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천사 소녀 네티 (1)
좋아하던 성우(聲優)를 실제로 만나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분명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이지만 그가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는 순간 깜짝 놀랄 정도로 깊은 친숙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때로는 눈으로 보는 사이보다 귀로 듣는 것이 더 익숙한 관계도 있는 법이다.
* * *
드레이크는 눈앞에 있는 불똥정령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아아! 너! 그 시스템 알림음!?”
그러자 불똥정령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알아봐 줘서 기쁘다는 것을 온 몸으로 표현하는 중이다.
(애초에 몸이 얼굴뿐이라서 기쁜 표정을 짓는 것만으로도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
‘-띠링!’ 으로 시작하는 소리부터 그 뒤로 들려오는 알림음들.
똑 부러지는 발음, 듣기 좋은 어조,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수 있는 청아한 음색.
남성의 것인지 여성의 것인지 구분이 모호한 미성(美聲).
그동안 우리에게 수없이 위험과 성공, 안내, 축하 등을 건네 왔던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여기 있었던 것이다!
“얘가 아카식 레코드를 관리하는 녀석이야.”
나는 불똥정령을 툭툭 치며 말했다.
불똥정령은 시간과 공간의 힘을 다루는 강력한 OP캐릭터.
하지만 얼굴만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해맑고 귀엽게 생겼다.
드레이크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나와 불똥정령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데, 이 불똥 친구는 어째서 우리를 알고 있지?”
“그야 내가 ‘최초’ 타이틀을 하도 많이 세워서 아카식 레코드에 빈번하게 기록되었기 때문이지.”
예전에 잠깐 언급했던 대로, 업적에 ‘최초’ 타이틀을 많이 띄우면 게임 후반부에 특별한 혜택을 얻을 수 있다.
그것들 중 하나가 바로 아카식 레코드의 관리자와 친밀도를 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기록들이 보관되어 있는 아카식 레코드.
그것을 관리하는 이 불똥정령은 원래 몬스터와 NPC의 중간에 서 있는 몬스터.
비선공 타입이라서 먼저 건드리지 않는 한 가만히 있지만, 일단 적으로 돌리면 무시무시한 힘으로 반격해 온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다르다.
수많은 최초 업적을 달성했기에 그간 불똥정령과 낯을 많이 익혀 둔 상태.
자연스럽게 녀석과 나의 호감도는 MAX 단계일 것이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럴 경우 발생하는 특전은….’
아니나 다를까.
[히잉…고인물! 나를 좀 도와줄 수 있겠어!?]
불똥정령은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울상이 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히든 퀘스트를 주기 시작했다.
-띠링!
<히든 퀘스트를 발견하셨습니다>
<히든 퀘스트 ‘아카식 레코드의 하급관리자와 진상 고객’>
<히든 퀘스트 발생 조건: ‘최초 업적’ 타이틀을 108개 이상 보유한 자>
<히든 퀘스트 완료 조건: 아카식 레코드의 관리자를 난감하게 하는 진상 손님을 상대하자!>
<※제한 시간: 24시간>
불똥정령은 자기 목소리로 된 알림음을 자기 입으로 조잘거렸다.
본인을 도와달라는 퀘스트를 본인 입으로 알리는 모습이 어딘가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제발 나를 좀 도와줘! 우리 친하잖아! 응? 응? 나 이러다간 ‘윗분’에게 혼난단 말야! 뿌애앵! 뽀애앵!]
불똥은 내 주위를 돌며 계속 찡찡거린다.
그 모습을 본 드레이크가 내게 물었다.
“뭘 도와달라고 이러는 건가? 진상 고객을 상대하라는 게 무슨 뜻이지?”
“이 녀석이 설명해 줄 거야.”
나는 검지를 들어 불똥정령의 이마를 콕 찔렀다.
그러자 불똥정령은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24시간마다 세상 전체를 순찰 돌며 파괴된 지형을 복구하는데…이 ‘어비스 터미널’의 파괴된 부분을 복구하던 중에 큰 애로사항이 생겼어.]
“에로 하면 또 나지. 무슨 애로사항인데?”
“Arrow?”
[맵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지형을 뒤틀어서 원래대로 맞춰야 하는데…그 사이에 다른 생명들이 이 근처로 들어와 버리는 바람에….]
요컨대 맵을 복구해야 하는데 주변에 살아 있는 생물들이 너무 많이 생겨 버리는 통에 지형을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다는 말이다.
“……?”
하지만 드레이크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나는 그런 드레이크를 위해 ‘SKIP’ 버튼 없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이거야. 예를 들어 폭탄이 터져서 땅에 커다란 구멍이 났어. 그럼 이 구멍이 언제 사라지지?”
“그야 맵이 변경된 시점으로부터 24시간 뒤지.”
“그래. 그렇게 맵을 고치고 다니는 애들이 얘네인데…가끔 성격이 착해서 개미 한 마리 못 죽이는 애들이 있어. 그게 이 불똥 녀석이야.”
“아아, 맵이 리젠되면서 혹시나 다른 생명체들이 피해를 입을까 걱정이 된다는 거지?”
“그렇지.”
나는 드레이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불똥정령은 계속해서 곤란한 듯 말했다.
[나는 ‘윗분’에게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힘을 약간 넘겨받았어. 그것으로 이 어비스 터미널을 고쳐야 하는데…유독 한 생명체가 자리를 비켜 주지 않아서 걱정이야.]
사실 불똥정령이 본격적으로 힘을 쓰면 이 터미널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은 전부 도망갈 것이다.
엄청난 개체수를 자랑하는 리자드맨도, 그 사이에서 왕으로 군림하는 만인장도, 덩치 큰 아귀도, 그리고 그 무서운 샌드웜들조차도 이 어벙해 보이는 작은 정령을 당해낼 수 없다.
하지만.
이 불똥정령조차도 맵에서 쫓아내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 존재가 딱 하나 있다.
‘어비스 터미널의 진상’ 이라고 불리는 생명체.
나는 불똥정령을 밀치고 그 뒤에 있는 움푹한 구덩이로 향했다.
“……!”
나를 따라온 드레이크는 구덩이 속을 보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불타 녹아내린 흔적이 있는 구덩이 속.
그 속에는 한 명의 소녀가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것이 보인다.
잡티 하나 없는 백색의 피부.
등에는 하얀 깃털들이 보인다. 그것들은 마치 작은 날개처럼 생겼다.
심지어 머리 위에는 황금색 고리 하나가 노골적으로 떠 있었다.
전형적인 천사의 생김새였다.
불똥은 그 천사 소녀를 보며 투덜거렸다.
[아휴, 아주 진상이야 진상. 당최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를 않는다니까? 아예 배 째라고 드러누워서는…얘 하나 때문에 지금 지형을 못 수정하고 있어!]
바닥에 드러누워 맵 리젠을 방해하고 있는 소녀.
‘어비스 터미널의 진상’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엔 너무도 가녀리고 약해 보이는 소녀다.
“으음. 그럼 이 소녀의 잠을 깨워서 밖으로 내보내면 퀘스트 완료인가?”
“그렇지.”
드레이크와 나는 동시에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엇차!”
드레이크는 구덩이 밑으로 내려가 소녀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소녀의 모습은 더욱 더 신비로웠다.
주변 곳곳에 흩어진 흰 깃털, 몸을 감싸고 있는 흰 천에는 박음질한 자국이 없다.
손에는 하프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드레이크는 소녀의 머리 위에 있는 ‘엔젤 링’을 만져 보았다.
의외로 차갑고 딱딱한 것이 금속 재질인 듯하다.
“누가 봐도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로군. 아직도 남은 개체가 있었던가?”
‘천사족(天使族)’
오래 전에 악마족에게 패해 멸종당했다고 알려진 존재.
거인족, 정령족과 더불어 먼 옛날에는 이 세상의 지배종 중 하나였으나 점차 용과 악마들에게 밀려 사라진 종족이다.
드레이크는 소녀에게서 느껴지는 신비로움에 잠시 감탄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퀘스트의 제한시간을 의식하고는 소녀를 열심히 흔들어 깨운다.
“선생님. 이런 곳에서 주무시면 안 됩니다. 선생님.”
드레이크는 군인이 민간인 어르듯 딱딱한 어조로 소녀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마치 만근추 특성이라도 가진 듯 자리에 붙박여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으윽! 뭐지? 움직일 수가 없다. NPC가 아닌 건가?”
드레이크는 소녀를 깨우다 말고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그녀를 깨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듯하다.
“A+급 몬스터가 얽혀 있는 퀘스트가 그리 쉬울 리 있나.”
나는 드레이크의 옆으로 다가가 구덩이 속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이 애를 깨워 내기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해.”
“……제물?”
“으음. 플레이어 하나가 희생해야 한다.”
지금껏 여행을 함께 해 왔던 동료의 목숨. 그것이 이 소녀를 깨워낼 수 있는 방법이다.
꿀꺽-
드레이크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내,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왜 여기로 데려왔는지 알겠군.”
“…….”
“좋다. 어진. 나는 네게 목숨 빚이 있다.”
“…….”
“그리고 너는 나의 친구이기도 하다. 너와 함께 한 기억들을 돌이켜보면 정말로 즐거울 뿐인 시간들이었지.”
“…….”
“너를 위해서라면 나는 얼마든지 이 한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것이다.”
“…….”
“자! 와라! 나의 목숨을 취해라!”
드레이크는 근엄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가슴을 풀어헤쳤다.
재미있어서 잠시 그대로 둬 봤는데… 아무래도 이대로 가다간 기분 나쁜 꼴을 볼 것 같다.
나는 이쯤해서 손사래를 쳤다.
“미안한데. 여자 플레이어만 인정이야.”
“…그걸 왜 지금 말해 주는 것이지?”
“너무 박력 넘치게 말하길래 끊기가 뭐해서. 옷은 왜 벗었어?”
“…더워서.”
더워서 벗었단다.
나는 옷을 주섬주섬 입는 드레이크를 보며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동시에, 나는 오래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과거 ‘이름 없는 여왕’을 사냥할 때 나는 유다희를 이용해 레이드를 성공시킨 적이 있다.
그때도 분명 유다희의 목숨을 제물로 ‘이름을 되찾은 여왕’을 부활시켰었지.
“…하지만 이 경우에는 조금 더 까다롭단 말이지.”
나는 구덩이 속 천사 소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천사 소녀의 잠을 깨우기 위해서는 여자 플레이어의 목숨이 필요하다.
그것도 레벨 1, 세상의 때가 전혀 묻지 않은 뉴비의 목숨이.
내 말을 들은 드레이크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요즘 세상에 레벨 1짜리 뉴비가 어디 있나? 튜토리얼만 클리어해도 레벨이 5~10인데.”
“게임을 아예 해 본 적 없는 사람을 데려와야지. 튜토리얼도 클리어하지 말라고 하고.”
“그게 되는 건가? 음…튜토리얼은 거부할 수 있다고 쳐도. 요즘 세상에 뎀 계정이 없는 사람 찾기가 쉽지 않을 텐데. 또 중앙대륙에서 여기까지 보호해 가면서 데려오려면 신뢰도도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어야 하니….”
드레이크의 걱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모르는 상태에서 갑자기 이런 퀘스트를 받았다면 꽤나 난감할 수밖에 없다.
뉴비 섭외부터 경호, 이동까지 막대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테니까.
(거기에 배신을 당하거나 사이가 틀어질 위험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지만.
싸워서 이기는 것은 2류요 이겨 놓고 싸우는 것은 1류라고 했던가?
나는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내 놓은 상태였다.
요즘 세상에도 있다.
이 게임을 한 번도 플레이 해 보지 않은 천연기념물이.
그것도 아주 믿을 만한 사람으로. 가까운 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