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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226화 (226/1,000)

227화 개구리를 죽이는 방법 (5)

‘삶은 개구리(Boiled Frog)’는 서서히 일어나는 변화에 둔감한 사람을 비유할 때 쓰이는 개념이다.

개구리는 기본적으로 외부 온도 변화에 적응이 무척 빠른 동물.

따라서 개구리를 뜨거운 물에 삶을 때에는 무작정 끓는 물에 개구리를 넣으면 안 된다.

깜짝 놀란 개구리가 물 밖으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개구리를 삶고자 할 때에는 차가운 물에 개구리를 넣고 물의 온도를 서서히 올려야 한다.

차가운 물이 미지근해지고, 더 나아가 따듯해지고, 곧 펄펄 끓게 되는 동안.

개구리는 서서히 올라가는 물 온도에 적응해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게 되고 이내 끓는 물에서 삶아져 죽게 되는 것이다.

*       *       *

어비스 터미널 입구에 생겨난 호수.

차갑고 맑은 이 호수는 리자드맨들이 모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묵은 때와 각질, 낡은 비늘을 벗겨낸 뒤에도 리자드맨들은 호수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차갑던 물은 어느새 점점 미지근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자드맨들은 여전히 물에서 나오지 않았다.

물이 미지근한 것을 넘어서 뜨듯해질 때까지도.

차츰 차츰 올라가는 수온.

어느덧 물 위로 뿌연 수증기가 올라오기 시작했지만 리자드맨들은 아직도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다.

[……그르르르.]

리자드맨 만인장.

만 명의 리자드맨을 통솔하는 부족장.

여타 일반적인 리자드맨들보다 덩치가 두 배 가까이 큰지라 호수 가장 깊은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차다.

놈은 호수의 중앙에 몸을 담근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온천처럼 뜨듯해진 물온도를 즐기고 있는 모양새.

하지만 그것도 이제 슬슬 한계에 이르렀다.

번쩍!

만인장은 눈을 뜨고 노오란 눈동자를 빛냈다.

주변은 어느새 희뿌연 수증기가 자욱하게 깔려 있다.

보글보글보글보글…

심지어 뿌연 수증기 너머에서는 물 끓는 소리마저 조그맣게 올라오고 있었다.

[크르륵!?]

만인장은 눈을 감기 전과 180도 달라진 호수 풍경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변은 온통 수증기 천지라서 보이는 게 없다.

머리를 숙이니 허리에 넘실거리는 물 아래에서 기포들이 보글보글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만인장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왜 물 온도가 이렇게 되도록 몰랐을까?

맨 처음에는 얼음장 같이 차가웠던 호수다.

하지만 지금은 온천을 넘어 거의 열탕이 되어 있지 않은가?

[카오-오오오!]

만인장은 허공에 대고 포효했다.

부하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부하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만인장은 별 수 없이 수증기를 손으로 헤치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첨벙! 첨벙! 첨벙! 툭…

물을 헤치고 나가던 만인장은 무릎에 무언가가 닿는 것을 느꼈다.

[……!?]

만인장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벌어졌다.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은 바로 천인장의 시체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뿌연 수증기를 홰홰 휘젓자 수면 위에 떠 있는 리자드맨들의 시체가 보였다.

엄청난 수의 리자드맨들이 시체가 되어 물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전부 다 펄펄 끓는 물에 삶아진 모양새로!

[크아아악!]

리자드맨 최강의 존재, 만인장이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를 두려워하고 떠받들 다른 리자드맨들은 모조리 죽어 물 위에 둥둥 떠 있다.

이 세상에 홀로 남은 최후의 생존자.

멸족(滅族)의 공포를 오로지 혼자만이 견뎌야 할 운명.

만인장은 이제는 숫제 펄펄 끓는 물속을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숨통을 턱턱 졸라오는 아지랑이, 부글부글 끓는 열탕, 방향도 가늠할 수 없는 수증기 속을 더듬더듬 헤집으면서.

*       *       *

“결국 이렇게 됐군.”

나는 암벽 위에 선 채 호수 밑을 내려다보았다.

호수로 똑똑 떨어져 내린 용암은 결국 호수 전체를 펄펄 끓일 정도가 되었다.

멀쩡한 암반지대도 용암지대로 만들어 버리는 A+급 몬스터 ‘간쇼마루’의 힘이다.

이런 작은 호수 하나쯤 열탕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일도 아닌 것!

-<이어진>

LV: 63

호칭: 바실리스크 사냥꾼(특전: 맹독) / 메두사 킬러(특전: 마나 번) / 샌드웜 땅꾼(특전: 가뭄) / 어둠 대왕 시해자(특전: 선택) / 씨어데블 격침자(특전: 심해) / 대망자 묘지기(특전: 언데드) / 지옥바퀴 대왕게 잡이(특전: 백전노장) / 아귀메기 태공(특전: 잠복) / 크라켄 킬러(특전: 고생물) /  와두두 여왕 쥬딜로페의 펫(특전: 갹출) / 여덟 다리 대왕 참수자(특전: 불완전변태)

HP: 630/630

리자드맨을 1만 마리 가까이 잡아서일까? 레벨이 1올랐다.

“경험치가 그간 꽤 모였었나 보네.”

여덟 다리 대왕 큘레키움과의 전투 이후 거의 미동도 하지 않던 경험치 바가 조금 움직이는가 싶더니 결국 레벨이 올라 버렸다.

드레이크 역시 이번 사냥으로 레벨 48을 찍는 기염을 토했다.

여덟 다리 대왕을 잡고 46으로 폭렙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거둔 쾌거였다.

“버스 한번 제대로 타는군.”

드레이크는 나를 보며 껄껄 웃었다.

그는 지금 투망을 던져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은 골드와 아이템을 수거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마뱀의 잘린 꼬리> 한손무기 / C

위기에 빠진 도마뱀이 잘라놓고 도망친 꼬리 조각을 햇빛에 잘 말린 것.

끝을 쥐고 휘두르면 훌륭한 채찍이 된다.

-공격력 +50

-특성 ‘고속재생’ 사용 가능 (특수)

“이런 건 버리고.”

-<뱀 비늘 장화> 신발 / C

반투명한 비늘을 모아 엮은 신발.

신으면 몸이 약간은 가벼워질지도?

-민첩 +25

-특성 ‘백전노장’ 사용 가능 (특수)

“이런 건 모으고.”

드레이크는 잡템들을 수거할 때도 옵션을 따지고 있었다.

나의 지시대로 ‘민첩’ 옵션이 붙은 아이템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버리지 않고 모아놓는다.

“잘 하고 있네. 민첩 옵션이 나중에 가면 아주 중요해지니 꼭꼭 모아둬야 해.”

나는 드레이크를 격려했다.

특성이 어떻든 등급이 어떻든 간에 ‘민첩’ 옵션은 나중에 나에게 날개를 달아 줄 것이다.

한편.

“우와, 이 돈 좀 봐라 어진. 금광이 따로 없군.”

드레이크는 호수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 엄청난 양의 동전들에 경악하고 있었다.

리자드맨은 죽으면서 무수히 많은 골드를 떨궈 놓았다.

그 때문에 호수 밑바닥이 온통 금빛으로 번쩍번쩍 빛날 정도다.

짤그랑- 짤그랑- 짤그랑-

드레이크는 호수 밑으로 손을 한번 휘저어 들어 올린다.

그러면 두 손 가득 엄청난 양의 금화들이 딸려 올라왔다.

“이것만 해도 돈이 엄청 되겠는데?”

드레이크는 놀란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런 짤짤이에 신경 쓸 때가 아니야. 빨리 밑으로 내려가자고.”

아이템도 돈도 챙길 만큼 챙겼으니 됐다.

이제는 메인 퀘스트에 본격적으로 합류할 때다.

*       *       *

나는 리자드맨 취락의 목책을 넘어 절벽으로 향했다.

텅 빈 토굴과 반쯤 무너진 축대, 불타다 만 울타리들을 지나자 이내 경사가 급속도로 가팔라지는 구간이 나왔다.

어느 순간을 경계로 땅이 잘려나가기라도 한 듯 사라져 있었다.

감히 그 규모를 어림짐작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넓고 깊은 심연이 절벽 아래 아득하다.

드레이크는 까마득히 먼 바닥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떠 보았지만, 깊이 2만 미터가 넘는 지저갱의 끝이 눈에 보일 리 없다.

“이제 이 밑으로 내려가는 건가?”

“음. 여기 어디에 내려가는 길이 있을 텐데…….”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절벽 어귀에 있는 커다란 도르래를 발견했다.

접시처럼 생긴 발판에 사슬과 밧줄들이 어지럽게 연결되어 있다. 마치 거대한 천칭과도 같은 모양새.

오래 전에 봤던 그 모습 그대로다.

저 조잡해 보이는 기계들은 저 아래 심연의 밑바닥까지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절벽 중간중간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 연결되어 있는 밧줄과 도르래.

이것들이 아래편 ‘승강장’ 까지 우리들을 인도해 줄 ‘엘리베이터’인 셈이다.

끼긱-

밧줄에 연결된 거대한 접시가 허공에서 흔들린다.

“이 엘리베이터는 통행료를 받지. 아마 1인당 10,000 골드일 거야.”

만 골드. 현실의 돈으로는 약 천 원 남짓.

나는 인벤토리를 뒤적이며 앞으로 향했다.

…한데?

철커덩! 흔들…

드레이크는 통행료를 내지 않고도 저울 그릇에 쉽사리 올라탄다.

그는 흔들거리는 밧줄을 손으로 몇 번 잡아당겨 보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통행료는 없는 것 같은데?”

그 말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뭐지? 내가 회귀 전에 이용할 때는 분명 통행료가 있었는데?’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드레이크는 껄껄 웃었다.

“하하, 어진. 네가 틀릴 때가 다 있군.”

“…….”

나는 일단 앞으로 한 발을 내딛어 보기로 했다.

바로 그때.

-띠링!

<히든 퀘스트를 발견하셨습니다.>

내 귀에 시스템 알림음이 뜬다.

“……?”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퀘스트 창을 열었다.

그리고 조금 더 자세한 정보를 열람했다.

<히든 퀘스트 ‘일만참수자(一萬斬首者)’를 발견하셨습니다.>

<히든 퀘스트 발생 조건: 리자드맨 9,999마리 이상을 학살한 자.>

<히든 퀘스트 완료 조건: 최후의 리자드맨 처치.>

<※어비스 터미널 최초의 입장객만 수행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류의 히든 퀘스트였다.

미래 지식을 더듬어 봐도 모르겠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전혀 언급된 적이 없는 미지의 퀘스트.

……그렇다면.

‘꿀 냄새가 난다!’

분명 내가 회귀하기 전에도 이 퀘스트를 수행했던 놈이 있었을 것이다.

‘그 특전이 말도 안 되게 좋으니까 먹어 놓고도 그 비밀을 공유하지 않았던 것이겠지.’

이번에는 그 미지의 특전을 내가 먹게 생겼다.

“리자드맨 한 마리만 잡으면 된다 이거지?”

나는 도르래에 걸쳐 놓았던 발을 도로 뺐다.

다시 리자드맨 취락을 뒤져 봐야 할 판이다.

하지만, 굳이 그런 귀찮은 수고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크-워어어어억!]

저 멀리, 비늘이 듬성듬성 벗겨진 리자드맨 하나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리자드맨들 보다 두 배는 더 큰 덩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

<리자드 맨 만인장> -등급: A / 특성: 용, 고속재생, 백전노장

이 필드의 보스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펄펄 끓는 열탕 호수에서 살아남을 정도의 생명력은 경이롭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래. 손 안 대고 코 푸는 게 조금 아쉽던 참이었다.”

드레이크가 히죽 웃으며 화살을 말아 쥐었다.

리자드맨 목책 아래에 숨어 있을 때부터 근질거리던 뼈마디를 지금 풀 생각인가 보다.

“하긴. 코는 후비는 맛에 파지.”

나 역시도 지면에 발을 디뎠다.

머릿속은 히든 퀘스트의 보상이 무엇일지에 관한 의문으로 온통 꽉 차 있다.

어차피 히든 퀘스트를 깨기 위해서 리자드맨 한 마리를 더 잡아야 했던 차.

그것이 만인장이라고 해도 별 상관은 없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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