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229화 (229/1,000)

230화 비싼 통행료 (3)

<샌드웜> -등급: A+ / 특성: 벌레, 땅, 가뭄, 앙버팀, 착굴(鑿掘), 지진

-서식지: 가혹한 사막 전 구역, 어비스 터미널 ‘칠흑 승강장’ A-51 구역

-크기: 50m.

-신화의 끝자락 말석에 표기되어 있는 이 거대한 괴물은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사막의 유목민들만큼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수백 마리의 낙타를 한꺼번에 집어삼키곤 했던 이 모래 속의 악몽을.

나왔다. 샌드웜!

365일 24시간 연중무휴 불철주야로 터미널의 ‘승강장’을 만드는 일꾼.

심연의 절벽 마디마디마다 훌라우프 모양의 빈 공간이 패어 있는 것은 바로 이 거대한 웜형(worm形) 지하종 몬스터가 날뛰고 지나간 흔적이다.

[그오-오오오오오!]

샌드웜은 절벽의 중간 부분에서 난데없이 툭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낙타의 피 냄새가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홱 돌린다.

입 안으로 들어간 모든 것들을 찢고 으깨고 분쇄해 버리는 저 수많은 이빨들.

언제 봐도 소름이 끼치는 지하종 특유의 구강구조이다.

문제는…이 샌드웜이 한 마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콰쾅! 우지직!

첫 번째로 나타난 샌드웜의 뒤를 이어, 맞은편 절벽과 대각선 아래의 절벽에서도 샌드웜 두 마리가 추가로 나타났다.

[크워어어어어억!]

[오-오오오오오오!]

공동에 울려 퍼지는 포효가 세 배로 커졌다.

“꺄아아아아아악!”

금은동 자매는 아래에서 튀어나오는 샌드웜 세 마리를 보고 경악했다.

가혹한 사막을 지배하는 필드 보스!

한 마리만 있어도 위압감에 짓눌려 죽을 정도인데 그 수가 무려 셋이나 된다!

금은동 자매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샌드웜이 처음 발견되었을 당시 얼마나 많은 플레이어들이 이 괴물에게 잡아먹혔는지.

“꺄악! 저 자식들 HP가 천만이 넘어!”

“예전에 가혹한 사막에서 봤던 놈은 구백만 정도였는데…그때 그놈보다 더 큰 것 같기도 하고….”

“피, 피해! 빨리 위로 올라가야 돼!”

금은동 자매는 필사적으로 레버를 당겨 도르래를 멈췄다.

하지만 일단 하강 탄력을 받기 시작한 도르래는 막을 수 없다.

끼기기기긱-

사슬과 톱니바퀴들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불똥을 빚어낸다.

뚝!

밧줄들이 몇 개 끊김과 동시에, 금은동 자매가 탄 도르래는 더욱 더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으아! 그냥 마법으로 올라가자!”

이은비가 ‘부유’ 특성을 이용해 언니 동생을 허공에 띄웠다.

하지만 그녀들의 몸을 적신 낙타의 피는 아직도 흥건하다.

쿠구구구구구!

샌드웜들은 육중한 몸을 꿈틀거리며 다시 절벽의 지면으로 파고들었고 이내 땅 속에서 금은동 자매를 뒤쫓아 가기 시작했다.

실로 강력한 집념이 느껴지는 모습이다.

한편.

나는 쏟아져 내리는 토사를 피해 벽에 납작 붙었다.

씨어데블의 점액을 도르래 전체라 발라놓은 덕분에 낙석 데미지는 입지 않을 수 있었다.

“후후후. 어비스 터미널에 사는 샌드웜은 가혹한 사막에 사는 샌드웜보다 더 크고 포악하지.”

“으음, 식탐도 더 많아 보이는군.”

나와 드레이크는 저 위로 멀어지는 금은동 자매와 샌드웜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아래로 내려가려면 샌드웜들의 시선을 끌지 않을 수가 없다.

일단 낙타를 데려오기는 했지만 뚜렷한 계획은 없던 차에 금은동 자매가 끼어들면서 일이 쉽게 풀렸다.

터미널의 가장 큰 난관 하나를 이렇게 의도치 않게 넘어 버린 것이다.

*       *       *

우리는 계속해서 어비스 터미널 아래로 내려갔다.

도르래가 끝나는 지점은 절벽에 바닥과 수평으로 돋아난 거대한 나무였다.

‘가로나무’라고 불리는 이 거대한 나무는 특이하게도 가로로 자란다.

절벽의 생태계에 완벽하게 적응한 결과라는 설정이다.

가로나무는 밑동이 굉장히 굵어서 튼튼한 지지대 역할을 하는데 그런 가로나무들이 모여서 만든 숲을 ‘가로숲’이라고 부른다.

이 숲 안에서는 자기장이 이상하게 뒤틀리기 때문에 나무뿌리에서 흘러나온 수액이 위로 흐르거나 옆으로 흐르는 등의 기현상이 벌어진다.

때로는 나무뿌리나 줄기에서 쏟아지는 수액이 콸콸 쏟아져 폭포를 이룰 때가 있는데 그 폭포들이 허공을 제멋대로 가로질러 우물 정(丼)자 모양을 이룰 때도 있었다.

“기상천외한 세상이로고.”

허공에 둥둥 떠서 흐르는 시냇물을 보며 드레이크는 연신 감탄했다.

나무에서 쏟아지는 수액이 폭포를 이룰 수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사실 나무의 크기를 생각해 보면 아주 이상한 것만은 아니다.

수없이 많은 거목들이 가로로 뻗어 있는 숲에 서 있노라면 내가 누워 있는 것인지 나무가 누워 있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저 아래 뿌옇게 낀 안개의 바다로 이어지는 가로숲.

우리는 도르래에서 내렸다.

“이제부터는 도수로 하강이다. 핑크 포인트야.”

나는 인벤토리에서 자일과 대못을 꺼냈다.

퍽!

대못을 나무껍질에 박자 수액이 튄다.

물탱크에 구멍이 난 것처럼 물이 줄줄 새어나오고 있었다.

못이 박힌 부근의 나무껍질은 덩어리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마치 물 먹은 코르크 마개를 부순 것 같은 질감.

“이 나무는 껍질이 두껍고 물이 많아서 못이 잘 빠져. 껍질 안쪽 속살까지 깊게 박아 넣어야 해.”

“으음. 확실히 수액이 많이 나오는군. 못을 고정하기가 어렵겠어.”

나와 드레이크는 못을 하켄 삼아 발판을 만들었다.

그리고 중간중간 앵커를 설치해가며 계속해서 하강했다.

나무와 나무의 사이는 가까울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십 수 미터씩 떨어져 있었다.

사실 이 정도 거리라면 그냥 뛰어내려도 괜찮지만, 안개가 하도 뿌옇게 끼어 있는 통에 밑의 나무가 보이지 않아 정확한 거리 짐작이 불가능했기에 파쿠르를 하는 것은 무리였다.

드레이크는 머리를 긁적였다.

“샌드웜이 왔다갔다한 굴로 들어갈 걸 그랬나? 그랬다면 밑으로 바로 내려갈 수 있었을 텐데.”

“아서. 샌드웜이 땅굴을 어디로 파 놨을 줄 알고. 그 안은 지옥 같은 미로야. 그리고 길을 안다고 해도 샌드웜의 몸에서 나온 용해액 때문에 온통 진흙탕이라 걷기도 힘들걸?”

나는 드레이크의 말을 일축하고는 계속 밑으로 내려갔다.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우리는 가로숲을 지나 곰팡이 협곡, 지하수의 바다, 황금지대, 용암 폭포 등등을 지났다.

결국 우리는 이 심연의 ‘밑바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띠링!

<‘어비스 터미널 심부’에 입장하셨습니다>

<히든 던전 ‘칠흑의 상흔’을 발견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바닥은 매끄럽고 반들거리는 평지였는데 온통 검은 빛을 띠는 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드디어 바닥인가!”

드레이크가 두 팔을 들며 환호했다.

아무리 게임에서의 거리감각이 현실과는 다르다고 해도 2만 미터면 단순히 멀기만 한 거리가 아니다.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긴 지저탐험이 드디어 끝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입구’를 발견했을 뿐이지.”

드레이크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 갖은 고생을 해 가며 바닥을 찍었는데…여기가 입구라고?

나는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드레이크의 입을 한 번 더 딱 벌어지게 해 주었다.

“이 아래부터는 또 다시 지저 2만 미터가 시작돼.”

“…….”

압도적인 클라스.

하지만 너무 그렇게 놀랄 것은 없다.

어차피 이 밑은 지금 당장은 갈 수 없는 구역이니까.

“‘황천의 유극(遊隙)’은 먼 훗날 대격변 이후에나 해금되는 구역이야. 오늘 바로 내려갈 것은 아니니 걱정 말라고.”

나는 바닥을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목표로 하던 것은 이미 발견했어.”

나는 고개를 들어 바닥 중앙을 바라보았다.

“……!”

나를 따라 시선을 돌린 드레이크는 이내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짓는다.

검은 돌로 만들어진 바닥.

이 바닥만은 주변의 다른 암석들과 색이 전혀 다르다.

마치 혼자만 전혀 다른 암질로 이루어진 듯했다.

그리고 이 기묘한 대지의 중앙에는 바닥과 마찬가지로 기묘한 것 하나가 둥둥 떠 있었다.

보스 몬스터!

지저 20,000m 아래에 도사리고 있는 최후의 핵심.

그것은 하나의 시뻘건 불덩어리였다. 크기는 어린애 주먹만 하다.

포르르르르…

마치 도깨비불처럼 생긴 이 조그만 불덩어리는 검은 돌바닥의 중앙을 하염없이 뱅글뱅글 맴돌고 있었다.

<백팔번뇌 불똥정령> -등급: A+ / 특성: ?

-서식지: ?

-크기: ?

-꽤나 큼지막한 불덩어리. 모습과 크기는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

항상 격무에 시달리는 것으로 보인다.

드레이크는 바짝 긴장했다.

“A+등급 몬스터인가. 저 녀석이 이곳의 최종 보스인가 보군.”

보기에는 귀여워 보이지만 위험 등급은 무시무시하다.

무려 A+등급으로 위에서 상대했던 샌드웜과 동급.

심지어 ‘그’ 샌드웜보다 더 깊숙한 지하에 도사리고 있는 걸로 보아…전투력은 그야말로 미증유! 측정불가인 것이다!

지금껏 수많은 수라장을 겪어 왔기에, 드레이크는 상대방을 외견으로 판단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쇠뇌와 마름쇠, 단검을 꺼내 전투 준비를 할 뿐이다.

생사의 긴장감이 오가는 필드.

하지만.

“어이~”

나는 불똥을 향해 친근하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불똥은 나를 돌아보고는 만화 캐릭터처럼 생긴 얼굴을 움직여 환한 표정을 지었다.

[아앗!? 너구나! ‘고인물’ 오랜만이야! 여기서 보네!]

녀석은 똑부러지는 발음, 듣기 좋은 어조,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수 있는 청아한 음색으로 인사를 건네 온다.

남성의 것인지 여성의 것인지 구분이 모호한 목소리였지만 확실히 듣기 좋은 미성(美聲)이었다.

나와 불똥은 바닥 중앙에서 만나 서로 뜨겁게 포옹했다.

마치 아주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만나는 듯한 광경.

“?”

오직 드레이크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런 드레이크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봐 드레이크. 왜 인사 안 해?”

내 말을 들은 드레이크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하며 나와 불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 아니, 서로 아는 사이인가? 나는 처음 보는데…….”

“뭘 처음 봐. 그동안 우리 여행길에 쭉 함께해 온 친구인데.”

“……??”

“기억 안 나? 우린 늘 셋이었잖아!”

“……???”

내가 재차 핀잔을 주자 드레이크는 더욱 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한편, 옆에 있던 불똥의 표정은 섭섭함으로 물들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 것도 같다.

눈앞에 있는 저 귀여운 모양새의 불똥은 분명 처음 보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던 것 같은 친밀감이 들었던 것이다.

“아는 사이 같기도 하고…….”

드레이크는 미간을 찌푸린 채 턱을 짚었다.

보면 볼수록 점점 빠져든다.

저 대충 그린 낙서 같은 얼굴, 한번 봤다면 무조건 기억에 남을 만한 저 표정.

……저 얼굴을 어디서 봤더라?

하지만 고민도 잠시.

눈치 빠른 드레이크는 이내 이 불똥에게서 느껴지는 기묘한 친밀감의 정체를 파악해 내고야 말았다.

“아!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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