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222화 (222/1,000)
  • 223화 개구리를 죽이는 방법 (1)

    -띠링!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당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

    .

    늘 듣던 알림음.

    똑부러지는 발음, 듣기 좋은 어조,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수 있는 청아한 음색.

    남성의 것인지 여성의 것인지 구분이 모호한 목소리가 로그인을 알려 왔다.

    나는 게임에 접속했다.

    오늘은 메인 스토리를 진행하기 위함이었다.

    로그아웃 전 확인한 대로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온통 돌 가득한 황무지.

    저 멀리서 습기 없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이곳은 북대륙.

    ‘가혹한 설산’으로 넘어가기 전에 거쳐 가야 하는 넓디넓은 황무지다.

    “어이. 좀 늦었군.”

    아무도 없다는 말은 취소.

    저 멀리 구릉 위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사내 하나가 보인다.

    드레이크 캣. 부유섬 공략 이후 꽤 오랜만에 다시 보는 얼굴.

    그는 두 마리의 낙타를 몰아 내게로 다가왔다.

    “미국은 오늘 해가 쨍쨍해! 게임 하기 좋은 날씨지. 한국은 좀 어때?”

    “비 와.”

    “한국도 게임 하기 좋은 날씨로군!”

    드레이크는 호쾌하게 웃으며 낙타 등에서 내려왔다.

    “오늘은 어디로 데려가 줄 텐가?”

    “…가끔은 너도 사냥터 좀 알아봐라.”

    “내가 발견한 곳들은 전부 시시해. 네가 최고다, 어진!”

    드레이크는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척 치켜세운다.

    “됐어. 오빠는 맨날 말로 때우려고만 하고.”

    나는 대충 손사래를 치고는 황무지를 앞장서 가로질렀다.

    삭풍이 불어오는 아래, 조그마한 아르마딜로들이 바람을 피해 분주히 움직인다.

    몇 개의 바위산을 넘고 구릉지대를 지나자 이내 저 멀리 목표로 한 지점이 보였다.

    내가 향한 곳은 북부에 존재하는 거대한 싱크홀형 던전 ‘어비스 터미널’이었다.

    ‘어비스 터미널(Abyss terminal)’

    그것은 지저 2만 미터 깊이의 거대한 싱크홀이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뜬금없이 황무지 바닥에 뻥 뚫려 있는 이 구멍은 수직 동굴 같기도 했고 대분화구 같기도 했다.

    (바닥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몰라 자세한 분류는 불가능하지만 말이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절벽과 가파른 경사로 이루어져 있기에 자칫 잘못하면 안으로 끝없이 끝없이 굴러떨어질 수도 있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한 구멍답게 안쪽에는 온갖 동식물들이 서식한다.

    벽에 붙어 가로로 자라나는 숲,

    자기장의 영향을 받아 이상하게 뒤틀려 흐르는 지하수,

    유황 가스가 뿜어져 나오는 계곡,

    곰팡이와 버섯들로 이루어진 밀림…….

    지상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다양한 환경들이 이 거대한 구멍 하나에 몰려 있다.

    깊이에 따라 더욱 더 강하고 위험한 몬스터가 출현함은 물론이다.

    “정말 어마어마한 규모의 구멍이로군. 저 안의 생태계 하나로도 게임 하나를 따로 만들 수 있겠어.”

    드레이크는 높은 언덕 위에 서서 저 아래 펼쳐진 심연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이 세상이 푹 꺼진 것처럼 거대한 구덩이.

    너무나도 넓고 깊어서 마치 검은 바다가 펼쳐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음, 저 안으로 들어간다고?”

    드레이크는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어비스 터미널> -등급: ?

    등급이 ‘알 수 없음’으로 처리되어 있는 오픈필드형 던전.

    “문고리 3인방의 마지막 몬스터를 만나러 갈 시간이야.”

    나는 거침없이 구멍으로 접근했다.

    구릉을 내려와 심연 구덩이로 향하자 구덩이 주위에 펼쳐진 다양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반쯤 썩어 버린 축대,

    녹슬어 무너진 시추기,

    끊어진 갱차 레일,

    부러진 곡괭이와 삽 등등…….

    드레이크는 그것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뭔가를 캐던 공간인 것 같은데…….”

    “금광(金鑛)이야. 여기서는 금이 나오거든. 뭐 그것도 한때였지만.”

    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심연에 다가갈수록 반짝이는 모래나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자루 등등이 보였다.

    자루 안에는 사금이 두둑하게 들어 있었다.

    “오오. 이것들을 제련하면 금이 나오는 건가?”

    “그렇긴 한데…그걸 모아서 제련할 시간에 사냥을 하는 게 훨씬 더 돈이 될걸? 애초에 여기는 금이 아니라 다른 광물을 캐기 위한 광산이야. ‘불카노스’라고…….”

    나는 사금을 긁어모으는 드레이크를 만류했다.

    사금들이 담긴 포대가 쌓여 있는 너머로 낡아빠진 지도 한 장이 바람에 휘날리는 게 보인다.

    낙타를 몰아 지도가 붙은 안내판 안으로 다가가자 어비스 터미널의 내부 구조가 대충이나마 그려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비스 터미널은 수직으로 뻥 뚫려 있는 구덩이야. 하지만 그 크기가 워낙에 커서 군데군데 경사가 완만한 곳도 있어. 우리는 그쪽에 비치되어 있는 밧줄 다리나 도르래를 타고 천천히 내려갈 거야.”

    “음, 그렇군. 일반적인 암벽 등반과 큰 차이는 없겠어. 한데 저건 뭐지?”

    드레이크는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한 부분을 손으로 가리켰다.

    지하로 뻥 뚫려 있는 구멍의 중간중간에 토성의 고리처럼 생긴 둥근 홈이 보인다.

    수직동굴을 빙 두르고 있는 움푹 파인 빈 공간.

    마치 훌라우프 모양의 폭발이라도 일어난 듯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터미널이 있으면 승강장도 있어야지. 저건 ‘심연 승강장’이다.”

    “승강장? 저렇게 깊은 곳에? 뭘 타는 거지, 설마 지하철이라도 다니는 건가.”

    “보면 알게 돼.”

    나는 낙타를 끌고 아래로 내려갔다.

    파스락-

    딱딱한 흙 사이에는 공기가 꽤 많다.

    이런 흙은 밟으면 사정없이 부서져 내리며 가파른 경사 아래로 발을 확 잡아끌기 마련이다.

    이런 길을 갈 때에는 낙타가 꽤 도움이 된다.

    낙타는 느리지만 특유의 발굽과 각력으로 급격한 경사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타 내려가기 때문이다.

    “지형에 따라 탈것을 잘 골라야 해. 땅이 가파르고 약한 곳에서는 낙타나 산양, 설산 지대에서는 순록이나 원숭이, 갯벌이나 수몰지대에서는 커다란 게를 타는 것이 제일 좋지.”

    “호오, 탈것은 그저 날개달린 것이 최고인 줄로만 알았는데. 막 반짝반짝 빛나고.”

    “뭐 다른 게임에서는 그랬겠지만, 이 게임에서는 탈것들이 제각기 특성이 달라서. 여기서 날아다니는 것을 탔다가는 난기류에 휘말려서 바로 절벽에 부딪칠 거다.”

    나와 드레이크는 낙타를 몰고 계속해서 경사로를 타 내려갔다.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경사는 수직에 가깝게 곤두박질한다.

    그나마 넝쿨식물들이나 나무들이 가로에 가깝게 누운 채 자라고 있었기에 추락할 위험은 없어 보였다.

    “저것들은 뭐지? 거미줄인가?”

    드레이크는 나무들마다 치렁치렁 늘어져 있는 거미줄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 주었다.

    “원래 나무위성 거미들이 서식하던 공간인데…우리가 여덟 다리 대왕을 잡는 바람에 사라져 버린 거지.”

    “아하! 맞아, 알림음에 나왔었어. 여덟 다리 대왕이 리젠될 때까지는 거미형 몬스터들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었지.”

    “맞아. 그 덕에 이번 레이드는 시작부터 수월할 거야.”

    나와 드레이크는 조심조심 낙타를 몰아 내려갔다.

    거미들이 자취를 감췄어도 거미줄은 여전히 위협적이다.

    한번 닿으면 끈적해서 떼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윽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구덩이 밑으로 내려가는 부분에 서게 되었다.

    “저 앞부터는 정말로 절벽 다이브야. 로프와 자일, 도르래가 없으면 하강이 불가능하지.”

    “낙타는 어떻게 하지?”

    “걱정 마. 탈것을 위한 도르래도 있으니까. 사람이든 탈것이든 통행료 1만 골드만 내면 이용할 수 있어.”

    절벽 중간 중간에 난 거대한 나무들.

    그것들은 무수한 도르래에 의해 서로 연결된다.

    우리는 도르래를 여러 번 환승해 아래로 내려가면 그만인 것이다.

    시간이야 꽤 걸리겠지만 그것이 가장 안전한 하강법이다.

    …도중에 갑자기 툭툭 튀어나오는 몬스터들만 없다면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

    눈 좋은 드레이크가 저 앞에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기묘하게 생긴 ‘물고기’였다.

    넓적하고 커다란 입 속에는 곡괭이와 같은 이빨들이 무수하게 돋아나 전면의 흙을 파헤치고 있었다.

    넓은 지느러미는 앞발처럼 움직여 절벽 위를 걸어 다니는데 몸에서 송글송글 배어나오는 점액 때문에 지면에 몸이 딱 달라붙어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다.

    <이빨곡괭이 아귀> -등급: B+ / 특성: 물, 땅, 잠복, 착굴, 뺑소니, 과식

    -서식지: 어비스 터미널 전역

    -크기: 8m.

    -절벽을 오르거나 땅 속을 파고 다니게끔 진화한 물고기.

    이래봬도 물고기인지라 물 없이는 살 수 없다. 언제나 땅 속을 헤집고 다니며 지하수를 찾아 헤맨다.

    때로는 의도치 않게 금맥(金脈)을 발견하기도 하는 모양.

    기괴하게 생긴 물고기의 등장에 드레이크는 바짝 긴장했다.

    하필이면 놈이 우리가 내려가야 할 밧줄 사다리 앞에서 툭 튀어나온 것이다.

    “…….”

    “…….”

    하지만 나와 드레이크는 섣불리 반응하지 않았다.

    이빨곡괭이 아귀의 신경이 집중되어 있는 쪽은 우리가 있는 방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밧줄 사다리와 도르래가 있는 곳 근처에는 수많은 통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얼기설기 엮어 놓은 목책이 보인다.

    진흙과 나뭇가지들로 대충 만들어진 움집들이 꽤나 많이 존재했는데 목책은 그 취락을 빙 굴러 감싸고 있었다.

    이빨곡괭이 아귀의 관심이 쏠려 있는 쪽은 바로 여기였다.

    “뭐지? NPC들이 사는 마을인가?”

    드레이크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은 곧 드러났다.

    콰쾅!

    아귀가 날카로운 이빨로 목책을 갉아먹자 그 안쪽에서 수많은 몬스터들이 튀어나온 것이다.

    [쉬이이잇!]

    기묘한 숨소리를 내며 튀어나온 몬스터들.

    자신들의 취락을 습격해 온 이빨곡괭이 아귀에게 뚜렷한 적의를 표시하고 있다.

    그것들은 전신을 덮고 있는 칼날 같은 비늘, 두텁게 뭉친 근육, 채찍 같은 꼬리, 날카로운  이빨과 손발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몇몇은 손에 도끼나 창을 들고 있기도 했다.

    ‘리자드맨’

    인간의 외형과 도마뱀의 외형이 반쯤 섞여 있는 이족보행형 파충류 종족.

    오크와 더불어 가장 인간에게 해로운 몬스터.

    이 게임 세계관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골칫덩이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1