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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231화 (231/1,000)
  • 232화 천사 소녀 네티 (2)

    구덩이 속에 잠들어 있는 소녀.

    그녀는 깊은 구멍 속에서 잠들어 있다. 마치 하늘에서 방금 떨어진 것처럼.

    머리 위의 황금색 고리와 등에 달려있는 하얀 날개, 손에 들고 있는 하프를 보아 그녀는 천사임에 분명했다.

    이 소녀를 깨우기 위해서는 순수한 영혼 하나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

    순수한 영혼이란 이 세상의 때가 전혀 묻지 않은 파릇파릇한, 즉 레벨 1짜리 뉴비를 뜻한다.

    튜토리얼조차 클리어하지 않은 완전한 뉴비.

    확실히 요즘 세상에는 찾기 힘든 존재임에 분명하다.

    단순히 찾는 것만 문제가 아니다.

    어디서 섭외를 한다 하더라도 그 뉴비를 이곳 어비스 터미널로 데려오기까지는 무수히 많은 난관이 존재한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몬스터에게 한 대만 맞아도 죽는다.

    눈보라나 크레바스, 추위와 피로 등 북대륙의 가혹한 풍토 역시 레벨 1에게는 힘겹다.

    이 무수히 많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계속하려면 경호를 하는 사람과 경호를 받는 사람 사이에도 꽤나 두터운 신뢰가 필요하다.

    누구 하나가 배신하는 순간 일이 꼬여 버릴 테니까.

    겉보기에는 쉬워 보여도 사실 은근히 복잡하고 까다로운 조건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런 상황을 오래 전부터 예견해 왔다.

    나와 드레이크는 다시 중앙대륙으로 되돌아가 초보자 존 입구에서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일정 레벨 이상은 출입 불가인 구역이다)

    초보자 보호구역 앞에서 한참을 기다리는 동안 드레이크는 내내 걱정을 했다.

    “여기서 이렇게 기다린다고 해서 적격자를 찾을 수 있겠나?”

    “걱정 마. 다 미리 안배를 해 놨으니까.”

    “……?”

    드레이크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저 멀리 튜토리얼 탑 안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는 게 보인다.

    “아휴, 웬 징그럽게 생긴 벌이 이렇게 많아. 싸우는 것 싫어요. 안 해요. 안 싸운다구요! 거절, 거절, 거절, NO, NO, NO.”

    튜토리얼 미션을 전부 거절하며 도망쳐 나오는 1레벨의 여자 플레이어.

    반달 모양의 가지런한 눈썹, 동그란 눈, 오똑한 코, 순해 보이는 얼굴상.

    바로 윤솔이었다!

    *       *       *

    윤솔을 북대륙의 어비스 터미널로 데려오는 과정은 꽤나 길고도 험난했다.

    낮은 레벨의 그녀는 조그마한 낙석에 맞는 것만으로도 죽을 수 있다.

    따라서 윤솔의 레벨로도 착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어구를 바리바리 싸서 짊어진 뒤 수많은 포션들을…….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불면 꺼질까 쥐면 깨질까 온갖 신경을 기울여 주어야 했는데 그 과정이 너무도 길고 복잡하여 다 적기에는 여백이 부족해 이만 줄인다)

    아무튼.

    우리는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어비스 터미널로 되돌아왔다.

    오는 도중 윤솔은 가로숲의 환상적인 풍경을 보며 연신 감탄했다.

    “우와! 풍경 너무 몽환적이고 예쁘다! 내가 왜 그동안 이 게임을 안 했을까!”

    그녀는 앞서 가는 내 어깨를 팡팡 치며 웃었다.

    “어진아. 네 부탁을 들어주길 잘한 것 같아! 덕분에 이런 구경도 다 해 보네.”

    그렇다.

    나는 ‘고인물의 골목게이머’ 라는 방송을 찍기 전 윤솔의 집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했던 부탁이 바로 이 퀘스트에 관한 것이었다.

    “풍경 멋지지? 어지간한 랭커들도 아직 구경해 보지 못한 구역이야. 아마 여기를 레벨 1때 와 본 사람은 네가 유일할걸?”

    내 말을 들은 윤솔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인다.

    절벽에 붙어 가로로 자라는 거대한 나무들과 거꾸로 흐르는 지하수.

    시야를 완전히 메우고 있는 거대한 안개의 바다.

    온 세상을 반짝거리게 만드는 누런 황금의 계곡과 찬란한 적빛으로 타오르는 용암 호수.

    이 모든 것들은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말 그대로 이세계의 진수(眞髓)이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환상적인 풍경이 이 어비스 터미널 안에 집약되어 있는 것이다.

    심지어 지금 터미널 안에는 위협적인 몬스터가 한 마리도 없다.

    아카식 레코드를 관리하는 불똥정령이 다른 생명체들을 싹 치워놨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윤솔은 넘치는 호기심을 모두 충족시키면서 어비스 터미널 아래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내려오는 도중, 그녀는 내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그런데 어진아.”

    “응?”

    “너는 왜 옷을 안 입고 다녀?”

    윤솔은 얼굴을 조금 발갛게 물들인 채 나를 힐끔 쳐다본다.

    나는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조금 고민하다가 이내 대답을 해 주었다.

    “음. 게임 여자 캐릭터를 생각해 보면 간단해.”

    “여자 캐릭터? 나 게임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게임 광고는 많이 봤지?”

    “응.”

    “원래 게임을 하다 보면 레벨이 올라갈수록 옷을 벗잖아?”

    “……아하!”

    윤솔은 손뼉을 탁 쳤다.

    게임 광고에 나오는 여자들은 다 헐벗고 다닌다.

    대부분 가슴과 엉덩이만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다니거나 심지어 몸의 극히 일부만을 끈이나 점 등으로만 가린 경우도 많다.

    이상하게도 레벨이 높을수록 장비의 노출도가 올라가며, 더 이상하게도 방어력 역시 상승한다.

    나는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와 비슷한 경우야.”

    “아아…그럼 어쩔 수 없는 거였네?”

    “그렇지. 결코 내가 변태라서 이렇게 다니는 게 아니라고.”

    옆에서 드레이크가 나를 벌레 보듯 쳐다보았지만 가볍게 무시해 주었다.

    이윽고.

    우리는 천사 소녀가 잠들어 있는 구덩이 앞에 서게 되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얼른 이 진상을 깨워 줘! 얘 때문에 맵을 못 고치고 있단 말야!]

    불똥정령은 우는 소리를 하며 내 주위를 뱅뱅 맴돌았다.

    나는 윤솔을 데리고 천사 소녀의 앞에 섰다.

    “솔아 이제부터 네가 해 줘야 하는 게 있어.”

    “으응, 알아. 설명 많이 들었잖아.”

    윤솔은 나를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이내.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천사 소녀의 이마를 한번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파아아앗!

    놀랍도록 환한 빛이 구덩이 밑바닥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옆에 있던 불똥정령이 윙윙 진동하며 재잘거린다.

    -띠링!

    <‘적격자’를 찾았습니다>

    <‘천사 소녀’와 플레이어 ‘윤솔’이 일체화됩니다>

    <‘기억을 잃은 네티’가 눈을 떴습니다!>

    나와 드레이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빛 속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흘러 빛기둥이 사라지자 구덩이 속에는 한 명의 작은 소녀만이 남게 되었다.

    “어어? 이것 봐 어진아! 내가 작아졌어!”

    윤솔.

    그녀는 10년은 어려진 듯한 키와 외모로 구덩이 바닥에 서 있었다.

    드레이크는 그것을 보며 감탄했다.

    “NPC와 플레이어가 한 몸이 되는 건가? 메인 퀘스트라서 그런가 참 독특하게 진행되는군.”

    “맞아. 이제부터 솔이가 우리의 ‘길잡이’가 될 거야.”

    나는 구덩이 바닥으로 내려가 윤솔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윤솔은 몸을 한번 파르르 떨고는 입을 열었다.

    “눈을 감으면 동영상이 보여. 아마 이 소녀의 기억인가 봐.”

    그렇다.

    설정 상 윤솔은 천사 소녀 네티의 화신이다.

    이제는 천사 소녀 윤솔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녀는 지금 과거의 기억을 대부분 잃어버린 상태.

    파편적인 기억만이 드문드문 동영상처럼 제공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네티의 기억을 되찾게 하고 그녀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히든 퀘스트에 휘말린 것이다.

    그러니 그녀와 일심동체가 된 윤솔이 동영상을 보고 그 단서를 증언해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윤솔은 눈을 감고 동영상을 시청한 뒤 그것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다.

    “으음. 지금은 별 다른 영상이 안 보여.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한 풍경만 계속 보이네.”

    “하늘에서?”

    “응. 구름과 빗방울이 보이고 계속 빠르게 이동하고 있어. 지상으로 떨어질 때의 기억인가 본데?”

    “오케이. 지금으로서는 그것이면 충분해.”

    나는 윤솔을 데리고 구덩이 밖으로 올라왔다.

    “아, 제가 잡아드리겠습니다.”

    “앗. 네 부탁드려요. 고맙습니다.”

    드레이크는 손을 뻗어 윤솔을 끌어당겨준다.

    무척이나 어색해 보이는 둘 사이.

    ‘음, 부디 빨리 친해지길 바랄게.’

    나는 시선을 돌려 불똥정령을 바라보았다.

    천사 소녀 네티를 깨워 윤솔의 몸에 빙의시키는 데 성공했으니 이제 퀘스트 완료다.

    아니나 다를까.

    -띠링!

    <히든 퀘스트 ‘아카식 레코드의 하급관리자와 진상 고객’을 완료하셨습니다>

    <아카식 레코드 관리자와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불똥정령은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내 품에 안겼다.

    [고마워! 이제 어비스 터미널을 고칠 수 있겠어!]

    “별 말씀을.”

    [그런 의미에서 당장 지형 수정을 시작할게!]

    ……응?

    나는 순간 잘못 들은 줄 알고 품속의 불똥정령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불똥정령은 내 품에 안긴 채 해맑게 웃었다.

    [원래는 지형 수정을 하면 주변 생물체들이 다 죽어서 좀 꺼림칙한데. 너희들은 친하니까 그 정도는 이해해 줄 거지?]

    “…….”

    불똥정령은 친해질수록 막 대하는 타입의 성격이었나?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녀석은 자기의 고유 권능인 시간과 공간의 힘을 발동시켜 버렸다.

    콰콰콰콰쾅!

    거대한 지진이 일어난다.

    주변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으아악! 이런 미친!?”

    나는 경악했다.

    재빨리 윤솔을 확 끌어당겨 품에 안자.

    “어머!?”

    윤솔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다.

    하지만 키가 절반 가까이 줄어들어 있는지라 그녀의 표정은 자세히 살필 수 없었다.

    “너도 이리 와!”

    나는 옆에 있던 드레이크의 손목도 확 잡아 끌어당겼다.

    “어머!?”

    드레이크 역시도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끌려온다.

    우리 셋이 한 데 뭉쳐 있는 동안.

    [이야아아아압!]

    불똥정령은 혼신의 힘을 다해 어비스 터미널의 ‘상처’를 고치기 시작했다.

    주변의 맵이 통째로 뒤틀린다.

    맵이 리젠되는 것은 많이 봤지만 이렇게 거대한 규모로 변하는 것은 오랜만이다.

    쿠구구구구구…

    이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비스 터미널의 바닥이 위로 상승하기 시작한 것이다.

    드레이크는 경악하여 소리쳤다.

    “설마 구멍이 메워지는 건가!?”

    깊이 20,000m의 깊은 구멍이 평지로 바뀌는 것이라면 정말 엄청난 지각변동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언제나 현실은 상상을 초월한다.

    단지 구멍이 메꿔지는 것에서 그치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은 금방 증명되었다.

    우리가 있던 바닥은 순식간에 위로 상승했다.

    뿌직! 뿌직! 우드드득!

    가로로 자라던 나무들이 죄다 꺾이고 물도 금도 용암도 전부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우리는 수천 미터의 거리를 뛰어넘어 지상에 도달하게 되었다.

    부우우우우웅-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닥의 상승은 멈추지 않는다.

    “아앗!?”

    윤솔과 드레이크는 동시에 입을 벌렸다.

    우리가 딛고 있는 바닥은 구멍 끝까지 올라와 지상을 넘어 허공까지 치솟아 오르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바위.

    우리가 올라앉아 있는 것은 검은 색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암석 덩어리였다.

    “이건 운석(隕石)이야!”

    윤솔은 눈을 감은 채 동영상 속의 기억을 말해 주었다.

    그렇다.

    대지에 20,000m깊이의 깊은 흉터를 만들어 놓았던 것.

    그것은 바로 하늘에서 떨어진 거대한 운석이었던 것이다.

    천사 소녀 네티는 그 운석에 실려 대지로 떨어졌었다.

    그리고 지금.

    이 거대한 운석은 불똥정령의 힘을 빌어 원래 있던 하늘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시간을 조정하는 힘이 운석이 떨어졌던 궤도를 반대로 되돌린다.

    공간을 조정하는 힘이 운석을 원래 있던 곳에 붙어 있게끔 만들었다.

    [잘 가, 친구들!]

    저 밑에서 불똥정령이 운석을 향해 작별인사를 건네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운석 위에 탄 채 원래 운석이 있던 곳, 그리고 천사 소녀 네티의 고향이기도 한 곳으로 향했다.

    끝없는 천공(天空)을 향해서!

    “우와아아아! 나 수학여행으로 제주도 갈 때 말고는 비행기 한 번도 안 타 봤는데!”

    윤솔이 환호성을 질렀다.

    엄청난 속도로 멀어지는 지상, 그리고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구름.

    언제 해도 신나는 경험 아니던가!

    드레이크 역시도 연신 감탄하고 있었다.

    “세상에, 운석을 엘리베이터로 사용하다니.”

    운석이 떨어진 곳에서 시간 타이머를 거꾸로 돌려 운석을 원래 있던 곳으로 거꾸로 되돌려 보내는 전략.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비행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졌고 지상은 순식간에 멀어졌다.

    저 아래 북대륙의 커다란 산들이 순식간에 작은 점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이 상황에서, 궁금한 것은 이제 딱 하나가 남는다.

    “하늘 위에는 뭐가 있을까?”

    윤솔과 드레이크가 동시에 물어왔다.

    “…….”

    나는 운석의 제일 높은 곳으로 올라가 하늘을 등지고 섰다.

    그리고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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