 정도로 큰 배가 구름의 바다 위를 힘차게 항해하고 있다.

    번쩍!

    백금이 녹아내리는 듯한 번개.

    뜨겁고 찬란한 빛의 균열이 검은 폭풍을 쪼갤 때면 배는 해일처럼 밀려드는 구름을 뚫고 거센 숨을 토해 놓았다.

    뚜웅……

    그것은 분명 틀림없는 뱃고동 소리였다.

    “세상에! 하늘에 배가 있다니!”

    윤솔은 연신 탄성을 내질렀다.

    난데없이 나타난 이 의문의 배는 몇 겹으로 쌓인 적란운을 꿰뚫고 있었다.

    후두둑! 후두둑! 따악!

    농구공만 한 우박 덩어리가 운석 머리를 때린다.

    드레이크와 윤솔은 반쯤 무너져 내린 돌벽 뒤에 숨어 배를 구경하고 있었다.

    거대한 바이킹 선.

    지금껏 봤던 모든 배 중에 가장 크다.

    북대륙의 치 카이가 조종하던 ‘악마의 만찬’ 호나 레흐락의 ‘독주의 무덤’ 호, 아틀란둠의 ‘제 8번 전함’보다도 훨씬 더 컸다.

    커다란 삼각돛이 날개처럼 퍼덕거리고 있었지만 거의 다 찢어져 제 구실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용골은 뒤틀렸고 배의 갈빗대들은 거의 다 으스러져 있었다.

    바닥에 숭숭 뚫린 구멍 밑으로는 말라죽은 따개비와 해초들이 바스러지는 것이 보인다.

    뱃머리에는 커다란 해골이 붙어 있었지만 바람과 우박에 대부분 파손되어 있어 원형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유령선(幽靈船)이라는 단어가 이보다 더 적절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드레이크는 운석 옆을 나란히 비행하고 있는 배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아하니 저것도 무슨 특별한 이벤트 같군. 히든 던전인가?”

    지금까지 짬을 헛으로 먹은 것이 아니다.

    드레이크는 눈앞에 있는 비행선(飛行船)이 흔히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게임에 너무 적응해서일까?

    오히려 현실적인 감각은 윤솔보다 떨어지는 것 같았다.

    “어어? 그런데…저거 너무 가깝게 다가오는 거 아닌가요?”

    “…음!? 그, 그러고 보니.”

    윤솔은 점점 다가오는 배를 보며 불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드레이크는 그제야 아차 싶다는 듯 나를 돌아본다.

    “…….”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윤솔의 말이 맞다.

    저 배는 지금 서서히 운석을 향해 접근하는 중이다.

    공교롭게도 저 배와 우리가 탄 운석의 비행 궤도가 상당히 비슷하다.

    “이대로 가다간 충돌하겠군.”

    난감한 일이었다.

    갑자기 어디서 고라니처럼 툭 튀어나왔담? 정말 배라니가 따로 없다.

    ‘저걸 만난 확률은 극히 낮다고 들었는데… 첫 진입이라서 그런가 정말 온갖 기연들이 다 일어나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아직은 판단하기 어렵다. 나는 생각을 정리한 뒤 앞으로 나섰다.

    ‘별 수 없지. 저 배로 건너가서 더 이상 날 수 없게 해 주는 수밖에.’

    아무래도 저 배를 부숴 버리지 않는 한 교통사고를 피할 길이 없을 듯싶다.

    내가 막 입을 열어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려는 순간.

    윤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해, 너무 무섭다. 저기로 건너가서 배를 모조리 부숴 버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지 않을까?”

    “…….”

    무섭다는 애 치고는 제법 사태 파악이 냉철한데?

    보통 게임을 처음 시작한 뉴비는 이런 발상 자체를 못 하지 않나?

    …아무래도 윤솔의 게임 적응력은 상당한 수준인 것 같다.

    *       *       *

    차라라락-

    나는 미리 준비해 놓은 로프와 갈고리를 이용해 도킹을 시도했다.

    드레이크가 운석의 가장 높은 곳으로 가서 화살에 밧줄과 갈고리를 묶어 쐈다.

    파앙-

    밧줄에 묶인 화살이 비행선에게로 다가갔지만 이내 바람에 튕겨 나오고 말았다.

    나는 드레이크의 어깨를 툭 쳤다.

    “줘 봐, 내가 쏠게.”

    “…아니다. 방금 그건 영점을 잡아 본 거였다.”

    드레이크는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화살을 회수했다.

    그리고 곧바로 각도를 조금 틀어 한 번 더 발사를 시도한다.

    펑!

    이번 것은 제대로 날아갔다.

    화살은 바람에 구멍을 내고 날아가 비행선의 난간과 난간 사이에 박혔다.

    태앵!

    소금을 한계까지 먹인 돛조르기 밧줄이 운석과 배의 사이를 단단히 연결했다.

    다각- 다그락!

    드레이크는 밧줄을 몇 번 당겨 갈고리가 잘 물렸음을 확인한 뒤 고개를 돌렸다.

    “자 어때?”

    하지만 이미 나는 그 곳에 없다.

    벌써 밧줄을 잡고 건너기를 시도하고 있었으니까.

    “……끙.”

    나는 몰아치는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조심하며 밧줄을 탔다.

    미친 듯이 요동치는 밧줄에 매달려 천천히 앞으로 기어간다.

    군대에서 배운 유격술이 이럴 때는 조금 도움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이윽고, 나는 배의 난간 사이로 기어들어 올 수 있었다.

    “휴.”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고개를 들자 썩어빠진 널빤지로 이루어진 갑판이 보였다.

    내부는 유령선다웠다.

    그야말로 살풍경한 모습이다.

    너무 넓어서 한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군데군데를 대충 살피는 것만으로도 이 배가 곧 부서지기 일보직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배 곳곳에 낀 따개비와 해초넝쿨들은 아주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물때와 녹이 곳곳에 번져 있었고 끊어지거나 찢어진 밧줄, 돛들이 유령처럼 비명을 지르며 주변을 둥글어 다닌다.

    낡고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괴하기까지 한 것들의 집합. 대체 이 배는 얼마나 긴 시간동안 이 망망공허(茫茫空虛)를 떠돌아다닌 것일까?

    “자, 이제 이 배를 부숴서 떨궈야 하는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배를 살폈다.

    이 배는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곧 먼지로 변해 바스러질 것처럼 생겼지만, 사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띠링!

    <이 배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파괴할 수 없습니다>

    주먹을 들어 배를 부수려고 하면 어김없이 알림음이 뜬다.

    ‘역시, 예전에 랭커들이 했던 말이 맞았어.’

    나는 이미 알고 있는 미래 지식이 있었기에 딱히 당황하지 않았다.

    하지만 뒤따라온 드레이크는 상당히 놀란 듯싶다.

    “뭐야, 파괴불가 오브젝트라고? 이 배 전체가!? 그렇다면 낭패가 아닌가! 부술 수가 없잖아!”

    게다가 파괴불가라면 운석과 부딪쳤을 시 끔찍한 결과가 예상된다.

    나는 미간을 한번 긁었다.

    “…세상에 안 되는 건 없지.”

    배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무력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소리다.

    나는 갑판 위를 성큼성큼 걸어가 안쪽에 있는 선장실로 향했다.

    끼걱-

    썩어 문드러진 문짝을 뜯어내자 선장실 내부가 보인다.

    거대한 흑마의 머리통이 박제되어 있는 아래로 파손된 물건들이 즐비했다.

    변색되다 못해 아예 나무의 무늬가 되어 버린 핏자국들.

    그것들이 어지럽게 여기저기 그어져 있는 바닥 위에는 이 빠진 칼과 바스라진 화약들이 나뒹굴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잡동사니들의 중앙에는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아주 낡고 또 낡은, 심지어 종이도 아닌 양피지로 만들어진 책.

    -<‘검은 수염’의 일기장> / D

    펼쳐서 좋을 것이 없는 기록이다.

    낡은 일기장에서는 검은 오오라가 스멀스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팔락…

    나는 일기장을 집어 들었다.

    첫 페이지.

    갈변한 핏자국 같은 글귀들이 음각되듯 적혀 있었다.

    <벨페골력 3021년 3월 21일>

    약탈한 노예들을 시장에 팔러 나갔다가 재미있는 소식 하나를 들었다.

    저 멀리...(찢어져 있음)...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보물상자가 있다고 한다.

    보물을 만든...(찢어져 있음)...들의 몸집이 거대해서 보물도 거대하다나?

    해적들이 기술해 놓은 듯한 항해일지다.

    나는 다음 페이지를 연이어 넘겨 보았다.

    <벨페골력 3021년 9월 7일>

    저주받은 얼음섬 마트료시...(찢어져 있음)...를 탐험하다가 반년 전 쯤 들었던 소문에 관한 단서를 발견...(찢어져 있음)...

    우리는 빙굴 내부의 깊숙한 곳에서 ...(찢어져 있음)...를 발견했는데 아무리 분석해 봐도 이것은 보물지도처럼...(찢어져 있음)...

    .

    .

    <벨페골력 3022년 1월 1일>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찢어져 있음)... 배를 몰아 지도가 가리키는 곳으로...(찢어져 있음)...

    .

    .

    <벨페골력 3024년 4월 4일>

    천신만고 끝에 ...(찢어져 있음)...에 근접했다.

    이 땅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하나같이 독특한 생김새를 하고 있는데 그 외형은...(찢어져 있음)...

    .

    .

    <벨페골력 3025년 7월 21일>

    나침반이 고장 났다. 반란이 일어나 부선장을 비롯한 37명이...(찢어져 있음)...

    .

    .

    <벨페골력 30...(찢어져 있음)...>

    오전 4시 경, 보물을 발견. 손에 넣는 것에 성공...(찢어져 있음)...하지만 ...(찢어져 있음)...에게 붙잡혀 버렸다.

    이젠 더 이상 도망...(찢어져 있음)...수가 없다

    내일이 고비.

    .

    .

    <벨페골력 30...(찢어져 있음)...>

    ...(찢어져 있음)...은 우리 배를 단단히 붙잡은 채 들어 올렸고 그대로 하늘을 향해 내던져...(찢어져 있음)... 결국 우리는 실패하되 성공한 것이다. 보물은 손에 넣었지만...(찢어져 있음)...라는 끔찍한 저주에 걸려...(찢어져 있음)...게 되었으니까…

    .

    .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드레이크는 일기장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

    “으음. 일단 군데군데 찢어져 있는 것도 그렇고. 배를 붙잡아서 들어 올렸고 하늘로 던졌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나는 드레이크의 말을 듣고는 피식 웃었다.

    “말 그대로야.”

    “……?”

    “말 그대로라고. 배를 집어 들어 던져 버렸다는 거다.”

    내 말을 들은 드레이크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니, 이렇게 커다란 배를 집어 들어서 하늘로 던졌다고?”

    “응.”

    “허…. 설정 한번 괴랄하구먼. 벨페골력 3021년이라면 게임 시간 상으로는 거의 500년 전인데. 그럼 이 배는 무언가에 의해 집어던져진 채 500년 동안이나 날아가고 있다는 건가?”

    나는 드레이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맞아.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커다란 배를 500년 동안이나 날게 만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괴물이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거지.”

    내 말에 드레이크는 입을 다물었다.

    대체 어떤 몬스터이기에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까?

    팔락…

    나는 계속해서 일기장을 넘겼다.

    일기장에는 하늘로 내던져진 뒤 해적들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우박이나 빗물을 받아 식수로 삼고 번갯불에 콩이나 고기를 구워 먹으며 생존했던 해적들.

    하지만 500년이나 되는 시간을 버티기에는 당연히 무리였다.

    그들은 하나하나 비참하게 죽어갔고 또 죽은 뒤에도 보물의 저주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팔락… 팔락… 팔락…

    나는 계속해서 일기장을 넘겼다.

    그러자, 이 두터운 일기장에도 드디어 끝이 보인다.

    마지막에 적혀 있는 일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벨페골력 3522년 4월 4일>

    누군가 내 일기를 훔쳐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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